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 위명 (1) >
“나는 오늘부로 청룡가 가주위를 물려받을, 정당성을 지닌 후계자 후보, 여서령을 가주위에 올리겠소.”
준혁의 말에 여동현은 순간 이해를 못 하고 어리벙벙하니 눈만 떼굴거렸다.
“네? 그게 무슨···.”
“처음 청룡패를 받을 당시 그녀와 한 약속은 그녀를 가주 자리에 올리겠다는 것. 비록 불의한 사고로 자리에 없다고는 하나, 오늘부터 청룡가의 가주는 여서령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
여동현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준혁이 말을 덧붙였다.
“청룡패를 받은 나는 후계위에 끼어들 명분이 있으니 정당한 선언이겠지요?”
“그, 그러긴 한데···. 그 아이가 이제 없거늘. 어찌···.”
“다 방법이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여동현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다음 날.
준혁은 널따란 대전 상석에 앉아있었고, 그 옆엔 청룡가의 대공자인 여동현이 멀끔한 상태로 시립 해 있었다.
그 앞으로는 청룡가 축기기 수사들이 전부 모여있었고, 활짝 열린 대청 문밖으로는 엄청난 수의 연기기 수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준혁은 그런 그들 전부를 기감으로 훑어보고는 목소리에 영기를 담아 사방으로 퍼트렸다.
그 목소리는 청룡가 담장을 넘어, 그곳을 주시하는 수많은 사람에게까지 널리 퍼져갔다.
“나 최준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청룡가의 새로운 가주를 선발할 것이다! 오늘부로 청룡가의 가주는 정당한 후계위를 지닌 여서령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청룡패를 지닌 내가 행한 것이기에! 청룡가 가법에 어긋나는 것 없이 적법하다!”
그 뒤로 준혁은 여동현에게 들은 청룡가 가법에 대해 몇 마디 더 읊다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여서령 가주가 자리하지 못하는바! 앞으로 여기 있는 여동현을 가주 대행으로 임명한다!”
웅성 웅성-
대전에 모여있던 축기기 수사들은 이미 정보를 들었는지 크게 동요하지 않았지만, 대전 밖에 밀집해있던 연기기 수사들과 범인들은 크게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관없다는 듯, 준혁은 말을 이었다.
“이곳에 함께하지 못한 여서령 가주의 명을 전한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그녀가 가주위를 스스로 떠날 때까지 유효하다!”
꿀꺽-
어디선가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첫째! 앞으로 청룡가는 청룡패 제도를 철폐하고 직계, 방계 구분 없이 누구나 재능에 따라 적재적소에서 일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둘째! 청룡가는 가문에 얽힌 자가 범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안전과 생계를 책임진다.”
“셋째! 범인 중에서도 재능이 인정되는 자, 전장을 제외한 어디에서도 일할 최소한의 기회를 얻는다! 이상이 여서령 가주가 내린 명이니 모두 명심하도록!”
파앗-
마지막 말을 끝내며 준혁의 몸에서 피어난 영기파동이 사방을 퍼져나가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로, 가주의 명을 절대 어기지 말라는 준혁의 충고이기도 했다.
직계와 방계를 완벽하게 갈라놓고, 그중 뛰어난 몇몇 방계에게만 기회를 주던 기존 방식을 철폐한다는 건 청룡가로서는 엄청난 변화.
사실 준혁이 말한 세 가지는 오래전 평소 여서령과 대화를 나눌 때, 그녀가 가주가 된다면 하고 싶다고 말하던 것들이었다.
준혁은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와의 약속을 지켜주고 싶었기에, 가주 대행이라는 웃기는 자리를 만들면서까지 일을 진행한 것이었다.
말을 마친 준혁은 옆에 시립 해 있던 여동현을 향해 턱짓했다.
“그럼 여 대행,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준혁이 존대하자, 여동현은 크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천천히 가주 자리인 단상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선배님께서 주신 기회. 서령이, 아니 여서령 가주의 뜻이 청룡가 전체에 각인되게 확실하게 임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대행은 누가 될지 알 수 없을 테니.”
흠칫-
준혁의 말에 몸을 살짝 떤 여동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신색을 바로 했다.
그리고는 한 번 더 준혁에게 크게 인사하고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수많은 청룡가 인사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나는 오늘부터 가주 대행을 맡게 된 여동현이다! 이제부터 청룡가는 대대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중 첫째로는···!”
여동현이 본격적으로 가주 대행 행보를 시작하자 준혁은 착잡한 표정을 짓다가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한참 물러났다.
‘그녀도 이걸 원한 게 맞겠지.’
이제부터는 실질적으로 청룡가를 이끌어야 할 여동현의 일.
준혁은 그저 한걸음 뒤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며, 가주 대행의 어깨에 힘을 실어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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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대전 회의가 끝나고, 준혁이 청룡가를 벗어나려 하자, 여동현이 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선배님! 정말 그냥 가시려는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청룡가 따위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저 여 공자가 약속을 잘 지킬지 지켜보겠습니다.”
준혁의 표정이 진심임을 알아본 여동현은 다시 한번 간절한 표정으로 호소했다.
“선배님, 10년! 아니! 5년 만이라도 이곳에 머물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지금 청룡가엔 결단기급 수사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경기도의 수많은 이권을 생각한다면···.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어 놓고 물리지 않길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건 가주 대행의 일이지 제일이 아닙니다.”
준혁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여동현의 표정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무언가 깨달은 듯 갑작스레 안색이 돌아온 여동현이 입술을 적셨다.
“선배님! 그럼 청룡가 가주 대행으로서, 원영기에 오른 최 선배님께 거래를 제안해 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예상이 갔기에, 준혁이 피식 웃었다.
“거래 말입니까?”
“실질적인 무력까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선배님의 이름을 여 가주와 함께 알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원영기 수사가 청룡가를 보호하고 있으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말.
준혁이 생각했던 내용이었지만, 말을 교묘하게 섞으니 뜻도 달라지는 것 같았다.
“여 가주와 함께라···.”
“허락만 해주신다면, 앞으로 청룡가에서 나오는 이익의 3할을 드리겠으며, 고급 영단과 재료들은 2할을 선별 없이 선배님께 먼저 보내드리겠습니다.”
여동현의 말에 준혁은 또다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가 재물 따위에 연연하는 사람 같습니까?”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연을 이어가고 싶은 제 마음을 이해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먼 곳에서 가솔들이 보고 있는 건 개의치도 않다는 듯 여동현이 허리를 직각으로 수그렸다.
“5할.”
“네?”
“이익의 5할과 재료 또한 5할. 그렇게 하겠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당장 풍비박산 날 수도 있는 청룡가 입장에서 원영기의 보호라면, 5할은 싸다고 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0에 비한다면 어마어마한 이익 아니겠는가.
준혁이 살며시 웃음 지으며 대답하자, 이번엔 여동현이 고민에 빠진 듯 심각해졌다.
“하오나 선배님···. 5할이면 가문을 유지하는데도···.”
“여 공자. 우리 솔직해집니다. 가문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직계의 수행을 올리는 데 문제가 있겠지요.”
애초에 청룡가에서 직계와 방계를 확연히 구분 지어 버린 가장 큰 이유는, 한정된 재화를 한쪽에 쏟아붓기 위해서.
특히 가주가 최고급 영단들을 독식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결국 준혁의 말에 여동현이 무언가를 내려놓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선배님의 요구대로 하겠습니다.”
“가주의 명, 명심하십시오. 방계와 직계, 범인 구분 없이.”
잠시 후, 든든한 배경을 얻었지만, 수익의 5할을 받쳐야 하는 여동현은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준혁이 떠나려는 찰나,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헌데 선배님!”
“또 뭡니까?”
“왜 저입니까? 연기기에 수행이 멈춰버렸다고는 하나···. 막내도 있고···. 아니면 저보다 수행이 높은 축기기 후기 수사들도 몇 있는데.”
준혁은 여동현의 질문에 피식 웃고는 가볍게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엔 목소리만이 남아 여동현의 귀 주위를 맴돌았다.
“서령, 그녀가 원했으니까.”
여서령이 직접적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때때로 자신과 의견이 가장 잘 맞는 큰 오라버니가 가주가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여동현의 장점을 얘기했는데, 그중 하나가, 그는 언제나 체면을 중히 여기기에 남들 앞에서 보이는 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태도는 나이를 불문, 수행을 불문하고 모든 이를 공평하게 대하는 것으로 변했다는 것.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청룡가의 대공자와 축기기 수사라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범인이었던 자신을 대함에 있어 항상 배려가 있었던 것 역시 준혁의 결정에 크게 한몫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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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현을 뒤로한 채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준혁은 하늘 끝에 닿을 정도로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다 예전 여서령의 유골을 뿌려주었던 높이만큼 올라오자, 자리에서 멈춰 서며 시선을 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안력에 영기를 집중해도 청룡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기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자신의 심장 부위를 잠시 어루만졌다.
“이제 나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비록 그대가 직접 가주 자리에 앉진 못했지만, 그대의 이름은 후대에 영원히 남을 겁니다. 청룡가 가주 중 가장 훌륭한 가주로.”
말을 마친 준혁이 짧게 수결을 한 후 손가락 끝으로 심장을 짚자, 심장에서 영기 파동이 일어나며 무언가가 깨져나갔다.
파앙-
그것은 오래전 여서령과 맺은 맹약.
결단기에 올랐을 때부터 심장에 새겨진 맹약을 지워버릴 수 있었지만, 그땐 자신의 수행이 여서령을 통해 청룡가에 알려질까 염려해 내버려 두고 있었었다.
그러다 여서령이 죽고 난 뒤엔 그녀의 마지막 남은 흔적이었기에 차마 지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놓아주려는 것.
그리고 그 이유는 어쩌면 그녀를 위한 마음일지도 몰랐다.
“이젠 이런 과거의 흔적이 아닌, 직접 그대를 찾아가겠습니다.”
사실 준혁으로서는 그녀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과 동생을 위해 희생한 사람에 대한 감사와 미안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 감정이 발달해 다른 무언가가 된 것인지까지는.
다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준혁은 그녀를 다시 만나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 나연이에게 가자.”
준혁은 여동현에게 받은 공간대 속 물건들을 떠올리고는 시선을 북쪽으로 향했다.
파앙-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빛살처럼 변하며 시선이 닿는 곳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사이 준혁의 심장 앞 가슴부위에 볼을 댄 채 잠들어있던 새끼 백호만이 영기파동에 깜짝 놀랐다가, 다시 새근거리며 잠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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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봉인해둔 지역에 도착한 준혁은 가볍게 수결을 맺어 봉인 진법을 해제했다.
지하 깊은 곳에 묻어둔 옥관 하나가 나타나자 영기를 조종해 허공에 띄운 후, 다시 한국으로 향했다.
여동현에게 구색초를 받았다고는 하나, 일반인 환자나 다름없는 여동생에게 바로 먹일 수는 없는 법.
돌아가 적당한 연단사를 구해 단약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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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한국으로 돌아온 준혁은 곧장 북한산 정상으로 향했다.
그곳엔 두 여인이 다소곳이 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 명은 여서령과 함께했던 화령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나설헌이었다.
준혁이 정상 석 위로 홀연히 내려서자, 두 여인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선배님, 그 아이는 어쩌시려고···. 냉기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저 고개만 숙인 나설헌과 다르게 화령은 걱정이 생기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괜찮습니다. 이제 그런 것에 연연할 일은 없으니.”
구색초로 약을 만들지 않았음에도 준혁이 동생을 데려온 건, 원영기에 오른 후 냉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기 때문.
더는 북극의 냉기를 빌리지 않아도, 옥관에 걸린 냉동 진법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두 분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별 관심은 없었지만, 준혁이 예의상 말을 꺼내자 화령이 먼저 대답했다.
“선배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서령 아가씨를 제외한다면 갈 곳도 없는 처지···. 그렇다고 청룡가로 돌아가긴 싫으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준혁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원영기에 이르렀으니 한곳에 정착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도움을 줄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좋습니다. 그럼 나 수사는 어쩌실 겁니까?”
나설헌이 살짝 볼을 붉히며 말을 꺼냈다.
“우선 조부께 다녀올까 해요. 그다음에 다시 찾아봬도 될까요?”
그녀의 모습에 준혁 역시 마침 부탁할 것이 있었기에 흔쾌히 허락하며 말을 이었다.
“물론입니다. 나 수사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헌데 저 역시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준혁은 공간대에서 목함 하나를 꺼내 나설헌에게 내밀었다.
“구색초로 반영근을 치료할 단약을 조부께 부탁드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준혁이 부탁하자, 나설헌은 크게 기뻐하며 목함을 받아들였다.
원영기 수사의 부탁? 그건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행운이나 다름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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