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호왕족 (1) >
백두 비경은 비경 입구를 중심으로 서쪽과 남쪽은 대부분 밝혀진 상태였다.
하지만 북쪽은 일정 지역을 경계로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어 수사들의 방문을 거부했고, 동쪽은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동물이고 식물이고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은 사막만이 존재했기에 수사들이 찾질 않았다.
처음엔 북쪽 안개 지역에 엄청난 보물이 있을 거라는 의심 때문에 수많은 수사들이 찾아갔지만, 그 누구도 돌아오질 못했다.
동쪽 역시, 아무리 사막이라 한들 영기가 가득한 대지에 아무것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수많은 수사들이 모여든 적도 있었다.
결과는 허송세월하고 시간을 낭비한 것뿐이었다.
그랬기에 백두 비경에 간다고 하는 말은 비경의 서쪽과 남쪽에서 활동한다는 말과도 같은 말이 되었다.
‘북쪽의 안개가 호왕족의 결계인 줄은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고 말이야.’
찌르는가시를 따라 안개 속으로 들어온 준혁은 그에게 들었던 방법대로 안개를 통과해, 지금껏 의문에 싸여있던 백두 비경의 북쪽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비경의 서쪽과 남쪽에 비한다면 압도적으로 짙은 영기를 보유한 북쪽. 비경의 북쪽은 찌르는가시의 말대로 성스러운 곳. 축복을 받은 대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아마 지금껏 백두 비경에 결단기급을 넘는 영수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모종의 이유로 비경 전체의 영기 질이 북쪽으로 쏠려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덕에 하위 수사들이 서쪽과 남쪽에서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니 준혁의 입장에선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비경의 북쪽 지역 깊은 곳으로 며칠을 이동하자, 나무 한 그루 한그루가 빌딩같이 높고 커다란 소나무 군락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대단하군.”
군락지를 처음 대면한 준혁의 감상이었다.
나무 하나하나가 거대한 영기를 보유한 산처럼, 혹은 높은 빌딩처럼 느껴졌다.
청호마저 그 모습이 신기한지 품에서 얼굴만 내밀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와! 주인님. 이곳이 백호족의 부하들. 그러니까 호왕족이 사는 곳인가요?”
“그래. 운이 좋다면 너의 시조인 백호의 진체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준혁이 찌르는가시를 몰래 따라온 이유.
그것은 마선과 계약한 것으로 의심되는 이글대는포효를 만나기 위함도 있었지만, 찌르는가시로부터 알게 된 정보 때문이기도 했다.
이곳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고대 전설 중 하나인 백호의 진체.
기목청, 용천무와 마찬가지로 삼경을 넘어 삼선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의 유산을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찌르는가시의 말에 의하면 그 유산을 가져갈 수 있는 건, 준혁뿐이었다.
정확히는 백호족인 청호의 주인된 자격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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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거대 소나무 군락지를 달려가던 찌르는가시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자, 준혁은 그곳을 향해 날아갔다.
완영기에 오른 준혁으로서도 정확히 판단하기 힘든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고대의 진법인가?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구나.”
애초에 진법은 누구를 공격하거나 보호하는 목적보다는 내부의 기운이 밖으로 발산되는걸 막기 위해 설치된 듯 보였다.
준혁은 청호를 품 안에서 꺼낸 후, 두 마리 도마뱀을 영수대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수결을 맺어 백호족의 모습으로 변했다.
화악-
붉은 귀밑머리가 어깨까지 이어진 백호족의 모습으로 변한 준혁은 공간대를 삼키고는 전방을 향해 혈맥의 힘을 발동했다.
“크아아앙!”
순간 대기가 요동치며 진법에 영향을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밋밋한 줄무늬를 가진 호랑이 몇 마리가 진법에서 튀어나왔다.
“누구냐! 이곳은 호···. 왕족의 거처인데. 누구십니까?”
호기롭게 외치며 나타난 외곽의 수비를 맡은 호랑이는 준혁의 모습과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잔뜩 위축되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런 호랑이의 모습에 준혁은 한껏 거만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보면 모르느냐? 아니면 배운 게 없는 것이냐? 나와 이 아이는 백호족의 후예다.”
찌르는가시에게서 정보를 얻기 전까진, 준혁은 백호족으로 변했을 때 나타나는 핏빛 줄무늬가 혈단법 때문인 줄 알았었다.
백호족 청혈을 흡수했으니 청호처럼 푸른 줄무늬를 가져야 했지만, 공법의 영향으로 그 색이 변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었다.
백호 종족은 태어나며 청호처럼 푸른 줄무늬를 가질 뿐, 시간이 지나면 점차 색이 변하며 붉은색을 띠게 되는 것.
준혁이 어떤 이유로 어린 나이임에도 붉은 줄무늬를 가지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그 모습 역시 백호족 혈통의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준혁의 말에 호왕족 수비병은 허둥지둥하다가 진법안으로 사라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흰 눈썹을 가진 호랑이를 필두로 수십 마리의 결단기 호랑이들이 나타났다.
그중 흰 눈썹 호랑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호왕족의 제사장 흔들리는태양이라 합니다. 정녕 백호의 피를 이었단 말이십니까?”
흔들리는태양의 말에 피식 웃어 보인 준혁은 백호의 기운을 발산했다. 동시에 혈맥의 힘까지 자극했다.
화악-
눈으로 보이는 외형이야 술법이나 다른 능력을 이용해 충분히 바꿀 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운, 특히 혈맥의 힘은 그 무엇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것.
준혁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감지한 흰 눈썹 호랑이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러다 잠시 후엔 목이 멘 목소리로 환희에 찬 소리를 내었다.
“아아!! 드디어!! 드디어 오셨습니다! 혈통일 뿐 아니라···. 백호의 힘까지 가지시다니,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드시지요. 저희 호왕족의 모든 이들이 두 분을 반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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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왕족 제사장의 안내를 받아 마을 안으로 들어온 준혁은 여기저기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과 청호를 바라보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부족 전체가 희망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제사장의 거처로 짐작되는 거대한 나무에 도착해, 그 안을 파고 만든 공동으로 안내되었다.
“이곳에 자리하시지요.”
준혁보다 수 배는 오래 살았을 것 같은 제사장은 손짓하나 발걸음 하나에도 공손함과 조심함이 엿보였다.
그 모습에 준혁은 여전히 거만한 눈빛으로 주위를 쓰윽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어째서 원영기 이상 수사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흰 눈썹 호랑이는 다른 이들에게 환영식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다가, 준혁의 말에 움찔하고는 급하게 손짓해 다른 호랑이들을 물리고 조용히 자리했다.
“혹시 귀령을 알고 계시는지요.”
“물론이다. 설마 이곳이 귀령에게 잠식당하고 있는 것인가?”
흰 눈썹 호랑이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이 아닌 그분의 진체가 잠든 곳에 귀령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허면? 혹시?”
“예. 언젠가부터 귀령이 생겨나더니 갈수록 조직화하였습니다. 그것들이 봉인 속에 잠든 그분의 육체를 노린 후부터 저희 호왕족의 전사들은 일정 수행을 쌓고 나면 전부 그곳을 지키기 위해 마을을 떠나있습니다.”
찌르는가시가 했던 말과 같았기에 준혁은 잠시 생각에 잠긴 척 인상을 쓰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토록 나를 반긴 것이었군? 내가 그분의 힘을 깨워주길 바라서?”
“그렇습니다. 그분의 진체는 오직 후예의 피가 있어야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드리는 말이온데···. 조만간 그곳으로 수도자원을 보내기 위한 제를 지내옵니다. 그러니···.”
흰 눈썹 호랑이가 말끝을 흐리자 준혁은 피식 웃고는 그가 할 말을 대신해줬다.
“그러니 나도 함께 가서 호왕족을 돕고 그분의 힘을 깨워달라?”
원영기 호왕족들이 음식을 먹거나 하진 않기 때문에 흔히 생각하는 보급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봉인지 안이었기에, 진법에 사용하는 돌이나 영석, 혹은 영력을 회복시켜줄 여러 가지 물건들을 조달해줘야 할 필요성은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원영기 이후 수사만이 출입할 수 있었기에, 물건을 배달할 결단기 수사들은 의식을 치러 몸을 보호한 후 그곳을 방문해야 했다.
흰 눈썹이 말한 제(祭)란 바로 그것을 의미했다.
“어차피 내가 방문한 이유도 그분의 진체를 확인하기 위함이니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준혁은 자신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상대방이 부탁해 오자 매우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떤 식으로 말을 유도해 백호 진체가 숨겨진 곳을 방문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는 찌르는가시에게 들었던 내용 중 하나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는지는 모르나, 우리 백호족의 남은 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암요. 구지대륙에 환란이 찾아왔을 때 다른 사신 종족과 함께 활동했기 때문 아닙니까요.”
“그래, 그렇기에 우리는 오히려 우리에 대해 많은 걸 알지 못한다.”
준혁의 말에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생긴 흰 눈썹이 눈을 반짝였다.
“그 말은···. 혹시 저희 호왕족의 고서를 보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준혁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힘드나?”
“아, 아닙니다! 당연히 가능합니다. 아무리 종족의 비사가 전부 기록되어 있다 하나, 저희 호왕족은 애초에 백호족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되고말고요.”
흰 눈썹의 반응에 어느새 준혁의 목소리엔 거만함이 사라지고 따뜻함이 가득했다.
“고맙네. 자네들 덕분에 내 뿌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겠어.”
준혁의 태도가 변하자, 흰 눈썹은 입을 벌려 말발굽처럼 생긴 옥을 뱉어내고는 공손히 내밀었다.
“고서를 모아둔 곳은 제 거처 위쪽에 있습니다. 편할 때 언제든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떠나실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그러도록 하겠네.”
잠시 후, 보름 후 제를 치른다는 말과 함께 여러 가지 사항들을 전달한 흰 눈썹이 물러가자, 준혁은 청호를 데리고 거처 밖으로 향했다.
고서도 고서였지만, 마을 구경도 하고, 청호의 수련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할 생각이었다.
백호 유적에서 얻은 술법을 기록한 옥석과 여러 가지 무구들이 있었지만, 아직까진 청호가 사용하기엔 무리인 고급 물품들.
준혁은 호족 마을에 온 김에 청호의 수련에 필요한 물건들을 대량 구매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같은 호족이었기에, 일반적으로 영수를 키울 때 사용하는 물건들보다는 청호에게 도움이 될 거란 판단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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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한 바퀴 둘러본 준혁은 인간들처럼 상점을 운영하거나 물건을 매매하는 행위가 없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각 수행에 맞는 교류회라는 것이 주기적으로 열리는데, 축기기 교류회는 보름에 한 번이었고, 결단기 교류회는 한 달에 한 번이었다.
“오일장 같은 건가···.”
애초에 호랑이들이 인간들처럼 물건을 사고팔며 상점을 운영할 거라 착각한 자신이 우스워 피식 웃고 만 준혁은 곧장 자신의 처소 위에 위치한 고서보관소로 향했다.
그곳엔 호왕족의 역사와 시대에 따른 굵직한 사건들이 담긴 옥석이 한가득 있었다.
아쉬운 점은 인간들의 도서관처럼 시대나 시간의 순서, 혹은 제목에 따라 비치된 것이 아닌, 수백 년 단위로 하나의 통속에 돌들이 수북이 쌓여있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준혁은 혀를 차고는 가까이에 놓인 돌부터 확인을 시작했다.
신비경이나 비경에서 발견된 고서로 인해 많은 정보가 풀리긴 했지만, 선계의 기나긴 세월에 따른 방대한 양에 비한다면 티끌과 마찬가지.
그동안 부족했던 선계의 지식을 물에 닿은 솜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흰 눈썹의 방문으로 인해 다시 거처로 내려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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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처로 돌아온 준혁을 맞이한 건 수박만 한 항아리와 그곳에 가득 담긴 선주였다.
준혁이 선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흰 눈썹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설명했다.
“전전대 제사장이셨던 피어나는들판 님께서 만드신 선주이옵니다. 오랜 봉인을 풀고 가져온 것이니 즐겨주시길 바라옵니다.”
코끝에 스치는 향만으로도 온몸에 청량함이 가득 차는 것 같았기에,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항아리를 통째로 집어 들었다.
옆에선 청호도 호기심 반, 기대 반 상태로 항아리 하나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잠시 후.
“크아···. 정말 좋구나. 내 지금껏 선주를 맛본 적이 많진 않지만, 그 어떤 것도 이와 견줄 순 없을 것이야.”
선주는 몸에 들어간 순간, 온몸을 영기로 씻어주면서 원영에게 청아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단약과는 다른 효과였지만, 수행에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한 것.
준혁의 극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몸을 들썩이던 흰 눈썹이 기다렸다는 듯 밖을 향해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거처밖에서 어수선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수십 명의 호왕족 여수사들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또 다른 항아리를 든 채 선주를 음미하던 준혁은 그 모습에 흰 눈썹을 향해 눈짓했다.
“이들은?”
준혁의 눈짓에 흰 눈썹이 마치 장한 일을 했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대륙이 갈라지고, 종족이 뿔뿔이 흩어지며 사라지긴 했지만, 어찌 과거를 잊겠습니까? 옛 전통대로 백호족의 피를 이을 영광을 이 아이들에게 내려주십시오.”
준혁의 앞.
수십 명의 여 호랑이들이 부끄러운 듯 볼을 발그레 붉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