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 백호 유적 (2) >
공간대 한쪽에 깃발을 넣어두고, 걸어가길 한참.
높다란 장벽이 마주 보는 형태의 협곡 내부에 누가 보아도 인위적인 길이 만들어져 준혁을 인도했다.
협곡은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끝에 도달하자 보이는 십여 미터 크기의 동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닌 듯, 안과 밖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동굴 내부는 묵직한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고, 진법의 영향인지 기감으로 안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준혁과 청명이 동굴 입구에 도달해 발을 옮기지 않고 있자, 동굴 안에서 처음에 보았던 붉은 새끼 여우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길을 안내하겠다는 듯 천천히 동굴 안으로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다행이라고 하던데? 무슨 뜻인가?”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그저 대인께서 진법 지식도 뛰어나니 다행이라고···.”
“싱겁긴. 안으로 들어가지.”
“예, 대인.”
붉은 여우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자 그들은 거대한 공동을 볼 수 있었다.
공동 중앙엔 한눈에 보아도 외국인처럼 보이는 자가 앉아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매부리코, 꼬불꼬불한 갈색 머리가 한번 보면 잊어버릴 수 없는 외모였다.
자비에로 보이는 수사 주위에는 검붉은 선과 회색 선, 그리고 금빛 선이 어지럽게 교차되어 기묘한 문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번갈아 가며 빛나는 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유적의 진법을 파괴하기 위해 작동 중인 것처럼 보였다.
쉬지 않고 수인을 맺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자비에가 천천히 눈을 뜨며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선배님. 비록 첫 만남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이렇게 뵙게 되었으니 지난 일은 잊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고개를 숙이는 자비에를 보며 준혁도 마주 웃어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사가 양보해준 덕에 유적을 구경하게 되었으니. 그전의 감정은 서로 접어두는 게 좋아 보입니다.”
청명은 불만인 듯 입을 내밀었지만, 가타부타 말을 꺼내진 않았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진법을 유지하고 있어 제가 움직이진 못하니, 무례하다 생각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약속하신···.”
자비에가 말끝을 흐리자, 피식 웃은 준혁은 공간대에서 산과 계곡이 그려진 깃발을 던져 주었다.
자비에를 향해 날아가던 깃발은 그의 손에 잡힌 순간 흐물거리며 녹더니 바닥의 진법 문양으로 흡수돼 사라져 버렸다.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비에가 가문의 보물이라 했던 깃발은 사용에 제한이 있어 애초에 준혁이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자비에도 그것을 쉽게 내어주었던 것.
깃발이 흡수돼 사라지자 진법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더욱 강력해졌다.
그제야 자비에는 한시름 놓은 듯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저것이 없으면 유적을 해제하는데 수배는 힘이 든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나 보군.’
“헌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그것이···.”
즉답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리는 자비에를 보며 준혁은 공간대에서 구부러진 깃발을 꺼내 보였다.
“거의 끝이 보인다 했으니, 이제 곧 유적에 들어가 볼 수 있겠지요? 설마, 저희를 안으로 끌어드리기 위해 또 거짓을 말한 건 아니겠지요?”
자비에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사실, 유적 진입을 막는 대부분의 결계는 해제가 끝났습니다. 한데 마지막 결계의 정체를 알지 못해 아직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혹여나 선배님께서 진법을 훼손시켜버릴까 봐 우선 안으로 모신 것이니···. 노여워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준혁의 눈살이 찌푸려지려는 순간, 자비에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해서 하는 말인데···. 선배님과 청 수사가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두 분이 도와준다면 이른 시일 안에 결계를 파훼할 수 있다 확신합니다. 만약 그래 주신다면 유적의 보물을 정확히 삼등분하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비에의 품속에서 서책 두 권이 날아와 준혁과 청명에게 각각 날아갔다.
준혁은 날아오던 서책을 멈춰 세우고 기감으로 숨은 장치가 있는지 확인하고는 안에 내용을 확인했다.
‘서양인들은 서책형식의 옥간을 사용한다더니, 종이에 영력을 담는 것이 부적과도 흡사하구나.’
서책은 유적을 감싸고 있던 결계에 관한 것이었는데, 층층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보호진이 해제되는 과정과 마지막 남은 진을 어떤 식으로 공격하고 있는지 상세히 적혀있었다.
그때 청명이 다가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복잡하게 적어놓았지만 결국 지도 모른다는 말 아닙니까요? 저 도적놈이 살고자 대인을 또 한 번 기만한 겁니다요.”
“흠···.”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마지막 결계도 끝이 보입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자비에 말에 준혁은 청명을 바라보며 눈짓으로 진법의 한 방향을 가리켰다.
준혁의 뜻을 파악한 청명은 자비에를 보며 흥- 하고 코웃음 치더니 바닥에 복잡하게 펼쳐진 진법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두 손을 댔다.
자신이 운용하고 있는 진법안으로 청명의 기운이 흘러들어오자, 자비에는 준혁의 눈치를 살짝 보다 입을 뗐다.
“조심해주시게. 멸하진과 대라멸진 말고도 다양한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으니, 함부로 건들면 안 되네.”
청명은 자비에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한동안 눈을 감고 바닥에 그려진 진법을 확인하고는 준혁에게 돌아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대인, 전혀 모르겠습니다요. 저놈 말대로 진입을 막는 마지막 보호진만 해제하면 될듯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감조차 안옵니다요. 이런 식으로 무엇인지 파악조차 못 한다면 저걸 해제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한번 확인해 보지.”
준혁은 청명에게 구부러진 깃발을 건네고는 진법이 그려진 바닥으로 이동했다.
“청명. 내가 확인하는 동안, 저자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려는 낌새를 보이면 바로 대라멸진을 망가트려 버리게.”
“예! 대인!”
자비에가 들으라는 듯 반협박의 말을 내뱉은 준혁은 어지럽게 그려진 진법 바닥을 기감으로 확인해 보고는, 천천히 두 손을 가져다 댔다.
진법 안으로 기운을 들여보내 확인해 보자, 서책에 나온 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보호진이 아주 얇은 저항선을 지키며 수많은 진법의 힘과 기운을 차단하고 있었다.
준혁은 정신을 집중해 천천히 마지막 남은 보호진을 살피다 기운을 퍼트려 살짝 찔러보았다.
당연히 다른 힘들과 마찬가지로 튕겨 나올 것을 알았기에, 그 반발력의 크기를 기준으로 진법을 확인하려 했던 것,
그 순간.
준혁의 기운에 닿은 마지막 보호진이 펑- 하고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동시에 공동에 설치된 진법 전체가 진동하며, 진법이 그려진 바닥과 닿아있던 준혁의 두 팔에서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화악-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은 단숨에 크기를 키우더니 준혁을 집어삼켜 버렸고, 그 모습에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자비에가 급하게 움직이며 손을 뻗었다.
“대인! 피하십시오!”
청명의 눈엔 그 모습이 마치, 자비에가 진법에 집중하고 있는 준혁을 기습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개새끼가!!”
시야를 날려버릴 것 같은 백광도 자비에가 펼쳐놓은 모종의 함정이라 생각했기에, 청명은 단 1의 주저함도 없이 손에 잡고 있던 깃발을 반으로 빠개버렸다.
콰아아앙!!
콰르릉-
그리고 그 신호에 답하듯 협곡 일부에서 대폭발이 일어나며 공동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동시에 대라멸진이 이상 반응을 보이며 공동의 바닥 속으로 향하고 있던 진법의 기운이 반전돼 천장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곤 또 한 번 기운의 충돌을 일으켰다.
콰앙!! 파앗-
목표를 잃은 대라멸진은 사방으로 기운을 뿜어댔고, 곧 기운을 소멸시키는 멸하진과 공명하더니, 두 진법의 기운이 갑작스레 한곳으로 모이며 수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응축하며 모여들던 기운이 강렬한 노을빛 섬광과 함께 대폭발했다.
콰아앙!!
“이런 씨부랄!!”
진법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청명의 눈에는 이미 준혁과 자비에가 소멸한 듯 기운 자체가 사라진 상태였다.
하긴 청명에겐 지금 그따위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대라멸진과 멸하진이 공명하며 폭발한 기운은 순식간에 공동을 날려버렸고, 청명 역시 무사할 순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청명이 서 있던 자리는 동굴에서 공동으로 들어가던 입구 쪽.
거대한 기운이 폭발하며 공동 안에서 발생한 압력에, 청명은 전신이 터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동굴을 타고 한참을 날아가다 구부러지는 벽면에 처박히고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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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준혁은 하얀빛에 휩싸인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적마도를 소환하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하얀빛은 준혁의 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옭아맨 듯, 그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또 다른 대책을 마련하기도 전, 속 울렁거림과 함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힘을 느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설마 그토록 준비했음에도 자비에의 함정에 빠진 건가 하는 생각이 들려는 찰라.
준혁은 눈앞의 광경이 바뀌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둡고 눅눅한, 대략 상하좌우로 50여 미터는 될 것 같은 공동 안.
바닥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고, 정면에는 하얀 구름과 회색 구름이 그려진 비석과 그 옆엔 공동의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은 석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하얀빛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임을 느꼈다.
‘여긴?’
갑자기 이동된 장소를 기감으로 확인해 보려는 순간, 등 뒤에서 감탄 섞인 환호성이 들렸다.
“드디어!! 드디어! 백호 유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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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에는 성큼 다가오더니 준혁을 향해 가슴에 손을 올린채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선배님! 대단하십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풀지 못한 결계를 단번에 해제해 버리시다니! 어떻게 하신 건지 알려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준혁은 별것 아니란 듯 손을 휙 저었다.
“수사는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리 간단한 걸 가지고 그렇게 고생하다니.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이곳부터 살펴봅시다. 보아하니 강제로 전송된 듯한데 아는 게 있으십니까?”
자비에가 고갤 저었다.
“저 역시 유적은 처음입니다. 게다가 유적이란 게 일정한 규칙을 가진 신비경과는 다르게. 정해진 게 없으니 아는 게 있다고 달라지진 않겠지요.”
“흠···.”
“다만 저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자비에가 가리키는 곳은 하얀 구름과 회색 구름이 그려진 비석이었다.
자비에는 비석 앞으로 성큼 걸어가더니 손으로 만져보고 영기를 불어넣는 행위까지 마치더니 말을 이었다.
“이 문양은 그동안 제가 찾고 있던 백호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얀 구름이 바람, 회색 구름이 뇌전을 뜻하지요. 아마 제가 찾고 있던 물건은 이 석탑 안에 있을 것 같습니다.”
“찾는 물건? 수사는 특정 물건이 유적 안에 있다고 확신하고 이곳을 찾은 겁니까?”
자비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선배님.”
그리고는 대답과 동시에 조금 전보다 좀 더 우아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한발을 뒤로 빼며 팔로 반원을 그리며 인사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서 온, 바람 일족을 모시는 윈드라스 가문의 차남, 윈드라스 자비에. 선배님께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을 할지 대충 예상이 갔다. 보나 마나 석탑에 존재하는 특정 보물을 자신에게 양보하거나, 만약 보물이 나온다면 첫 선택권을 양보해주라는 말일 것 같았다.
그랬기에 준혁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말해보시지요.”
자비에가 진지한 눈빛으로 준혁을 직시했다.
“석탑 안에서 나오는 보물···. 전부 선배님이 가져가셔도 됩니다. 단 백호청혈(白虎淸血)만 제가 가져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실는지요. 만약 그래 주신다면, 앞으로 저희 가문은 선배님을 영원한 친구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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