第二章 아수귀옥을 쫓다
"대체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주문룡은 사우를 대공자라 부르며 떠받들었다. 그런 그가 지금 엄청나게 화를 내고 있었다.
평소 냉정하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그가 한 행동치고는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사우도 율무천도 마존도 당황한 건 당연한 일이다.
"간 떨어지겠네."
하지만 사우가 그런 행동에 크게 흔들리거나 반성할 인물은 아니다.
너무나 여유로운 태도로 의자에 앉아 책상에 다리를 올렸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아무런 언급도 없이 외출을 하십니까. 그것도 하루씩이나."
"내가 어디 죽으러 갔냐. 그리고 이 자식이. 장가도 안 간 사람한테 왜 마누라 흉내를 내는 거야? 내가 내 맘대로 어딜 나갔다 오지도 못해?"
반성의 기미 따위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 주문룡은 얼굴만 붉힐 뿐 더 이상 일언반구하지 않았다.
어차피 먹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이렇게라도 화를 내면 속이나마 시원할 것 같아서 한 행동이었다.
"대체 어딜 다녀온 거야."
마존도 걱정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어디 가서 쉽게 당할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지금 상대하는 자들은 강했기 때문이다.
"그럴 일이 있었어."
"대체 그게 뭔지나 들어 보자고."
속 시원하게 털어놔도 부족할 판에 대답을 미루는 사우를 보자니 율무천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든든한 똘마니들을 얻은 좋은 만남이었지."
"똘마니?"
"그래."
사우는 씩 웃었다.
"나와라."
스스슥.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천장에서 뚝 떨어졌다.
"모준입니다."
"……!"
주문룡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 공간에서 자신을 포함한 네 명 외에 다른 이가 있었다는 건 느끼지 못했다. 기척을 완전히 지웠다는 말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감각을 속이는 일 말이다. 그건 상대가 최소한 자신과 동급이거나 더 강하다는 이야기다.
"이자…… 누굽니까."
자연스럽게 경계심이 든다.
"이름은 모준…… 흑천의 군대인 마황십팔전의 수장."
짤막하게 모준의 대한 소개를 마친 사우는 세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주문룡은 경계심 가득한 눈길로 모준을 살폈다. 율무천과 마존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사우만 쳐다본다.
보충 설명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사우는 소진악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세 사람에게 전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편에 서서 흑천살막을, 화월선자를 상대할 것이라는 것도 말이다.
사우는 모준이 거의 자신과 동등한 고수라는 걸 잊지 않고 말했다. 세 사람 다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사우라는 사내도 괴물 같은데 그런 존재가 하나 더 있다는 건 믿기 어려운 것이리라. 아니, 믿기 싫은 것이다.
특히나 주문룡은 사우의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눈초리였다. 자신보다 강한 건 인정한다. 하지만 사우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전혀 믿지 못하는 얼굴들이네."
"뭐…… 믿기 힘든 건 사실이지."
마존은 그제야 당혹감을 지우고 모준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저 평범한 체형에 외모도 어디 하나 특별한 구석이 없다.
모준이라는 사내는 살수로서 더 적합한 외형을 지녔다.
"믿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너희보다는 강한 건 사실이니까."
"좋겠네."
"그럴 것까지는 아니고."
사우는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었다.
그러곤 모준에게 전해 줬다.
"위치는 거기 적혀 있어. 이름과 생김새도. 나흘 안에 모두 처리해."
"알겠습니다."
"그게 뭔데."
율무천이 물었다.
"섬서성에 숨어 있는 아수귀옥 쥐새끼들 명단."
"……!"
놀라운 소식에 율무천과 주문룡, 마존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사우는 또다시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었다.
"마존은 이 명단에 적혀 있는 놈들 신상 좀 파악해. 그리고 확실한 놈들만 추려서 모준에게 전해 줘. 그럼 이 녀석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러지."
"율무천."
"음?"
"분명 아수귀옥 놈들은 섬서성에 본거지를 갖추고 있을 거야. 아주 은밀하게 주변에 포위망을 구축해야 돼. 그건 주문룡과 상의해 가면서 진행하면 될 거야. 열흘이야. 그 안에 섬서성 밖으로 천라지망을 펼쳐야 한다. 총타에 속해 있는 각 조직은 물론 지역에 퍼져 있는 문파들에게 은밀하게 연락을 취해서 진행해."
"그렇게 하지."
사우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보였다.
"쥐새끼들을 잡는 데는 매가 약이지."
* * *
"여어! 요즘 장사 좀 잘되나 봐."
손님이 나가는 걸 배웅 나온 주패(周覇)는 옆집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는 양씨의 말에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는다.
"글쎄요. 이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양 형네는 좀 어떻습니까."
"우리야 뭐. 만날 오던 손님들이나 오는 거지 뭐."
"어제 늦게 술 생각이 나서 양 형네 가게 오니까 사람이 꽉 차서 발 디딜 틈도 없더만."
"하하! 그렇다고 그냥 가나? 자네가 왔으면 없는 자리도 만들어 줬을 것인데."
주패가 포목점을 차린 지는 두어 달 되었다. 그에 비해 양씨는 한자리서 장사를 한 지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크기는 크지 않지만 양씨가 운영하는 술집은 매일같이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물론 워낙 자리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양씨의 인심과 푸짐한 안줏거리가 손님을 끄는 이유였다.
두 사람이 친해진 건 얼마 전부터였다.
양씨네 가게에서 심하게 술주정을 부리던 취객이 있었는데 주패가 그걸 보고 단 한 번에 제 압해 준 것이다.
취객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기에 아무도 제지를 가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별로 친분도 없는 포목점 주인 주패가 나서서 도와주니 양씨로서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자네 술 안 마시지 않았나?"
"아…… 가끔은 마시고 싶을 때도 있지요."
"그런가? 하하. 하긴, 그럴 때면 언제라도 우리 가게에 오라고. 말 나온 김에 오늘 어때?"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일찍 가게 문을 닫고 들어갈 생각입니다."
"그래? 어디 많이 아픈 모양이군. 건강 잘 챙기라고. 혼자 사는 이가 아프면 그거만큼 서러운 게 없으이."
"예."
양씨가 사라지고 나서 주패는 급히 가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급히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둑해진 골목길을 걷는 데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쉬익.
쐐액!
날카로운 소음이 주패의 귓가를 울렸다.
어둠 속에서 날아온 비도가 그의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허벅지를 향해 빨려 들어오는 검날을 피하기 위해 그는 재빨리 바닥을 나뒹굴었다.
몸을 낮게 낮춘 상태에서 그는 감각을 최대한으로 넓혔다.
적은 세 명이다.
두 번의 공격을 한 자들을 포함하여 한 명이 더 있다. 어디선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위치는 파악이 되질 않지만 분명 그런 느낌이 든다.
수많은 실전을 경험한 그의 예감은 정확하다.
'하나…… 둘…… 셋!'
주패는 신형을 날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었다.
뻑!
헌데 옆구리에 돌덩어리 하나가 와서 박혔다.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턱에도 둔탁한 무엇인가가 강타했다.
"끄으윽."
정신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단 두 번의 공격을 받았을 뿐인데 모두가 급소다. 그것도 작은 충격에도 사경을 헤맬 아주 중요한 위치다.
너무나 정확하게 꽂혔다.
주패는 그대로 절명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명령과 대답이 울려 퍼졌다.
해가 중천에 떴다고는 해도 이제 초겨울에 접어드는 날씨 덕분에 날은 쌀쌀했다. 하지만 한여름처럼 뜨거운 장소가 있다.
바로 대장간이다.
땀방울을 비 오듯 흘리며 뜨거운 불꽃 속에서 쇠뭉치를 두들기는 사람들에게 아직 겨울은 오지 않은 듯 보였다.
"어이, 지백(至白)! 손님 왔다."
피부 속에 둥그런 쇠구슬들을 박아 넣은 것 같은 근육질의 사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대장간 안으로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선비 차림의 남자가 들어섰다.
정말이지 그와 대장간의 분위기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걸 좀 고쳐 주시오."
"……."
망가질 대로 망가진 고철 검 한 자루를 내놓는 남자를 지백은 물끄러미 바라본다.
"닷 냥이오."
"좀 비싸군. 하지만 당신 실력이 좋다는 말을 듣고 왔소. 믿고 맡기고 가겠소."
"그러시오."
남자는 검을 지백이 가리킨 곳에 올려놓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소?"
"삼 년이오. 왜 그러시오?"
"그렇소? 내가 아는 지백은 눈 밑에 작은 점이 하나 있는데……."
순간 지백의 신형이 사라졌다.
"쯔쯧. 성격이 급하네."
선비 차림의 사내의 신형도 사라졌다.
지백은 대장간의 뒷문으로 도망쳤다.
그의 앞뒤로 두 사내가 길을 가로막았다.
선비 차림의 사내는 바로 마황십팔전의 부전주 섭무였다.
"생각보다 별론데."
"누구냐."
"우리가 누군지는 몰라도 돼. 하지만 네가 아수귀옥의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어. 그래서 명령을 받고 왔을 뿐. 더 이상은 궁금해하지 않아도 돼."
섭무는 지백의 정면에 서 있는 자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가 지백과 주먹과 발을 섞었다.
누가 보더라도 지백이라는 거한의 사내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섭무는 여유롭게 그걸 지켜봤다.
"적당히 하고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전음을 전해 들은 섭무는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품속에서 새까맣고 손톱만 한 암기를 꺼내어 일직선으로 뻗었다.
빛이 번쩍거림과 동시에 산처럼 커다란 지백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 * *
맑은 물 위로 작은 피 한 방울을 떨어트린 것처럼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섬뜩하기도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는 법이다.
바로 지금 언덕 위에서 그걸 올려다보는 미공자에게는 너무나 진풍경이었다.
"노출되었습니다."
"사상자는."
미공자의 뒤에서 용성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오늘로서 총 네 명입니다."
"안에서 발설된 건가."
"그건 아닙니다. 아마도……."
용성은 말끝을 흐렸다.
"소진악…… 그 늙은이가 벌써 세상을 등지고 싶은 모양이군."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됐어."
"하지만 이대로 두면 더 큰 피해가 됩니다."
"그러기 전에 빨리 움직여라?"
"죄송합니다."
용성은 미공자의 한마디에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벌써 몇 년째 그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지만 대할 적마다 두려운 감정이 피어오른다.
시커먼 어둠이 아니다. 피 웅덩이에 숨결이 막히는 기분이다.
"내가 왜 움직이지 않는지 많이들 궁금해하겠군."
"모두가 제 잘못입니다, 옥주."
"그럴 리가. 자네는 충분히 제 몫을 해 주고 있어. 하지만 말이야……."
미공자는 몸을 돌려 용성을 오만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용성은 감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볼 생각 따위는 품지 않는다.
그저 미공자의 발끝만 쳐다볼 뿐이다.
"아수귀옥의 야차혈왕에게는 그런 의구심을 품는 수족은 필요치 않아. 잘라 내면 잘라 내지 보듬어 줄 감정 같은 건 없어."
그 말에 의심이 들지 않았다.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내…… 경외함과 동시에 공포의 군주인 야차혈왕의 말이니 진심일 것이다.
용성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숙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섬서성에 퍼져 있는 아수귀옥 무인들에게 전해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위치에서 당장 벗어나 다른 곳에서 대기하라고 말이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조만간…… 움직일 것이니 동요하지 않도록 하고."
"예. 알겠습니다."
용성이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야차혈왕 모용하(慕容霞)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옮겼다.
모용하가 멈춘 곳은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지냈던 등가휘(登家輝)가 거처를 마련하고 있는 곳이었다.
삼 년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의 무예 수련을 담당하며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그와 모용하가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정문을 지키고 있던 자들도 모용하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숙일 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한두 번 왔다 간 것이 아닐 뿐더러 등가휘와는 돈독한 친분이 있다고 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용하입니다."
"들어오시게."
등가휘의 집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간 모용하는 안에서 붓으로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았다.
바닥에 넓은 종이를 펼쳐 놓고 노인은 집중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실내에 손님이 왔음에도 쳐다도 보지 않는다.
하지만 모용하는 그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의 모습이 더 보기 좋았으니까 말이다.
모용하는 말없이 한쪽 구석으로 치워진 자리에 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조용히 등가휘의 모습을 지켜봤다.
놀라운 집중력이다.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조급한가."
불현듯 등가휘가 질문을 건넸다.
하지만 붓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번 한 번의 손놀림에 망설임이 없다.
대화를 하면서도 가능한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운명의 수레바퀴는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네."
"하지만 아직도 의심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그자가 과연 그분을 대신할 만한 자인지요."
"나 또한 처음에는 그랬네. 헌데…… 지난 시간 지켜보니 영 시답지 않은 놈은 아닌 듯해. 그리고 이 일은 모두가 그분의 뜻이네."
"알고 있습니다. 다만 불안할 뿐입니다."
등가휘는 놀리던 손을 멈췄다.
"사상자가 나왔다지."
"예."
"십절무황이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군."
"사망총인지 아니면 금마옥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금마옥주는 바쁘겠지. 십절무황일 거야."
"그렇습니까."
등가휘는 몸을 일으키고는 여기저기 굳어진 근육들을 풀기 시작했다.
"나도 늙었나 봐. 여기저기 쑤시는 곳이 많으니."
등가휘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술 한잔할 텐가."
"예."
등가휘는 시비를 불러 자신이 아끼는 술을 내와 모용하의 잔에 따랐다.
"그러고 보니 올해로 몇 년이 지났지? 그 친구가 죽은 지 말이야."
"사 년째입니다."
모용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시간 참 빠르지. 절대로 죽을 것 같지 않던 사람 중 하나였는데 말이야."
모용하가 따라 준 술을 들이킨 등가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독하군. 아직도 그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을 것 같은데."
"……."
"추궁 같은 걸 하는 게 아닐세. 나도 자네의 입장이었다면 분명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마음을 정리한 지는 꽤 되었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다행인 일이고."
"제가 아직도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면 이번 일에 동참하지 않았겠지요."
"하긴. 일리가 있는 말이지."
등가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쩌다가 이런 사태까지 왔는지 모르겠네."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인간의 욕망이란 끝이 없으니 말일세."
"어르신도 많은 걸 잃으셨다 들었습니다."
"한심한 작자이지. 나란 사람은 말이야. 내 식구라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또 아끼던 수하들을 많이 잃었으니."
"하지만 아직도 용맥은 흑천살막에서 가장 강하지 않습니까."
"다 옛날이야기지."
용맥(龍脈)의 수장 파천용왕(破天龍王) 등가휘가 바로 지금 모용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노인의 정체다.
중원에서는 황태자의 무예 스승을 맡고 있지만 어두운 뒷면에는 황제도 부럽지 않은 단체의 가장 강한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용맥.
흑천살막을 이루는 조직 중 가장 강하다. 그 말은 세상에서 집단을 이루는 단체들 중 그들을 이길 세력이 없다는 걸 뜻한다.
모용하가 이렇게 공손하게 그를 대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절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왜소해 보이는 늙은 육체를 지니고 있지만 결코 아니다.
그의 무공은 하늘과 땅을 가를 가공할 만한 힘이 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모용하는 알 수 있다. 그의 눈을 마주하면 말이다. 엄청나게 큰 야망이 보인다. 하지만 속으로 삭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만족해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신기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의 밑에서 고개를 숙이다니. 더 황당한 건 등가휘보다 더 지독한 괴물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던 사내 말이다.
'흑천.'
"하지만 그자를 믿고 계시고 더 이상의 뒷걸음질은 하지 않으실 생각이시죠?"
"물론. 그렇다네."
등가휘가 웃자 얼굴 가득 깊은 주름이 배겼다.
* * *
"명단에 적혀 있는 이 중 다섯을 처리했습니다."
모준의 보고에 사우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나머지는."
"저희들의 존재를 알고는 몸을 빼낸 것 같습니다."
"흐음."
사우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사상자가 꽤나 많이 나왔다.
그런데 저들은 그저 도망만 친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당장이라도 모든 힘을 쏟아부으면 남북천맹을 무너트릴 수 있는 자들이다. 헌데…… 왜 숨죽이고 있는 것일까.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자신들의 은신처까지 들킨 마당인데다가 수족이 죽었는데 말이다.
일단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아수귀옥의 무인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것이다.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 이번 일을 겪고 나서도 그 자리에 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더 찾아 헤매도 무의미한 행동일 뿐이다.
그러니 기다린다.
그게 지금 사우의 결론이었다.
사우는 모준에게 보고를 받은 이후 소아경을 찾았다.
"어쩐 일이세요?"
"그냥."
짧게 대꾸한 사우는 소아경이 머무는 거처를 두리번거렸다.
여인의 방은 처음이다.
그녀가 이곳에 머문 지는 꽤 시간이 흘렀다. 그녀의 향기가 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쁘지 않았다.
"여인의 방은 처음이신가 봐요?"
"뭐…… 그런 건 아니고."
속내를 들킨 것 같았는지 사우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런데 일찍도 찾아오셨네요."
"음?"
"아버지를 뵙고 온 게 아니던가요? 당신이 설무랑과 외출을 하고 왔다는 걸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
사우는 입맛을 다셨다.
이미 그녀가 알고 있다면 말을 꺼내기가 더 쉬워진다. 차라리 잘된 것이다.
"이번 일에서 빠져 줘야겠어."
"뭐…… 뭐라고요?"
그녀의 눈썹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불꽃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무섭게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진득한 살기마저 느껴진다.
"그게 아버지의 뜻이던가요? 당신에게 나를 이번 일에서 빠지게 해 달라?"
"거짓말 같은 거 할 줄 모르는 성격이라 솔직하게 말하지. 맞아. 십절무황이 내게 간곡하게 부탁한 내용이 그거야. 너를 이번 일에서 빠지게 하라."
"왜죠?"
"그거야 내가 알 턱이 있나. 십절무황에게 큰 선물을 받은 대가로 당신을 이번 일에서 빠지게 할 셈이야."
소아경의 어깨가 떨렸다.
"네가…… 뭔데."
"……."
처음으로 그녀가 사우에게 반말을 했다. 그만큼 흥분하여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것이리라.
"네가 대체 뭔데 나에게 이래라저래라야."
옆구리에 검이 있다면 소아경은 뽑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사우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했을 게 틀림없다.
지금 그녀의 기세는 그러고도 남을 만했다. 하지만 사우가 그런 모습을 보고 무서워할 리가 없다. 조금 당황스러울 뿐이다.
"어쨌든 당신은 이번 일에서 빠져야 돼."
오로지 자신의 뜻만을 전한다. 그녀가 왜 그래야 하는지 설득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여자를 달랜다거나 위로하는 언변을 사우에게 기대하는 건 사막 위에서 물을 찾는 것만큼 희박한 일이다.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안 되면 강압적으로라도 해야겠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형의 복수를 하는 일에 참여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잘됐다.
이참에 그녀를 이번 일에서 빠지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사우다.
"강압적으로? 하! 어디 해 보시죠."
소아경도 쉽게 고집을 꺾을 위인이 아니었다.
"총주. 설무랑입니다."
심각한 상황 속에서 설무랑의 전음이 들렸다.
"무슨 일이죠?"
"삼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아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내 사우가 강압적으로 자신을 계획에서 뺀다고 한 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사우는 잔인한 미소를 보였다. 소아경은 그 모습이 인간 같지 않게 느껴졌다.
"당신 짓인가요."
"눈치챘을 텐데."
"원래 일 처리가 그런가요."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헛웃음만이 나온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가 않았다.
"제가 제외되면 당신은 사망총이라는 큰 힘을 잃게 돼요. 그런데 왜 그렇게 나를 제외시키려고 하는 거죠?"
"아까 말하지 않았나? 당신 부친에게 큰 선물을 받았다고. 그 답례일 뿐이야."
"거짓말을 하고 계시네요."
그런 거에 대해서 사우가 자기 생각과 상관없이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줄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사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더 이상의 설명이 귀찮다.
"선택은 당신이 하는 거야. 삼라의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이번 일에 참여를 해야겠다면 그렇게 해."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설무랑의 일갈이 실내를 뒤흔들어 놨다. 사우의 과한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이다.
무적대군 설무랑이다.
사우 앞에서는 약한 존재이지만 현 무림에서는 설무랑 정도 되는 무인은 흔치 않다.
그의 기세는 가히 폭풍 같았다. 소아경만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사우와 검을 섞었을 것이다.
"쯔쯧. 목숨 귀한 줄 모르는 놈이네."
손자뻘도 되지 않는 사람에게 듣는 말치고는 너무나 모욕적이다. 허나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내를 대할 적에 나이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무림이라는 곳이 그렇다.
나이, 학식, 배분, 그런 것보다 오로지 누가 더 강한가 하는 문제가 크다. 그런 점에서 사우는 설무랑보다 몇 배는 우위에 있는 자다.
그런 사우에게 지금 설무랑의 행동이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삼라의 저승길 동무라도 만들어 주려고?"
"후우."
소아경은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인 것이다.
흥분해서 날뛴다고 사우가 인질로 잡아 둔 수하들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들의 안위부터 일단 확인해야만 한다.
"당신…… 아니 아버지의 뜻대로 하죠. 그러니 삼라…… 풀어 주세요, 지금 당장."
"내가 어디까지 그 말을 믿어야 하는 거지."
"약속해요. 이번 일에서 빠질 거예요."
진심을 다해서 말하는 듯 보였지만 사우는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녀가 언제라도 지금 한 약속을 어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할 만큼 한 것이다.
여기까지 했으면 소진악의 부탁을 잘 이행한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되었다.
"믿어 보지."
"저만 빠지면 되는 건가요? 사망총은 이번 일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 사우는 잠깐 동안 말없이 있었다.
"편한 대로."
그녀의 말대로 사망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하늘과 땅 차이다.
있다면 좋은 것이다.
"그럴게요."
"빌어먹을."
상서운과 백염과 홍염이 지하 밀실에서 나왔다. 상서운은 장시간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생하셨어요."
하지만 세 사람의 표정은 소아경을 보자마자 풀렸다. 아니 이내 어둡게 번져 갔다.
"대체 이자가 왜 우리를 잡아 둔 겁니까."
상서운의 질문에 소아경이 미소 지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총주."
"오늘부터 전 흑천의 복수를 하는 일에서 빠져야만 할 것 같네요. 설무랑."
"예."
"오늘부터 사망총을 임시로 이끌어 주세요."
"하지만 총주."
"지금은 그대밖에 없어요."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예요. 삼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는 설무랑을 총주라 생각하고 따라 주세요. 사우의 명령에도 반발하지 마시고."
소아경은 너무나 담담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화가 나 있거나 짜증 같은 감정은 없어 보였다.
"전…… 만나 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소아경은 그 직후 사우에게로 찾아갔다.
"아직 할 말이 남았나?"
"고마워요. 약속을 지켜 줘서."
"뒤에서 헛짓거리할 놈은 아니지."
사우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게끔 도와준다.
"그런데 왜 온 거야."
소아경이 있는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질문을 던진다.
"아버지…… 어디 계신 거죠."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버지와 만난 장소를 알려 줘요."
"알려 줘도 이미 늦었을 거야. 거기는 주로 머무는 곳이 아닌 것 같았거든. 아마도 여기저기 거처가 일정치 않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요."
그제야 사우는 소아경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작정하고 떠난 아버지를 왜 그토록 찾는 거지. 딸에게 비밀로 할 만큼 중요한 일을 한다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연락을 하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상관없어요. 딸이 아버지를 찾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밖에서 당신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자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나."
"설무랑은 입이 무거워요."
"그럼 난 가볍다는 건가?"
"아뇨. 설무랑과 그대의 차이점이 있죠. 그대는 제게 숨기실 이유가 없거든요. 설무랑과 아버지의 친분을 알기에 애초부터 물을 생각을 하지 않은 거예요."
맞는 말이다. 사우에게는 비밀을 간직해야 할 의무가 없다. 게다가 지금까지 그곳에 있을 리도 없다.
대답할 때까지 귀찮게 굴 것이다.
사우는 소진악과 만남을 가졌던 장소를 말하고 말았다.
"감사해요. 약속대로 전 이번 일에서 빠지도록 하죠."
냉랭하게 돌아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움직일 거예요."
"불가합니다."
설무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사망총이 사우와 함께하고 난 이후부터 그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 왔다. 그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다.
현재 안전한 장소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완수해야 할 임무가 있다면 총주의 안위를 지키는 일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말이다.
그녀가 잠들어도 그는 편히 잠들지 못한다.
헌데 지금 독자적으로 움직이겠다는 건 정말이지 불가능한 일이다.
"농담이었어요. 그렇게까지 얼굴색이 안 좋아지실 필요는 없잖아요."
"……!"
안도의 한숨이 설무랑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상서운은 어디 있죠? 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리고 떠날 거예요."
"알겠습니다. 상서운을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