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용각족 (1) >
분광소가 춤을 추며 날아다니기도 잠시.
어느덧 주변은 고요를 찾았고, 흙 인형은 더 이상 생성되지 않았다.
준혁은 혹시나 마선으로 의심되는 기운이 다시 존재감을 표출할까 싶어 유지하고 있던 유형화된 기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는 탑의 입구로 걸어갔다.
준혁이 흙 인형들을 모두 처리한 후 다가오자, 입구는 마치 출입을 허락해준다는 듯 요란한 굉음과 함께 문을 열어주었다.
쿠르릉-
준혁은 곧장 들어가지 않고 기감으로 안을 살폈다.
하지만 삼각비경 지목족의 봉인지들처럼 기감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전부 막혀버렸다.
마치 두 눈으로 직접 확인 하라는 듯.
남궁명이 남긴 글을 통해 1층에 들어서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으나, 준혁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전신에 광신체령투선공을 일으키며 몸을 보호하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
준혁이 탑의 입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온 순간.
화르륵-
1층 벽면 곳곳에 붙어있던 등잔처럼 생긴 접시에서 불꽃이 일더니 주변을 밝게 비췄다.
불꽃으로 인해 흔들리는 그림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1층 전경은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미늘 갑옷처럼 보이는 피부를 하고 이마 한가운데 뿔이 난, 인간과 비스름한 모습의 생명체.
그런 생명체들의 석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1층 벽면 아래 진열돼 있었다.
준혁의 심기를 거스른 것은 그런 석상의 외관이 아니라, 석상이 묘사하고 있는 동작.
석상 대부분은 처절한 전투를 묘사하고 있었는데, 상대방의 머리를 뜯어먹는 것부터 시작해 잔인한 모습을 가감 없이 묘사하고 있었다.
“말로만 들어보던 용각족이군.”
남궁명이 남겨놓은 글을 보았기에 이곳 유적이 선계에서도 보기 힘들다는 용각족(龍角族)의 유적임은 알고 있었다.
소수에 불과하지만 강인한 신체를 바탕으로 하는 전투술 때문에 어느 종족도 쉽게 무시하지 못한다는 종족.
준혁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았기에 석상을 직접 확인해보고픈 마음을 참으며 숨을 골랐다.
잠시 후.
벽에 빙 두르듯 장식되어있던 수많은 석상 중 하나가 쩌적 금이 가더니 갈라진 틈 사이로 빛을 방출했다.
화악-
석상에 생긴 균열은 순식간에 거미줄처럼 번졌고, 몇 호흡 하기도 전, 돌 부스러기들이 전부 땅에 떨어지며 살아있는 용각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각족은 쿵- 소리와 함께 한걸음 준혁을 향해 걷더니 순식간에 눈에 생기가 돌았고, 곧이어 두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크르르-”
한눈에 보기에도 수행을 가진 수도자라기보다는 지능을 갖추지 못한 채 영기만을 품은 괴수와 같은 모습.
남궁명이 적어놓은 설명과 같았기에 준혁은 방어태세를 갖춘 후 상대방을 천천히 살폈다.
‘수행 자체는 원영기에 살짝 미치지 못하지만, 파동으로 느껴지는 신체 강도는 일반적인 원영기 수사를 훨씬 상회하는구나. 강체공으로 이름 높은 종족 다워.’
준혁이 접한 용각족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화신기를 넘어 삼경의 초입에 들어선 용각족은 다른 수사들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다는 것.
일반적인 수사가 삼경의 시작인 소천경에 이른 순간부터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해줄 영역을 만드는 데 반해, 용각족은 영역을 자신의 몸에 한정시켜 버렸다.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강인한 그들의 육체는 소천경에 이른 순간부터는 거의 불사에 가까운 강도를 가지게 된다.
아니 불사라기보다는 한정적 불멸.
동급 수사는 물론, 한두 단계 상위 수사들도 쉽게 부술 수 없는 절대 강도를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이 그들을 선계에서도 유명하게 만든 능력이었다.
다만 그들의 가장 큰 취약점은 개체수였다.
1년에 한두 명씩 싸질러대는 인족이나, 한 번에 여러 명씩 번식하는 영수족 등과 달리 용각족은 평생 세 번의 가임기를 가질 수 있었고, 그것마저도 후손을 만드는데 백 퍼센트 성공 하는 게 아니었다.
하나의 오롯한 생명체가 되는데 오래 걸리는 목족과는 다른 이유로 종족의 번영이 힘든 종족 중 하나였다.
준혁이 용각족에 대해 떠올리는 사이, 완전하게 육체의 제어권을 회복한 상대는 동물처럼 으르렁 소리를 내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몸을 살짝 숙였다.
하지만 이성이 없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바로 달려들지 않고 무언가를 계산하는 것처럼 보였다.
“훗, 겁을 먹은 것이냐?”
남궁명은 대화를 시도해 보려다 다짜고짜 달려드는 용각족에 목숨을 잃을뻔했다고 적어놓았었다.
시간이 지나도 상대가 공격할 기미가 없어 보이자, 준혁은 한발 앞으로 다가가며 손을 가볍게 저어 냉기를 발출했다.
그제야 튀어나올 것처럼 웅크리던 용각족은 괴성을 지르며 냉기를 피해 뒤로 물러났고, 거의 동시에 땅을 박차며 준혁에게 달려들었다.
쾅-
어찌나 강한 발돋움이었는지 내부 바닥이 단번에 터져나갔다.
용각족이 움직이는 속도는 가히 전광석화라 부를 만큼 빨랐다.
일반적인 원영기 수사라도 미리 방어 법기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술법을 발동시키기도 전에 목숨을 잃을 만큼.
슈악-
하지만 다른 수사들과 달리 강체공으로 수행을 쌓아 올린 준혁에겐 그리 큰 위협이 아니었다.
“커륵- 커륵-”
어느새 달려오던 그대로 준혁에게 목이 잡힌 상대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더니 두 팔을 맹렬히 흔들었다.
“오호라.”
준혁은 근접거리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파앗- 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남들이 보았다면 준혁이 여유를 부리려다가 화들짝 놀란 것으로 보였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단숨에 상대를 얼려버린 후 몇 가지 조사하고 싶은 게 있었던 준혁은 달려드는 용각족의 목을 잡아챔과 동시에 상대의 몸 안으로 월광지력의 냉기를 주입했다.
하지만 상대는 완영기도 얼려버렸던 냉기를 무력화시키며 공격을 해왔던 것.
적마도의 힘을 이용해 뒤로 피한 준혁은 상대를 살피는 두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상대방은 목부터 시작해 가슴부위가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 하지만 냉기는 더는 몸을 장악하지 못하고 범위를 넓히려다 소멸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내부까지 단련하는 강체공이라니.”
종족 특성이 아닌, 공법을 익힌 것이었다면 당장이라도 알아내고 싶을 만큼 욕심이 가는 능력.
상대는 준혁이 주입한 냉기로 인해 고통을 느끼는지 입술을 뒤집으며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는 재차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용각족이 월광지력을 이기는 모습을 보고는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호기심을 가지게 된 준혁은 단숨에 상대를 제압할 생각을 버린 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콰앙-
그러자 그의 손 앞으로 반투명한 육각 타일로 이루어진 원형 판이 나타나며 용각족의 공격을 막아냈다.
쾅- 쾅-
공격이 막히자 용각족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대며 연신 몸을 날려댔다.
그 모습에 준혁은 귀원패의 능력으로 공격을 모조리 막으며 시간을 들여 상대를 파악했다.
슈악- 콰쾅-
그렇게 수백 번의 공방이 반복되자 준혁은 결국 흥미를 잃고는 재차 공격을 시도하는 상대의 주먹을 회피하며 단전 부근을 꿰뚫어 버렸다.
푸욱- 쩌저정-
동시에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월광지력이 뿜어져 나오며 상대를 완벽하게 얼려버렸다.
“결단기 수행으로도 원영기를 상대할만한 신체를 가졌으나 그게 다이구나.”
만약 이들이 지능을 가진 채 술법까지 사용했다면, 남궁명은 절대 1층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통과는커녕 돌아가지도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을 터였다.
하지만 괴수처럼 지능이 없는 용각족의 능력은 그저 덩치 좋은 어린이 딱 그 정도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상대해야 할 숫자가 늘어난다고 알고 있었기에, 이것저것 파악해본 준혁은 아무리 수가 늘어난다 해도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고 방심하거나 긴장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
-그놈들을 처치하면 혼백의 기운과 비슷한 것이 빠져나가며 다시 석상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다음 층에도 재등장하는 걸 보면 혼백의 기운마저 소멸시켜야지만 계속 늘어나는 수를 줄이고 끝에 이를 수 있을 것 같다.
-혼백의 기운을 붙잡아 정체를 알아보려 했으나 그 어떤 방법도 소용없었다.
남궁명이 남긴 말을 떠올리며 얼어붙은 용각족 앞으로 다가온 준혁은 주위에 진법을 설치했다.
남궁명은 자신이 탑의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 이유를 층을 올라갈 때마다 늘어나는 용각족의 수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해결 방법으로 용각족을 죽일 때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기운을 처리해야 한다고 적어놓았다.
물론 고층까지 올라가 보지 못한 남궁명의 판단이었기에 틀릴 수도 있지만, 확인해보아서 나쁠 건 없었기에 준혁은 자신이 아는 진법 중 기운을 막는 진법을 중복으로 설치했다.
잠시 후 준혁이 영기파동을 퍼트리자, 얼음 덩어리가 산산조각이 나며 깨져나갔고, 그 안에 있던 용각족 역시 차갑게 식은 채 조각났다.
퍼석-
그리고는 남궁명의 말대로 차갑게 식은 용각족의 시신에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솟아나더니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혼백은 아니고···. 흠. 영기 덩어리···. 인가?”
하지만 진법 때문이었는지 원래 자리로 날아가지 못한 희끄무레한 무언가는 준혁의 머리 위로 날아와 그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에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려던 순간, 희끄무레한 무언가는 갑작스레 하강하더니 준혁의 공간대 안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화들짝 놀란 준혁은 빠르게 수결을 맺어 몸 안으로 어떤 기운도 침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두둥-
그 순간, 공간대 안에서 무언가가 크게 박동하는 게 느껴졌고, 준혁은 내용물을 살피고는 공간대 안에서 주먹만 한 알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이게 왜···.”
두 개의 알은 오래전 설악산에서 마동탁 사형의 처소를 정리하던 중 발견한 물건 중 하나였다.
그때, 수십벌로 이루어진 진법 깃발, 가죽으로 만들어진 발동되지 않는 부적과 함께 얻은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주먹만 한 알.
사용처를 알지 못했기에 오랫동안 공간대 안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용각족에서 나온 희끄무레한 무언가는 두 개의 알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문득 준혁은 한가지 추론을 할 수 있었다.
저층만을 탐색하고 돌아온 남궁명은 이곳이 보물을 보관하는 곳이고, 석상은 그런 보물을 지키기 위해 설치된 관문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백호 유적처럼 강제로 수련을 시키기 위한 곳이라면?
석상에서 나온 희끄무레한 기운이 진법에 따라 석상을 재생성했던 게 아니라, 원래는 수련 과정을 거친 용각족의 후예가 흡수해야 했던 기운이 돌아갈 곳이 없어 다시 석상의 모습으로 변했던 거라면?
그때 등 뒤에서 쩌적- 소리가 나며 새로운 석상에 금이 갔다.
그 소리에 준혁은 알을 공간대에 넣으며 시선을 돌렸다.
“1층에선 석상 하나만 움직인다고 하더니. 역시 남궁명은 이곳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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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준혁의 발길질에 벽면으로 날아간 용각족 하나가 몸이 터져나가며 요란스러운 굉음을 울렸다.
쩌저정-
동시에 한쪽에선 얼음에 구속되어 있던 용각족 하나가 얼음이 깨지는 것과 동시에 산산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남궁명의 말과 달리 1층의 석상들은 마치 순번이 정해진 것처럼 하나씩 깨어나기 시작했고, 모든 석상을 정리하고 2층으로 올라온 준혁을 반긴 건, 1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의 석상이었다.
그것을 보고 준혁은 남궁명이 1층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걸 확신했다.
그가 적어놓은 말들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는 1층에서 다시 1층으로 이동되어 여러 개의 석상을 상대한 것 뿐일 터였다.
왜 그렇게 확신하냐고?
준혁이 2층에서 올라와 상대한 석상 중 1층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석상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마찬가지로 3층에서 준혁을 반겼던 석상들 역시 1, 2층에서 보았던 놈들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수만 늘어난다고 했던 남궁명의 말과는 달리 2층은 1층보다 강력했고, 3층은 2층보다 더 매서워졌다.
준혁은 4층 벽면에 진열돼 있던 석상들을 전부 처리한 후 공간대에서 알을 꺼냈다.
그러자 시야를 어지럽히며 날아다니던 희끄무레한 기운들이 안식처를 찾았다는 듯 두 알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이 속도면 내 능력으론 몇 층 더 올라가지 못할 것 같은데.”
석상들이 점점 강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강해진 석상들이 동시에 덤벼드는 수가 늘어났다.
아직까진 힘에 부치지 않았지만, 일정 수준 비례해서 강해지는 걸 계산해보면 5층 정도만 더 올라가면 석상 하나하나가 완영기 수준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정말 그렇게 된다면 준혁은 정말 목숨을 걸고 도전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럼에도 준혁이 돌아서지 못하고 있는 두 가지 이유.
하나는 당연하게도 공간석 때문.
다른 하나는 바로 손에 든 두 알 때문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 박동처럼 기운을 내뿜기 시작한 알은 조금만 더 희끄무레한 기운을 주입하면 당장이라도 ‘주인님!!’ 하며 알을 깨고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