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七章 몸부림 (37/38)

第七章 몸부림

"태사……태부라."

사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이런 직함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

"오랜만입니다, 공자."

등가휘는 손자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사우를 맞이했다.

"걸음마를 배우실 적이 엊그제 같으신데…… 벌써 이리 장성하셨다니."

"그런 유치한 옛날이야기를 듣자고 여기 온 게 아니야."

"변함이 없으시군요."

"천성이 어딜 가나."

등가휘는 너털웃음으로 사우의 말을 받았다.

"그렇죠. 천성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 법이죠. 감출 수는 있어도 말입니다."

"못 들어 주겠군."

사우는 귀를 후벼 파며 인상을 팍 구겼다.

"누구야."

"……."

"저놈이 당신을 만나면 알 거라던데. 그 녀석 누가 죽였어."

"날씨가 참 좋습니다."

등가휘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여기서 이야기해."

"칼자루는 제가 쥐었습니다. 공자."

"칼자루 쥐고 있는 손을 잃고 싶지 않으면 앉아."

"글쎄요……."

사우의 협박이 등가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명색이 파천용왕이라 불림 받는 이다. 흑천살막 중 가장 강하다는 용맥의 수장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그를 협박으로 몰고 가기에는 아직 사우의 연륜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등가휘는 그럴 수 있다면 그래 보라는 태도를 유지했다.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힐 인물이 아니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사우는 그래서 이번에는 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그의 뒤를 따랐다. 장원의 크기는 상당했다. 거느리는 가솔들의 수도 적지 않다. 후원에 자리 잡은 정원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이름 모를 나무들과 꽃들이 피어 자신들의 존재를 뽐낸다. 물론 사우나 등가휘에게는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기억나십니까. 공자께서는 어린 시절 이런 정원을 너무나 좋아하셨다는 걸."

"늙으면 거짓말이 느나 보군."

"정말입니다."

사우는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지만 일부러 기억 못하는 척했다.

"얼굴이 붉어지시는 걸 보니 기억이 나신 모양입니다."

"조금 더울 뿐이야."

"어쨌든 그때 공자는 이런 꽃들과 나무를 참 아끼셨죠. 그리고 그분도 굉장히 잘 따랐고 말입니다."

"늙어도 기억력 하나는 정말 좋네. 참 좋겠어. 많은 걸 기억할 수 있어서 말이야."

"늙으니 남는 건 추억밖에 없더군요."

등가휘는 작은 연못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 모든 걸 정리하시려 하셨습니다."

"흑천…… 살막 전부를 말인가?"

"예. 그건 저밖에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지요."

"그게 다른 놈들 귀에 들어가면 반심을 품기에 부족하지 않을 이유가 되었겠지."

"하지만 그들은 알아 버렸습니다. 그분의 뜻을."

등가휘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물론 전 아닙니다. 그러니 살기를 거두시지요. 고기들이 놀랍니다."

"당신하고 말장난할 시간 없어. 뜸 들이지 말고 이야기해."

"서두르시지 않아도 곧 모든 걸 알게 되십니다."

등가휘는 품속에서 물고기 밥을 꺼내어 연못에 뿌렸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물고기들이 일순간에 먹이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분의 선택은 오로지 한 여인 때문이었습니다. 소아경. 현 사망총주 말입니다."

"미친놈이군.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낭만이 있었던 분이죠. 다른 이들의 눈에 보면 정신이상자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흑천은 절대자였다. 지배자의 자리다. 중원 작은 지역에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때론 빼앗으려고 한다. 얽히고설켜 수십 수백 가지의 은원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그런 그곳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가 지배자이고 절대자이다. 그것이 흑천이다.

그런 그가 모든 걸 버릴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흑천은 그걸 꼭 하고자 했다.

그래서 소아경과 이름 모를 시골로 가서 평범하게 농사나 지으며 살고자 했다. 그게 그의 소망이었다.

반신의 경지에 이른 능력을 가지고서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

"꿈같은 소리나 지껄이는 미친놈이었군."

사우의 말이 맞다. 흑천이 꿈꾸던 삶은 꿈같은 소리였다. 누군가에게는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삶이 흑천에게는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배부른 소리에 멍청한 꿈이라고 사우는 생각했다. 그런 녀석을 이기겠다고 미친 듯이 수련한 자신이 한심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게 더 아프고 괴롭다.

"그분께서는 천천히 정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흑천의 자리에 오르셨고 십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준비하셨습니다. 소진악이 육성한 마황십팔전…… 그들은 반심세력을 대비해 만드신 조직입니다."

"영리하긴 하군."

"그렇죠. 불만을 품고 있던 소진악에게는 흑천의 측근으로 다시금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죠.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했을 것이고 말입니다. 그게 자신의 목을 조여 올 무기라는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사우는 물끄러미 연못을 바라봤다.

"그런 상황에서 비밀이 새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누군지 아나."

"물증은 없지만 확신은 있습니다."

"때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예감이 정확할 때가 있는 법이지."

"불길한 예감은 더더욱 소름 끼치게 맞아떨어지는 법이죠."

"……."

"소진악의 딸…… 소아경."

"틀렸어."

사우는 별다른 감정 없이 그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같은 꿈을 꾸었던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그 꿈을 깨 버릴 일이 있을까."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다 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겠죠."

"동상이몽……."

사우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도 그 녀석을 사랑하지 않았나?"

"그분의 위치와 지위를 사랑했던 것이겠지요."

"흠."

소아경의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녀가 기억을 잃은 후 중원에서 만나기 전에는 더더욱. 모든 건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들었다.

그래서 등가휘의 말을 완전히 부정하기 힘이 든 것이다. 그가 본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과거 그녀의 성격이 어땠는지, 정말로 그 녀석을 사랑했는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물론 이건 저만의 추측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면 비밀에 대해서 입을 연 건 당신이겠군."

"그렇게 되는 셈이죠. 하지만…… 용맥은 흑천의 심장입니다."

"심장이 누구를 위해 뛰는지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게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용맥이 흑천의 죽음에 아무런 연관이 없길 바라지. 네놈들은 정말 강하거든."

"칭찬으로 받아들이지요."

등가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용하가 공자를 모셔오지 않았다면 그들과 마주하셨을 겁니다."

"그들?"

"금마옥. 그들 전체가 중원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공자를 급히 모신 것입니다."

이번에는 사우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마옥 전체의 인원이 중원에 나타난 일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이로써 흑천살막을 이루던 모든 단체가 중원의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이지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모든 건 흑천이 죽고 나서 생긴 일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봐도 괜찮았다.

검옥을 박살 낸 것은 사우 그였으니까 말이다. 중원을 관리하던 그들이 사라지자 하나하나 씩 흑천살막을 구성하던 조직이 등장한 것이다.

헌데 이번은 목적이 다른 듯 보인다.

"금마옥은 이번 기회로 중원을 본인들이 점령하고 흑천살막이 아닌 새로운 단체를 만들 생각인 듯싶습니다. 그들 전체 이천 명의 무인이 현재 중원으로 나타난 것이 그런 뜻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당신 생각은."

"막아야 합니다."

"어째서지?"

"금마옥과 사망총은 그분을 돌아가시게 한 장본인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제 눈앞에는 공자께서 계십니다."

"후훗. 날 흑천의 자리에 앉힐 계획인가?"

"그분과 유일하게 같은 피를 나눈 분이 공자뿐이지 않습니까."

"난 그따위 자리 줘도 안 가져. 내가 원하는 건 그놈을 죽인 놈을 찾아서 내 힘을 시험해 보는 것이지. 혹시 화월선자라고 들어 봤나?"

"화월선자?"

등가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놈이야. 그놈이…… 흑천을 죽였어."

"그가 누구이던 간에 혼자만의 힘으로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용맥의 힘을 빌려라?"

"예."

"필요 없어. 애초에 모든 걸 혼자서 할 생각이었거든. 흑천의 자리를 나보고 꿰차라는 말을 하려고 나를 불렀나 본데 헛수고한 거야."

사우는 미련 없이 등을 보였다.

"공자!"

"더 할 말이 있어?"

"흑천을…… 그분의 몸에 칼을 꽂은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

"그녀입니다. 사망총주…… 소아경."

돌렸던 사우의 몸이 다시금 등가휘와 마주했다. 그의 눈빛이 얼마만큼 무섭게 돌변해 있었는지 등가휘는 보고야 말았다.

* * *

금마옥 일부는 도시로 나왔다.

그들은 커다란 집을 빌려서 머물렀다. 소아경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정신분열증을 보이고 있었다. 시비가 가지고 온 음식 접시를 모조리 깨부쉈다.

괴성을 고래고래 질러 대고 자해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녀는 서서히 미쳐 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그녀는 홀로 어둠 속에서 머물렀다.

방 안으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음식도 먹지 않는다. 이대로 조금만 있다가는 굶어 죽을지도 몰랐다.

방문을 살며시 여는 이가 있었다.

"나가세요."

"그대로 죽을 생각이냐."

"그럴 생각이에요."

메마른 그녀의 음성에서 소진악은 진한 슬픔과 괴로움을 느껴야만 했다. 거부할 수 없고 도저히 흘려보낼 수 없는 그녀의 아픔을. 하지만 소진악은 애써 그런 그녀의 슬픔을 무시했다. 지금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데에만 힘을 쏟아야 했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서자 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핏발 선 눈은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분명 그렇게 보였다.

저런 눈빛을 받아도 소진악은 서운하지 않았다. 자신이 딸의 입장이었어도 이런 아비를 용서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녀는 기억을 잃기 전에 금제를 당했었다. 설무랑이 그런 쪽으로는 일가견이 있었고 그가 직접 걸었다.

덕분에 흑천을 죽일 수가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 흑천은 원수라고 각인시키고 그녀의 손에 검을 쥐어 줬다.

가장 가까이에서 일시에 사혈을 찌르게 했다. 효과는 흑천의 죽음으로 증명해 줬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녀는 흑천의 죽음 이후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다.

다른 건 기억하는데 흑천과의 만남과 헤어짐만 기억해 내지 못하는 이상 현상이 나타나 버린 것이다.

그건 금제를 건 설무랑도 해답을 찾지 못하는 의문이었다. 그것이 며칠 전 머리에 받은 충격으로 인해 돌아온 것이다.

소진악으로는 과거의 잘못을 빌었어야 하는 걸 지금에서야 빌게 된 형국이었다. 늘 불안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딸의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미안하구나."

"그가…… 정말 죽었나요?"

"그래."

"하아!"

속 안에 있는 모든 걸 내뱉는 듯한 한숨이었다. 정말로 믿기지 않는다.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였다니. 자신이 그를 죽였다니.

사우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흉수가 바로 자신이었다니.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손이 멈추지 않고 떨렸다. 도저히 떨림이 가라앉질 않는다. 소진악은 음식을 놓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 순간 소아경의 눈빛이 변했다. 뭔가를 결정한 그런 눈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죽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지는 못했다.

* * *

"반응이 어떻던가요."

"살 떨려 죽을 뻔했네."

"그놈이 용왕을 그렇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자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아니…… 그건 자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야. 지금껏 사우가 펼친 구천제혈신검은 반의반도 보여 준 것이 아닐세."

"……."

"만약 모든 힘을 끌어올린다면 자기 스스로도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성을 빼앗기지."

등가휘는 귀신을 본 아이처럼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용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직접 검을 섞어 봤지만 등가휘가 저렇게 말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강하다고 인정하는 이가 파천용왕이다. 그런 그의 말이었기에 오로지 무시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점점 호승심이라는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도저히 구천제혈신검이 어떤 힘을 가졌기에 등가휘가 저렇게 말하는 것일까.

갑자기 심장이 뜨겁게 달궈진다.

"조급해하지 말게. 직접 싸우지는 못할지라도 두 눈으로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구천제혈신검이 얼마만큼의 강한 무공인지를."

"사우라는 자가 함께 할까요."

"아마도."

"그럼 본격적으로 전력을 합쳐야 하겠군요."

"본맥은 수일 내로 주변으로 모일 것일세."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마도 전면전으로 갈 것 같네. 수하들의 마음을 잘 정비하도록 하게."

"잘 알겠습니다. 그럼."

모용하가 나가자 등가휘는 생각에 잠겼다. 패배라는 단어는 떠올리지 않았다. 오로지 승리다. 그것만이 살길이다. 그리고 흑천살막의 맥을 이을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 * *

사우는 조용히 자신의 방에서 천왕공을 운기했다. 현재 그의 몸 안에 존재하는 모든 혈들은 뚫려 있는 상태였다. 구천제혈신검을 펼치는 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 단 하나 열리지 않은 혈이 존재했다. 지금껏 구천제혈신검을 배우고 익혀 오면서 완전히 뚫지 못한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구천제혈신검을 완성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곳이 뚫리지 않는 한 구천제혈신검 중 가장 강하다는 마옥혈검(魔玉血劍)을 펼쳐 보일 수가 없다.

사우도 알고 있었다. 마옥혈검을 펼치는 순간 이성을 잃게 되면 인세에 하나의 악마가 탄생한다는 걸 말이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도 없다. 수십 수백만의 군대가 동원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더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의 정신력이 얼마만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지 말이다. 아마 흑천도 그 단계까지는 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마옥혈검을 펼치면서 이성을 잃지 않는 경지에까지 올랐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가 그토록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것도 사랑했던 여인에게 말이다. 사우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흑천을 죽인 흉수를 찾아다녔는데 그 상대가 손속 한 번이면 죽일 수 있는 존재라니.

게다가 그녀와 함께 흑천의 흉수를 쫓기 위해 노력했었다는 사실이 사우를 화나게 했다.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천왕공을 운기하면서 그런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확인된 건 없었다. 정말로 파천용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금마옥, 사망총, 그리고 소아경과 그녀의 아비.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시켜 버릴 것이었다. 반대로 등가휘가 거짓을 하는 거라면 그 또한 거기에 맞는 징벌을 내릴 작정이었다.

일단 사우는 등가휘의 말을 믿기로 했다. 용맥은 마음만 먹는다면 흑천살막쯤이야 손쉽게 장악할 만한 이들이었다.

허툰 수로 그렇게 흑천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집단이었다. 죽어도 명예롭게 죽는 이들이 있다면 유일하게 용맥의 무인들을 꼽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우는 현재로서는 이곳에서 머물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 기간이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등가휘의 뜻을 따를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싸움에서 소아경을 만나면 직접 물어볼 생각이었다. 정말로 그러했는지. 거짓말을 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녀의 눈만 봐도 이제는 알 것 같았으니까.

* * *

사우는 마존과 주문룡에게 마지막으로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결정해. 이번엔 정말로 니들 목숨 같은 거 신경 쓰지 못할 테니까."

사우가 중원에서 본 이들 중 가장 강하다고 치부할 수 있는 이들은 두 사람뿐이다. 이들도 금마옥과 사망총의 싸움에서는 엄청난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자신이 돌봐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구천제혈신검을 모조리 쏟아부을 마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주변을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진다. 오로지 살육에 미쳐 있는 존재로 검을 휘둘러야만 한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물어본 것이다. 살아남을 자신이 있냐고. 아니, 이번 전투에 두 사람은 빠질 것인지 함께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마존과 주문룡은 묵묵히 침묵을 유지했다. 두 사람으로서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의 문제가 아니니 말이다.

"제가 대공자를 따랐던 이유는 저의 오랜 숙원을 풀어 줄 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은 혈천마성을 만들었지만 죽였던 자들이기도 하지요. 지금 함께하려는 자들도 그런 무리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쉽게 따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네 아버지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아?"

"모릅니다."

"무적대군 설무랑이다."

"……!"

"그는 사망총주의 최측근임과 동시에 혈천마성의 사람이라면 찢어 죽일 원수이지. 이건 확실한 거야. 내 목을 걸어도 좋아."

"그럼…… 참여하겠습니다."

주문룡은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사우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자신의 아버지 흑마궁주를 죽인 흉수를 몰랐다면 모를까 알아 버린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사우는 마존과 눈을 마주했다. 그는 굉장히 불쾌한 얼굴로 사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우는 피식 웃었다. 그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확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 이제부터는 충분히 몸을 만들고 있어. 무리하지 않는 선 내에서."

* * *

등가휘는 자신의 방에서 사우와 모용하와 함께 있었다.

"아직까지는 움직임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부 인원이 이동했다는 건 확인되었습니다."

"위치는."

"섬서성에 있는 규모 있는 장원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부상을 당한 모양이군."

"누구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네. 아수귀옥은 어느 정도나 모였나."

"현재 장원 주변에 삼백 명 정도의 전력을 주둔시켰습니다. 이동 중이거나 조금 멀리 있는 이들을 합하면 얼추 육백은 됩니다."

"용맥은 어느 정도나 되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사우가 물었다.

"백도 채 되질 않습니다."

"지금 나랑 농담을 하자는 건가?"

사우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용맥의 수가 백 명밖에 되질 않는다? 그의 기억으로는 수백이 넘었다.

"모조리 죽었습니다."

"죽어? 누구에게?"

"금마옥입니다."

"……."

사우는 굉장히 놀라운 걸 본 사람의 얼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용맥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무패의 전설을 보유한 자들이 그들이었다.

분명 사우의 머릿속에는 그렇게 각인되어 있었다. 헌데 그들이 금마옥에게 죽었다?

금마옥도 약한 집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용맥을 어찌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자들은 결코 아니었다.

"금마옥은 과거보다 열 배 스무 배나 강해져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이후 전 금마옥과 사망총을 추궁하기 시작했죠. 그 과정에서 금마옥은 숨겨 왔던 힘을 보였고 덕분에 본맥의 무인들이 대부분 죽고 없어진 상황입니다."

등가휘의 얼굴에 자조 섞인 미소가 그려졌다.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마옥이 오랜 시간 이런 날을 위해 준비해 왔기 때문에 당한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준비해 온 듯 용맥의 추궁에 맞서 싸웠다. 등가휘는 그래서 그들이 사망총과 결탁하여 흑천을 살해하는 일을 주도했다고 생각했다.

"금마옥주는 누구지."

"천외안 용천기입니다."

"낯선 이름이군."

"금마옥은 사실 아수귀옥만큼이나 잘 알려진 바가 없었죠."

"어쨌든 용맥이 까였다면 얕봐서는 안 된다는 소리인데."

"수적으로도 불리합니다. 저희 정보에 의하면 사망총이 약 육백 명. 금마옥이 이천입니다."

"총 이천육백 명의 생명을 빼앗아야 끝나야 하는 싸움이지요."

모용하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저쪽에서 너무 시간을 끄는 것 같지 않아? 저들은 예전부터 준비를 해 왔다고 했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예상대로라면 벌써 움직였어야 하는 일인데 말입니다."

"소수 인원이 머문다고 하는 그곳에 대해서 더 조사해 봐."

등가휘가 모용하를 바라봤고 모용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날 밤 누군가가 등가휘의 장원의 담벼락을 넘었다. 검은 인영의 움직임은 고양이처럼 가볍고 날렵했다.

지붕을 타기를 몇 번 침입자가 멈춘 곳은 바로 사우가 머무는 전각이었다. 미련 없이 건물 안으로 그림자는 침입했다.

사우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정신은 깨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멀리서부터 누군가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사우는 그저 시체처럼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침입자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심장이 너무나 빨리 뛰어서 주체를 하기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온몸의 힘을 모조리 터트리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이윽고 방문을 스윽 밀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바로 소아경이었다. 현 사망총주이자 등가휘가 말한 흑천의 목숨을 빼앗아 간 여인!

"내가 올 줄 알았나요?"

그녀는 사우가 이미 자신이 왔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아경은 그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 주고자 왔다.

그녀로서는 굉장히 용기를 낸 행동이었다. 사실을 발설할 경우 자신의 생은 그걸로 끝일 수도 있다.

사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사우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았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이 시간에 자신이 있는 곳까지 찾아왔는지 궁금했다.

"할 말이 있어요."

소아경의 시선은 사우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우의 발끝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도저히 사우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곳까지 온 것만으로도 그녀로서는 엄청나게 힘이 들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가며 왔다.

그런데 막상 사우와 마주하니 이번엔 입술이 떼어질 줄 몰랐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면서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지만 막상 입을 열어 말을 하려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니까…… 여기 온 이유는……."

"내가 먼저 말하지. 너 정체가 뭐야."

"……!"

"기억을 잃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흑천…… 그놈을 죽였나?"

"어, 어떻게 그걸……!"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는 내뱉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해 버렸다. 그 결과 사우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오로지 기세만으로 소아경의 몸이 날아가 버려 벽에 쳐 박혔다. 뼈가 으스러진 것 같았다. 숨을 쉬는 게 힘이 들어진다.

"하아…… 하아!"

가쁘게 숨을 들이마시는데 사우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소아경의 머리카락을 무지막지하게 잡았다.

"역시…… 네년이 죽인 거였어."

사우의 손이 그녀의 목으로 내려갔다.

"커헉!"

목줄기를 잡힌 소아경의 몸이 스르륵 허공으로 떠올랐다.

"바로 죽이지는 않을 거야. 겁먹을 필요는 없어."

바로 사우는 그녀를 반대쪽으로 집어 던졌다. 식탁이 있던 자리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나무로 만든 식탁이 소아경의 몸과 부딪히자 반쪽이 나 버렸다.

쿨럭!

그녀의 입에서 붉은 핏물이 터져 나왔다. 호흡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허나 억지로라도 숨을 쉬려고 애썼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생이 끊길 것 같았다.

소아경은 악착같이 호흡을 이어 나갔다.

"변명이나 들어 보지. 정말로 그놈이 가진 것이 탐나서 사랑하는 척 연기를 하는 것인지."

"……."

소아경은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힘이 들었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랬기에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어디부터 잘라 줄까. 손? 아니면 발?"

사우가 다가올수록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사우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할…… 할 말이 있어요."

"그건 네년의 손가락 하나 자르고 나서 하도록 해."

사우는 검을 들어 올렸다.

"인질이…… 되려고 왔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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