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가르침 (3) >
드넓은 분지 안.
분지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도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나 응결식을 방해하던 자들이 처참하게 썰려 나간 후, 몇몇 도망자들을 추격하며 떠난 준혁.
떠나기 전 준혁이 했던 말 한마디 때문에 어느 누구도 분지를 떠나지 못했다.
“하아. 씨부레. 도대체 언제까지 움직이지 말라는 거야. 대충 다 죽은 거 같은데, 그냥 가면 안 되나.”
누군가의 혼잣말이었지만, 그의 말을 들었는지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미남자가 목소리에 영력을 실어 큰 소리로 소리쳤다.
“주군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진! 그 누구도 발을 떼지 말아라! 움직이는 자! 저놈들의 일행이라 판단하겠다!”
말을 하던 미남자가 가리킨 곳엔 시체들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그 모습에 욕설을 내뱉던 자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막았다.
“히익!”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자는 그뿐만이 아니었는지, 미남자의 경고에 분지 곳곳에서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때, 시체들이 쌓여있는 단 옆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는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갔고,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콰아앙!!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무언가는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먼지를 일으켰고, 먼지가 사라지자 거대한 얼음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얼음덩이 위로 누군가 내려서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얼음 위에 선 사내. 준혁이 말했다.
“도천.”
준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위각주 도천은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준혁 앞에 나타났다.
“예! 도주!”
준혁은 분지 안의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다 조용히 말을 이었다. 목소리 자체는 작았지만, 영력이 담겨있어 모든 이에게 들리기엔 부족하지 않았다.
“적도들은 전부 모아놓았나?”
“예! 한 놈도 빠지지 않고, 전부 수거해 왔습니다.”
“어떤 놈들인지 파악은?”
준혁의 질문에 이번엔 비각주 오명한이 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말없이 옥간 하나를 정중히 날려 보냈다.
옥간을 잡아 이마에 댄 준혁은 싸늘하게 입술을 비죽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이트베지, 문실버, 큐오루트, 소드미러 그리고 차일드가···. 이 다섯 가문이 합심해서 나를 죽이려고 한 거였나? 재밌군.”
준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가문은 전부 유럽연합의 중심 세력. 거기다 정당한 대결이 아닌 원영기를 죽이기 위한 동맹.
사람들은 그제야 안토니오가 응결식을 방해한 것과 갑작스레 달아나던 수사들, 그리고 그들을 참살한 준혁의 행동. 그 모든 것들의 연유를 알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절대 아닙니다!!”
조용한 분지 안의 시선이 전부 몰렸다.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준혁의 시선이 옮겨지자,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사내가 땅을 박차더니, 단번에 준혁 앞으로 날아왔다. 축기기 후기 수사였다.
“저는 차일드가의 네 번째 대부인 란스안님의 차남 데슈타인이라 합니다. 저희 가문에선 절대 이런 일에 동참할 리가 없습니다! 저 역시 가문의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바, 제가 모르게 일이 진행될 리가 없습니다!”
축기기 후기라면 어느 가문에서든 중요한 역할을 맡을 실력이었기에 사내의 말은 진정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미 증거가 존재했다.
“도천.”
준혁이 무위각주를 부르자, 그는 단 앞에 쌓여있던 시체 중 하나를 꺼내 가져왔다.
그리고 시체를 본 데슈타인은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가까이 다가와 시체를 살폈다.
“숙부···. 어째서 이런 일을···.”
처음 준혁이 죠제프를 따라온 자들을 처리할 땐 그 속도가 너무 빨랐고,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일이라 데슈타인이 몰랐던 것.
“내 명을 무시하고 도주하던 자들 중 하나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품을 뒤져보라. 나를 억압하기 위한 구속용 진법기를 가지고 있을 터이니.”
털썩-
너무 놀랐는지 데슈타인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준혁이 시선을 옮기며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다섯 가문에게 고한다.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지 오늘의 사태를 해명하지 못한다면···. 그 후엔 나를 비정하다 말하지 말길. ”
말을 끝낸 준혁은 가볍게 단 위로 날아가더니 얼음 속에 갇힌 안토니오 앞에 내려섰다.
그리곤 손을 앞으로 뻗으며 영력을 발출했다.
쩌적- 쩌저적-
그 순간, 얼음이 깨져나가며 안에 있던 안토니오가 운신의 자유를 되찾은 듯 준혁을 보며 간절하게 부르짖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안토니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단 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이, 바닥에 몸을 수그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원영기에 이르러 세계 최강자 중 한 명의 모습이라 하기엔 너무 비굴하고 비참한 모습.
하지만 안토니오의 마음속엔 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뿐이었기에, 다른 건 고려할 상황이 되질 못 했다.
수백 년간의 고행을 이렇게 날려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직접 손을 겨뤄보고는 준혁과 자신의 수행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걸 절감하고 있었기에 창피함 따윈 찾을 수가 없었다.
“죽이려고 왔으면, 죽을 각오를 해야지.”
말을 마친 준혁은 가볍게 손을 뻗었고,
몸의 자유는 되찾았지만, 아직 영력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안토니오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강제로 일으켜지며 몸이 대(大)자로 펼쳐지더니 준혁의 손에 배꼽 아래 단(丹)이 위치한 자리를 꿰뚫려 버렸다.
푸욱-
그 순간.
하늘 한쪽에서 검은 먹구름이 나타남과 동시에 번쩍하고는 번개가 내리쳤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인식할 틈도 없이 어느새, 단 위, 준혁의 앞엔 노랑머리의 여수사가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제이엘이었다.
제이엘은 준혁을 말리려는 듯 손을 뻗었다.
“최 수사! 멈춰주세요!”
그녀의 등장에 준혁은 안토니오의 아랫배를 뚫어버린 동작 그대로 멈춰 서며 제이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최 수사. 죄송해요. 저도 사실을 알게 되자 급하게 날아왔지만···. 이미 늦어버렸군요.”
제이엘은 단 아래 수북이 쌓여있는 시체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다 준혁에게 사정했다.
“최 수사. 이들 잘못에 대한 보상이라면 어떻게든 만족할만한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그를 용서해 주면 안 되겠어요?”
제이엘이 나타난 후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던 준혁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한없이 무미건조했다.
“불가.”
“수사. 부탁드립니다. 그를 잃는 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며 각국에서 원영기에 이르는 자들이 생겨날 터인데, 그렇지 않아도 작은 땅에 수도자원이 부족한 우리 유럽인들에겐···. 제발 우리 사정을 헤아려 주실 순 없을까요?”
제이엘이 말을 끝마치며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자, 준혁이 피식 웃고는 안토니오의 아랫배에서 손을 빼냈다.
“제이엘 님···. 제, 제발···. 사, 살.”
그 순간 안토니오의 몸 전체에 균열이 가더니 바닥에 허물어졌다.
투두둑-
그리고 준혁의 손엔 어느새 우윳빛깔을 지닌 반투명한 원영이 잡혀있었다. 원영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준혁을 바라보며 오돌오돌 떨어댔다.
“불가합니다.”
살짝 고개를 저어 거부 의사를 밝힌 준혁이 손에 영력을 주입하자, 원영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며 몸부림쳤다.
완영기에 오르지 못한 원영은 그 자체로는 영기로 만들어진 영혼 덩어리나 다름없었기에,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원영기에는 몸을 떠나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원영 자체가 망아(忘我)에 빠져들게 되기에, 안토니오의 원영은 우윳빛에서 점점 탁한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럼! 원영만이라도! 제발 원영만이라도 살려주세요!”
원영기에 오른다고 불사(不死)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신체는 결단기 이하 때처럼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
하지만 원영만 살아있다면 특수한 비술을 이용해 자아가 없는 몸속으로 원영을 이전시켜 목숨을 연명할 수가 있었다.
물론 원영을 다른 몸에 집어넣는다고 원영기의 수행을 바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원영이 만들어진 상태였기에 충분한 단약과 영약만 주어진다면 빠른 시일 내에 수행을 되찾을 순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몸에 들어간 원영은 그때부터 수많은 심마와 싸워야 했기에, 몸을 바꾸기 전 그 이상의 수행을 가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지구의 수도자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한다면 말이다.
“제이엘 수사.”
당장이라도 원영을 죽일 것 같던 준혁이 입을 떼자, 제이엘은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에게 대적한 자를 살려둘 생각이 없습니다. 그 누구라도 말입니다.”
퍼엉-
준혁이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그의 손에 있던 원영이 귀로는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러대더니 그대로 터져나가 버렸다.
그 모습에 제이엘은 잠시 비틀거리더니 참담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무언가 다짐한 듯 신색을 빠르게 회복하고는 단 아래 놓인 얼음덩어리를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그럼, 저기 리암 수사만이라도 제가 데려가게 허락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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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엘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준혁은 얼음덩어리를 보고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준혁이 죠제프를 처리한 후 리암을 찾아냈을 땐, 그는 바다 아래 깊숙한 곳에서 안심하고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죠제프의 계획이 제이엘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나 알아보려던 준혁은 그런 리암을 생포해야 했기에 우선 숨어있는 곳을 통째로 얼려버린 후 밖으로 끄집어냈다.
물론 죠제프에게 정신부를 사용해 사정을 알아낼 순 있었지만, 이미 자신에 대한 분노가 가득해 방어기제가 발동해버린 죠제프보다는 일면식도 없는 리암의 머릿속을 살펴보는 게 훨씬 편했기 때문.
그렇게 리암을 통째로 얼려 바다 위로 끄집어낸 준혁은 생각지도 못한 것을 경험하고 말았다.
바로 월광지력으로 만들어진 얼음 안에서 모든 것이 멈췄어야만 할 리암이 전음으로 대화를 시도한 것,
대화라기보다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게 전부였지만, 준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찌 완영기에 오른 호하 조차도 모든 능력이 차단당한 채 갇혀있던 월광지력의 얼음 안에서 술법을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겨우 결단기 수행으로.
게다가 준혁이 완영기에 오른 후에는 월광지력의 힘도 예전보다 한 차원 강해진 후였기에 더더욱 믿기 힘든 일이었다.
너무나 신기한 현상에 준혁은 얼음 속 리암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도 자신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만 알고 있지, 정확히 어떤 능력으로 준혁과 대화를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준혁은 당장 정신부로 그의 머릿속을 열어보기보다는 살려놓고 신비한 능력에 대해 알아보려 얼음 통째로 가지고 온 것이었다.
제이엘의 부탁에 준혁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들어드릴 수 없겠습니다.”
“수사! 지금 유럽연합의 결단기 수사가 씨가 마르게 생겼습니다! 한 번만 양보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겨우 다섯 가문의 결단기가 죽은 것으로 유럽 전체를 논하기엔 과장이 심한 것.
제이엘의 부탁에 준혁은 가볍게 손을 저었고, 그의 손짓에 따라 단 옆에 놓여있던 얼음덩어리가 빠르게 녹아내렸다.
잠시 후 얼음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 안에서 좌정한 채 있던 리암이 눈을 번쩍 뜨더니 단번에 단위로 올라섰다.
리암은 단 위로 올라오자마자 제이엘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준혁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선배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약속한 것은 잊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머물며 선배님을 보필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리암의 태도에 제이엘이 당황해했다.
“리암 수사. 무슨 말입니까? 이런 일을 벌인 잘잘못을 떠나서, 지금 가문을 버리고 최 수사에게 귀의하겠다는 뜻입니까?”
제이엘의 질문에 리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선배님. 정확한 사유는 말씀드리기 힘드나, 최 선배님께서 알고자 하시는 바가 있기에 그것에 대해 도움을 드리기로 약조해 드렸습니다. 그때까진 이곳에 머물 예정입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던 제이엘은 잠시 후 마음속 동요를 가라앉힌 듯 신색을 회복했다.
원영기를 앞에 둔 리암이 당장 죽지 않고 살게 되었다는 것만이라도 다행이라 여기기로 한 듯했다.
그리고는 그보다 더 큰 문제에 직면해있다는 걸 깨달았다,
“최 수사. 이번 일은 유럽연합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들의 가문과도 말이에요.”
준혁이 각 가문에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는 걸 모르는 제이엘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일에 관여한 자들이 포함된 가문에 죄를 묻지 않아 주신다면 수사께서 원하시는 걸 알려드릴게요.”
“제가 원하는 거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조금 전 안토니오의 목숨을 대가로 거래를 하려 남겨두었던 한 수. 하지만 준혁이 대화를 이어가지도 않고 너무도 빠르게 일을 처리해버렸기에 미처 꺼내지 못했던 말.
-마선의 행방. 제가 알아낸 그들에 대한 정보를 드리겠어요.
“그들?”
-네. 한 명은 비경 안, 다른 한 명은 파키스탄에. 두 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