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 원영기 (1) >
준혁이 단호하게 거부하자 거북이는 머쓱해 하며 물러났다.
“아까도 말했듯이 수사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 그런 표정 지으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살펴보겠단 것뿐인데···.”
닿는 즉시 식검에게 잡아먹힐 거라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준혁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지금이야 놀라움과 호기심이 앞서있다고는 하나, 수많은 세월 간 쌓여왔던 허무감이 그렇게 쉽게 날아갈 것 같진 않았다.
아무 일도 안 생길 수 있지만, 방지할 수 있다면 미연에 막는 것이 좋았기에 준혁은 식검을 단(丹) 안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식검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거북이는 법보들을 살펴보면서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이 아는 것들을 늘어놓던 거북은 시간이 지나자 준혁의 예상대로 변해갔다.
“수사, 부탁이 있습니다.”
거북이의 간절한 표정을 본 순간, 준혁은 그의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안 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할줄 아시고.”
“식아로 수사를 봉인해 주라는 것 아닙니까?”
“......눈치가 빠르시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도 알아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했기에 준혁은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딱 100년. 100년만 저와 함께하시며 도움을 주십시오. 그럼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준혁의 요구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거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억겁의 시간에 비한다면 그깟 100년쯤이야. 단 마선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겠습니다.”
마선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면 준혁도 구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기에, 그의 요구를 수락했다.
“저는 최준혁, 앞으로 최 수사라 부르시면 됩니다.”
준혁이 예를 갖추며 먼저 자신을 소개하자, 거북이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태어날 시 얻은 본명은 거북황, 법명은 귀원패이니, 편하신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귀 수사라 부르겠습니다.”
마선으로서의 계약이 아닌, 100년간 함께한다는 구두계약을 마친 거북이는 귀원패 속으로 자취를 감추려다 잠깐 멈추더니 준혁의 손목을 응시했다.
“아 참,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수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십니까?”
거북이의 시선은 준혁의 팔목에 감긴 붉은 실을 향해있었다.
“인연 실이라 들었습니다.”
“인연···. 이라.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건 12번째로 태어난 적지주(赤蜘蛛)의 실입니다.”
거북이의 말에 깜짝 놀란 준혁이 반문했다.
“이것도 마선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마선이 만들어낸 물건이라 표현해야 맞겠습니다.”
순간 준혁은 기이한 열망이 생겼다.
세상에 다시없을 특별한 능력을 가진 마선. 그중 서열 12번째 마선이 만든 물건이라면 평범할 리는 없었다.
그 순간 여서령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준혁 씨 이 실이 뭔지 알아요? 오래전 대력불문(大力佛門)의 선사께 받은 물건이에요. 죽기 전 사랑하는 사람과 이 실로 묶여있으면, 후생에 다시 만나게 된다네요.
“설마? 이 실로 이어지면 진짜 다음 생에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준혁의 말에 거북이가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설명했다.
“비슷하지만, 그리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실로 이어진 인연은 적지주만이 알아차릴 수 있고, 그만이 전생의 인연을 이어줄 수 있으니까요.”
“이어준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영혼이 같다 한들 어찌 같은 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억이 소실되었으니 전혀 다른 이라 생각해야지요. 적지주는 바로 그 영혼을 알아볼 수 있고, 동시에 기억까지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준혁의 얼굴에 흐르는 열망을 눈치챈 거북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슨 인연인지는 모르나···. 포기하십시오. 절대 적지주를 만날 수 없으니.”
거북이의 말에 준혁이 급하게 물었다.
“왜입니까?”
“제 기억이 맞다면, 적지주는 천신라의 수족 중 하나. 선계의 가장 험지에 있으면서 이미 신선경에 오른 마선입니다. 그런 자가 당신 같은 하찮은 수행의 수사를 만나주겠습니까? 아니 그전에···. 선계로 올라갈 방법이 없으니 굳이 다른 건 따질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제가 삼선의 경지에 오르고, 선계에서 그를 찾는다면···. 이 실과 이어진 인연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준혁이 잠시간 말을 잃고 있자, 거북이는 귀원패 속으로 들어간 후 말을 멈췄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준혁은 무언가 다짐한 얼굴을 한 뒤, 귀원패를 공간대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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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준혁은 틈날 때마다 귀원패를 소환해 이것저것 캐물었다.
귀원패는 너무 오래 자신을 가둬두고 있었는지 생각보다 지식에 빈틈이 많았다. 그럼에도 준혁이 얻은 지식은 적지 않았다.
‘굳이 인족이 아니어도 된단 말이지?’
계약에 관해 삼청조로부터 정보를 얻긴 했지만, 귀원패로부터 상세한 정보를 들었다.
백팔마선의 계약. 즉 동화체가 되어 하나 되는 계약은 준혁의 생각과 상이했다.
의식이 하나되 두 생명체가 하나 된다는 말은, 결국 완전체인 자신의 자의식이 사라진다는 뜻이었기에 준혁 입장에선 꺼림칙한 얘기로 들렸다.
하지만 귀원패의 말은 달랐다.
어차피 모든 생명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위 환경에 의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고, 마선과의 계약도 그 일부일 뿐이라고.
즉 마선 때문에 변화하는 것이 아닌. 변화가 필요하니 변하는 것이라 했다.
계약자마다 동화율이 다르고 시간도 천차만별인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 했다.
자신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
그리고 마선들이 인족을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인족들은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 즉 동화율이 다른 종족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나도 식검에게 동화되어갈까?’
지금은 변한 게 없다 생각하지만, 앞으로는 어찌 될지 알 수가 없는 일.
귀원패의 말대로라면, 변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다고 했다.
‘헌데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계약자가 아니다.’
귀원패가 가장 신기해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졌던 부분은 바로 준혁과 마선들과의 관계.
계약을 통해 힘을 받지 않으면, 마선 고유의 능력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인지경을 잠시나마 사용했던 자들이 수행을 증폭시키는 능력은 사용하지 못하고, 수련에 도움이 되는 보조 기능만 사용한 것도 그 이유.
하지만 준혁은 어떤 계약도 한 적이 없고, 귀원패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만약 준혁이 식검과 계약을 진행했다면 능력을 사용함과 더불어, 본모습을 불러올 수 있었을 거라는 것.
‘시간이 지나 보면 알겠지. 내가 계약이 된 건지···. 아닌지는.’
그것을 제외하고도 귀원패가 직접 만났다고 말한 몇몇 마선들의 정보를 들었고, 특히 마선경과 괴조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조용히 살고 싶다면 절대 두 마선은 만나지 말라고 했지.’
모든 마선과 연결돼있는 마선경과 모든 마선과 소통할 수 있는 괴조.
그 두 마선을 만나게 된다면, 준혁의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모든 마선들에게 알려질 테고, 절대 평온한 날을 보내지 못할 거라 경고했다.
다만, 그들을 만날 가능성도, 준혁의 특이현상이 알려질 가능성도 없다며 귀원패는 가벼운 웃음으로 넘겨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
“수사! 적당히 좀 하십시오! 어찌 전에 나를 연화시키려던 그 멍청한 인족 놈보다 더 괴롭힌단 말입니까? 설마 100년 내내 이러실 작정입니까?!”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던지는 준혁의 태도에 폭발한 귀원패.
결국 준혁은 당분간 건드리지 않겠다는 말로 귀원패를 달랜 후, 공간대 속에 고이 넣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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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분한 귀원패가 진정되길 기다리며 준혁은 그와의 대화로 얻은 정보들을 정리했다.
그리곤 우선순위로 해결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공간대에서 천년화가 담긴 목함을 꺼내 들었다.
은원을 정리하기에 앞서, 천년화를 흡수해 원영기에 오를 수만 있다면 최상이었지만, 원영기 수사가 도움을 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쉽게 도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원패를 살살 구슬려 천년화에 대한 정보를 아는지 확인해보았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냉대뿐.
“위험이라···.”
이미 천년수의 기운으로 인해 한번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준혁은 천년화를 바로 흡수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원영기에 오를 기회를 포기할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
도움을 줄 원영기를 구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니 어떻게든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쌓인 은원을 모두 정리하고 온전히 수련에만 전념할지,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원영기에 오르고 난 뒤 은원을 정리할지 준혁의 고민은 깊어졌다.
‘내 상황이 일반적이진 않다. 아마 천년화를 혼자 처리하기 어려운 이유가 극한의 냉기를 지닌 달의 정기 때문일 것인데···. 그래 우선 살펴보기라도 하자.’
고민을 거듭하던 준혁은 결국 자신이 흡수한 천년수의 기운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보기로 했다. 다만 조심할 필요가 있었기에 천년화를 바로 흡수하는 것이 아닌, 연구 조사부터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연구를 통해 생각보다 제어하기가 힘들다고 판단된다면 우선 은원을 정리하고, 만약 자신이 천년수로부터 받은 힘으로 인해 다른 이들과 상황이 다르다면 원영기에 도전해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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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잡은 준혁은 이글루에서 나와 동생을 봉인해둔 지역에서 일정부분 떨어졌다.
만에 하나라도 동생을 봉인한 진법에 영향이 갈 수도 있었기에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준혁은 분광소를 불러내 땅을 파냈다.
두꺼운 얼음을 파고 들어간 후 일정 공간을 만들고 방음진과 방형진, 환영진을 비롯한 진법들을 설치해 혹시 모를 방해를 방지했다.
진법 설치가 끝나자 공간대에서 목함을 꺼내, 꽁꽁 싸두었던 봉인을 하나씩 제거했다.
화악-
여러 겹으로 쌓아두었던 봉인이 해제되며 밖으로 나온 천년화는 엄청난 빛을 뿌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준혁은 양손으로 영기를 내뿜으며 천년화를 허공에 띄운 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
가장 먼저 영기를 극도로 얇고 세밀하게 퍼트리며 천년화가 가진 기운을 확인했다.
극음의 기운이라는 건 충분히 경험했지만, 그것이 천년수와 동일한 기운인지, 아니면 천년화로 바뀌며 형질이 변했는지 확인이 필요했던 것.
‘다행히 같다.’
기운을 확인하는 데만 3일을 소요할 정도로 극소량의 영기만을 조종했던 준혁은 천년화 역시 천년수와 같은 순수한 달의 정기를 품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영력을 조금 더 방출하며 좀 더 적극적으로 확인을 시작했다.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천년화 주위로 투명한 결정체들이 생겨나며 주변으로 냉기가 퍼져나갔다.
‘월광지력!’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준혁은 빠르게 광신체령투선공을 운용하며 온몸에 월광지력을 둘러 몸을 보호했다.
준혁의 행동과 동시에 결정체에서 생겨난 냉기들이 고드름 같은 모습으로 유형화되며 준혁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졌다.
푸스슥-
하지만 위협적인 모습과 달리 유형화된 냉기는 준혁의 피부에 닿자 눈처럼 녹으며 흡수돼 사라져 버렸다.
‘아!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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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후.
준혁은 처음 천년화를 살피기 위해 양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천년화 역시 준혁 앞 허공에 여전히 떠 있었는데,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6개월 전과는 달리 빛의 크기가 절반은 줄어있어 얼음덩어리 모습으로 변한 천년화의 본모습이 외부로 드러나 있는 것.
처음 유형화된 냉기를 몸으로 직접 흡수한 준혁은 그것이 천년화의 기운을 안전하게 흡수하는 방법의 하나란 걸 깨달았다.
그 후엔 영기발출 양을 조정하며 강제로 천년화를 조금씩 자극했고, 그렇게 6개월간 기운을 흡수한 덕에 천년화는 처음과 달리 많이 약해지고 온순해져 있었다.
‘시도해 보길 잘했다. 이제 가능할 것 같아.’
더는 다른 이의 도움 없이도 천년화의 기운을 이겨낼 자신이 생긴 준혁은 한 번 더 흡수과정 중 생겨날 수 있는 돌발상황들을 꼼꼼히 따져보다, 스읍- 하며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천년화가 빨려 들어가듯 준혁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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