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 적호족(赤狐族) (1) >
벽화 앞으로 다가가 마지막 도전을 하려던 준혁은 문득 스치는 생각에 고갤 돌렸다.
“물건들만 철궤에 담은 줄 알았더니, 수사의 목숨도 담으신 거군요?”
준혁의 말뜻을 이해한 자비에가 고갤 끄덕였다.
“맞습니다. 철궤 안엔 수사께 얻은 백호족의 법기와 그동안 제가 모아온 자료, 거기에 이곳의 위치와 진법에 관한 것이 상세히 적혀있습니다. 수사께서 가문에 전해준 후, 가주께서 구하러 올 때까지 저는 더는 미련한 도전은 그만두고, 공법 수련에만 매진할 생각입니다.”
즉 준혁이 물건을 전해주지 않으면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말.
“청혈을 제외한 전부를 담으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참으로 솔직하십니다.”
“수사를 믿으니까요.”
아마 청혈을 가주에게 보내지 않은 건, 자신을 빨리 구하러 오라는 모종의 압박일 게 분명했다.
준혁은 철궤를 비롯한 재료들을 전부 공간대에 담고는 마지막으로 짧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후 벽화 쪽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부적을 꺼내 새끼 백호를 보호한 후, 인지경을 꺼내는 준혁을 보고 자비에 가 급하게 말을 던졌다.
“수사! 그러고 보니 수사의 이름도 모릅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강력한 영기를 발산한 준혁이 벽화를 향해 움직였다.
첫 울음소리에 이어 연달아 두 번째, 세 번째 백호 울음소리가 들리고, 네 번째 소리가 지나간 후에 벽면 바로 앞까지 도달한 준혁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준혁이라 합니다.”
그리고 준혁의 발끝이 벽화에 닿은 순간.
파앗-
백호 환영이 터져나가며 두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력한 빛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빛무리는 순식간에 준혁을 집어삼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역시···. 벽화를 통과한 자만···.”
쓸쓸한 자비에의 목소리만이 유적 내부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
눈꽃 비경, 내경, 어느 한적한 호수.
호수 주위엔 갈대를 엮어 만든 움집들이 여러 채 있었다.
움집 앞, 붉은 여우 한 마리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옆에 있는 다른 여우를 쳐다보았다.
“요즘 동향이 심상치 않다면서?”
“그렇다고 들었어요.”
“망할 전쟁은 언제 끝이 날는지. 쯧.”
붉은 여우가 혀를 차자 옆에 있던 여우의 눈이 사선으로 늘어지며 표독한 눈빛을 쏘아냈다.
“이게 다 그 욕심 많은 흰 토끼 새끼들 때문이에요. 남의 걸 욕심내는 더러운 것들!”
“그렇지. 그놈들만 아니었다면···. 말해 뭐해. 하지만 힘이 없어 신목(神木)을 빼앗긴 걸 누굴 탓하겠어. 어떻게든 다시 뺏어와야지.”
그때 두 여우의 머리 위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맞다. 설토족 놈들이 우리의 땅을 빼앗으려 했다 한들, 우리에게 힘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일은 없었겠지.”
늘어져 있던 두 여우는 재빠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허공에 아무 지지대 없이 둥둥 떠 있는 자는 부락에서도 잔인하기로 유명한 결단기 수행의 장로.
장로는 완전하게 여우 모습을 한, 두 여우완 다르게 이족보행에 얼핏 인간의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얼굴은 여우의 모습 그대로였고, 피부위로도 붉은 털이 자라있었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장로님을 뵈어요!”
결단기 장로는 두 여우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 가벼운 핀잔을 던지고는 호수의 중앙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후방이라 해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라.”
“넵!!”
잠시 후 호수의 중앙으로 날아온 장로는 발밑의 물을 유심히 관찰했다.
“3년 전부터 기이한 파동이 느껴지더니, 갈수록 그 진동이 강해지는구나. 대장로 께서도 연유를 모르시겠다고 하시니···.”
부락의 중심에 위치한 호수.
그 깊이가 끝을 모르게 깊었기에, 누구도 그 안쪽까지 탐사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은 마을의 오래된 식수원이었기에 함부로 몸을 담그는 것 또한 금지되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안을 조사해 봐야 하나.”
기록에 의하면 천여 년 전 호수 내부를 조사한 이가 있었다. 하지만 특이사항 없이 평범한 호수라고만 적혀있었고, 수원을 오염시켰다고 크게 질책당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장로는 결국 고개를 젓고 호수를 벗어나기 위해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래. 우선은 설토족 놈들과의 전쟁이 우선이다. 나중에 살펴보, 응?”
그때 잔잔하던 호수가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호수 중심에서 시작된 진동은 점차 주변으로 퍼져나갔고, 결국엔 호수 전체에 진동이 미친 순간.
파앗-
엄청난 빛무리가 호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돼 표면을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하늘을 수놓을 듯 뿜어져 나가던 빛무리가 사라진 순간.
호수 중앙에는 새하얀 털에 붉은 귀밑털을 가진 호랑이 한 마리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호랑이의 목덜미 위에는 새끼로 짐작되는 주먹만 한 호랑이가 빼꼼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
‘여긴 어디지?’
벽화의 시련을 통과한 순간, 처음 유적에 들어왔을 때처럼 강렬한 빛이 준혁을 감쌌고,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직감했다.
몸은 빛에 잡아먹힌 후, 속 울렁거림과 함께 어딘가로 이동됐다.
강렬한 빛 때문에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주변을 확인한 준혁은 난감함이 밀려옴을 느꼈다.
협곡이 아닌, 호수 위.
생전 처음 보는 풍경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준혁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며 기감을 퍼트렸다.
호수 밖엔 여우 몇 마리가 노닐다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 보였고.
하늘에선 여우 한 마리가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어? 여우가 날아? 영수족?’
판단을 내리기도 전, 일정 거리까지 다가온 여우가 말을 걸었다.
“넌 누구지?”
‘결단기!!’
여우라고 생각했던 자는 결단기 초기의 수사. 평범하게(?) 날아오던 것과 달리, 도착 후 몸을 일으키자 여우의 모습은 일반 여우와 달리 이족보행을 하는 여우 인간의 모습이었다.
‘적호족(赤狐族) 이구나!’
차경수의 옥간에서 보았던 내용을 떠올리며 준혁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말했다.
다행이라면 새끼 백호를 얻을 때 얻은 통역술의 상위호환인 통주술(通宙術), 새끼 백호와 대화하기 위해 그것을 익혔기에 대화에 무리는 없었다.
“저는 백호족의 최백호라고···. 아니 ‘최’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혹시 이곳은 수사의 부락이 위치한 곳입니까?”
“...마치 모르고 왔다는 말투군?”
“그렇습니다. 저희 종족의 유적을 조사하던 중 갑자기 이곳으로 이동된 것입니다. 절대 다른 의도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니 조용히 물러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각국이 서로 교류하며 지내는 인간들과 달리, 비경 안 영수족은 부락을 이루고 살며 서로를 배척한다고 했다.
비슷한 동류끼리는 동족부락을 이루어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혈족을 중심으로 같은 종족끼리만 왕래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랬기에 준혁이 갑작스레 여우 부락 한가운데 나타난 것은 적호족 입장에선 침략당했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
“그럴 순 없지. 네놈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왔는지는 알아봐야지.”
“조금 전 말씀 드렸다시피, 유적 전송진의 오작동으로 잘못 이동된 겁니다. 절대 다른 의도는.”
“그건 모를 일이지. 내경에서 백호족이란 종족에 대해 들어본 바는 없지만···. 혹시 아나? 설토족이 보낸 첩자일지?”
“설토족이라뇨?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설토족? 내경에서 구색초를 기르는 그들 말인가? 설마! 내경으로 이동된 건가?!’
여우 인간은 입을 쩌억 벌려 몸 안에서 오랏줄을 꺼내 들어 준혁을 향해 내밀었다.
“스스로 묶일 텐가? 아니면?”
선택을 하란 듯 말을 했지만, 어느새 오랏줄에선 끈적한 기운이 퍼져나오며 준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꼼짝없이 붙잡힐 신세.
그걸로도 위험했지만, 만약 준혁이 인간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절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 명확했다.
준혁은 여우 인간에게 손사래 치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따라가겠습니다. 제 무고함은 따라가서 밝히지요. 대신 그 밧줄은 치워주십시오.”
준혁이 순순히 따라온다고 말하자, 여우 인간은 의외란 듯 표정을 바꾸더니 밧줄을 회수했다.
“그래? 그럼 허튼짓 말고 따라오도록. 혹여나 도망갈 생각이라면 이곳이 마을의 중심임을 잊지 말고.”
“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콰앙!
그 순간. 준혁의 발밑으로 영기가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그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아 빛을 뿌리며 사라졌다.
그 모습에 여우 인간이 놀란 얼굴을 하다 급하게 준혁의 뒤를 쫓았다.
“수행을 느낄 수 없어 수상하다 여겼더니! 결단기였구나!!”
빠르게 준혁의 뒤를 쫓으며, 여우 인간은 손으로 이마를 짚어 무언가를 중얼거린 후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그의 입속에서 작게 뭉친 털 뭉치가 빠져나오다 어디론가 날아갔다.
“감히 도망칠 수 있다고 여기다니. 후회하게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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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광을 사용해 높은 곳으로 치솟은 준혁은 그대로 방향을 바꿔 남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혈둔술을 사용하면 더 쉽게 벗어날 가능성이 컸지만, 아쉽게도 새끼 백호 때문에 그건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둔술이 그러하듯, 혈둔술 역시 본인에게만 적용되었던 것.
둔광을 뿌리며 도망치던 준혁은 전방에서 또 다른 기운이 느껴짐에 빠르게 멈춰 서며 입김을 불어 적색패를 불러냈다.
그러자 적색패가 빠르게 몸 주위를 선회하며 다가오던 무언가를 전부 막아버렸다.
탕-탕-
전면에서 날아오던 것들이 적색패에 가로막혀 힘을 잃자, 그제야 준혁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털?’
붉은 털은 조금 전 도망쳐왔던 여우 인간의 털색과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전방엔 새로운 결단기 수사가 나타났다.
새로 나타난 자 역시, 여우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기감으로 살펴보니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수행이 바로 드러나질 않았다.
“뭐야? 처음 보는 놈인데? 어이~ 갈미~ 이자는 누구야?”
잠시 후 준혁을 뒤쫓던 여우 인간이 가까이 날아오더니 분노한 얼굴로 준혁을 노려보며 말했다.
“모릅니다. 마을에 침입했기에 쫓고 있을 뿐!”
“침입? 오호~ 간도 크네? 부은 간이 맛있는데 잘됐어.”
두 적호족에게 앞뒤가 막힌 준혁은 빠르게 이들을 처리하고 가야겠다고 마음먹고는 입김을 내뱉으며 영력을 움직였다.
그 순간 준혁의 입 앞에 단검 하나가 나타나 빛을 뿌렸다.
하지만 영수의 몸이라 그런지 여러 가지 법기를 동시에 부리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분광소를 소환함과 동시에 인지경으로 경지를 올리고, 적마도까지 소환하려 했다. 하지만 영기 운용이 매우 불안정해 여러 법기를 동시에 부리기가 힘들었다.
‘안 되겠군. 정체를 들키더라도.’
다른 이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빠르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인간으로 변해야 함을 느끼며 변신술을 해제하려는 찰라.
준혁의 기감에 아주 멀리서 자신을 주시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
그것은 매우 은밀하고 은근했다.
마치 아무 기운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무거운 중압감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무언가를 깨달은 준혁은 본모습으로 변하려던 걸 멈추고는 재빨리 새끼 백호의 몸에 방어 부적을 붙였다.
적색패와 분광소를 회수한 후, 앞뒤로 자신을 공격하려는 두 적호족을 만류하며 급하게 소리쳤다.
“멈춰! 멈춰주십시오!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금방이라도 공격을 쏟아부을 것 같던 준혁이 태도를 달리하자, 두 적호족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또 속을 것 같으냐!”
“그럼 그럼. 그 수준으로 도망은 힘들지.”
준혁은 재빨리 처음 쫓아왔던 여우 인간에게 사죄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당황해서입니다!”
“흥! 내 분명히 경고했지? 도망갈 수 없다고!”
준혁은 여우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멀리 떨어진 곳을 슬쩍 살폈다.
‘아까 느낀 기운이면 분명···.’
그때 준혁의 머리 위에서 처음 느껴보는 중압감과 함께 몸이 짓눌린다는 느낌이 전해왔다.
“신기한 놈이네? 너 내가 있는 줄 알았구나?”
머리 위에 뾰족하게 솟은 귀, 마치 장난감처럼 귀여운 귀를 가진 인간의 외형을 한 꼬마 소녀.
소녀의 등장에 준혁은 얼어붙었고, 두 여우 인간은 급하게 몸을 숙였다.
“대장로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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