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이글대는포효 (3) >
“내가 알기론 식아라는 녀석이 마지막에 태어났어. 하지만 소문으로만 들었지 그 녀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적매의 발언에 준혁은 질문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 전에 107번째로 태어난 녀석.”
“아! 그 날파리에 대해 궁금한 거였구나?”
“날파리?”
준혁이 궁금함을 표하자 적매는 신이나 말을 이었다.
“하긴 식아라는 녀석은 한참 뒤에 태어났다니까···. 그전까진 그 날파리가 마지막이었겠구나. 그 녀석의 법명은 초팔(超八) 이야.”
초팔이란 이름을 시작으로 적매가 설명한 107번째 마선은 주먹만 한 파리의 외형을 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 법명과 외형에 대해 들었을 땐 설마 초파리를 줄여서 초팔이란 이름이 붙었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지만, 결과적으론 전혀 다른 뜻의 이름.
초팔은 법명과 어울리는 여덟 가지 초감각을 계약자에게 주는 마선이었다.
이름과 외형, 능력에 관해 설명한 적매는 초팔의 의심 많은 성격에 대해 얘기를 진행하며, 의심의 원인이 초감각으로 인해 상대방의 반응에 민감해졌기 때문일 것이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도 덧붙였다.
한동안 초팔을 만난 것에 대한 썰을 풀던 적매는 준혁이 지루해하는 것 같자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다른 건 또? 또 뭐가 궁금한데?”
“초팔 위 106번째 마선은?”
106번째라는 말에 적매가 싫은 내색을 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106번째로 태어난 녀석은 가세(假世)라는 놈이야. 그놈은···.”
가세.
사마귀 형태의 모습을 한 가세는 평소엔 인족들이 사용하는 가위라는 도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했다.
가세의 능력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상처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개별적으로 보자면 마선 중 가장 비루한 능력 중 하나로, 공간에 만들어내는 상처가 너무 작았기에 공격, 방어 그 어떤 방식으로도 크게 도움이 되는 능력은 아니었다.
다만 가세의 능력엔 특이점이 있었는데, 공간을 다루는 다른 마선과 힘을 합친다면 그 능력을 수배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가진 능력에 비해 인기가 많았고, 대우를 받는 편이었다.
그 점을 적매는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무튼 그놈은 별로야. 성격도 더럽고, 계약자의 수행을 올려줄 생각은 안 하고, 남들에게 빌붙으려고만 하지.”
가세에 대해 별점 테러에 가까운 평가를 한 적매는 그 뒤로도 105번째 마선에 대해 설명한 뒤 또 이야기를 쉬지 않고 이어갔다.
적매가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던 준혁은 시간이 지날수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다쟁이구나.’
자신이 아는 마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들과 얽히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빠지지 않고 첨가하는 적매를 보며 준혁은 자신이 괜찮은 정보통을 만나게 됐다 생각했다.
귀원패와 전혀 다른 성격에 예전 그에게 정보를 빼내기 위해 밀당을 하던 걸 떠올리며 속으로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맞다! 이미도(二美刀)에 대해 말했지? 그 녀석은 말이야. 평소에 인족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전투만 시작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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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율서를 이용해 지하 깊은 곳을 탐색하던 준혁은 용암을 찾는 일이 하루 이틀에 끝날 것 같지 않자 본격적으로 자리를 만들고 적매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지나자 호왕족의 마을을 둘러싼 결계의 끝자락에서 용암을 발견할 수 있었고, 토율서를 이용해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길까지 만들었다.
한 달간 필요한 정보를 어느 정도 습득했다고 여긴 준혁은 적매와 이글대는포효가 수련을 하기 위해 떠나는 걸 붙잡지 않았다.
“더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 물어봐. 너랑 대화하는 건 즐겁네.”
대화라기보다는 혼자만의 수다에 가까웠지만, 적매는 준혁에게 호감이 생겼는지 경계심을 완전히 지운 채 오랜 친구처럼 굴었다.
이글대는포효와 적매가 떠난 후, 마을로 돌아온 준혁은 다시 고서보관소에 처박혔다.
그리고는 때때로 찾아오는 매혹하는구름이나 제사장과 대화할 때가 아니면 오롯이 정보를 습득하는 일에만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1년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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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소나무 군락지의 끝자락.
호왕족의 거주지를 가로막는 결계의 경계.
준혁은 수많은 호랑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 뒤엔 도율과 그의 제자가 말없이 따르고 있었다.
‘다음을 기약해야 하나.’
봉인구역을 정화한 후, 1년간 호왕족과 함께하며 마선에 대한 정보와 옛 고서에 적힌 내용을 획득한 준혁은 한가지 아쉬움을 뒤로해야만 했다.
바로 매혹하는구름만이 알고 있던 수행을 강제로 낮춰주는 절제술.
처음 과 달리 호의보단 의심을 하기 시작해서였는지, 매혹하는구름은 절제술을 알려달라는 준혁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는 백호를 제외한 남은 사신 중 한 명의 힘이라도 얻어온다면 그땐 절제술을 알려준다고 했다.
즉 대놓고 아직까진 너를 믿을 수 없으니 성과를 보이라고 말한 것과 다름없었다.
준혁이 또 다른 사신의 힘을 구해온다면 그건 목숨 걸고 백호가 내린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같으니, 그땐 진심으로 믿겠다는 뜻이었다.
“깐깐하기는.”
“네?”
혼잣말에 도율이 옆으로 다가오자, 준혁은 별일 아니란 듯 고개를 흔들어 보이고는 멀어지는 기감속 청호의 기운을 느껴보았다.
‘잘하겠지.’
준혁은 청호에게 수련과 동시에 임무도 맡겼고, 수련이 막힐 땐 도움을 받으라며 적매도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이 되기는 매한가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청호의 몸속에 심어둔 기운을 떠올리며 준혁은 애써 걱정을 지워버렸다.
그리고는 입김을 내 불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비행 속도를 높였다.
준혁이 인간의 외형으로 변하며 영수의 느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자 도율과 김석환은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 명의 인족 수사는 백두 비경을 가로지르며 비경의 입구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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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용하기에는 차고 넘친다 싶은 업무실.
한쪽에 수북이 쌓여있는 옥간이 이곳 주인의 업무량을 대번에 보여주는 것 같았다.
수북이 쌓인 옥간 옆엔 커다란 창문이 나 있어 햇살이 비치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햇살에서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정확히는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사내에게서.
“아직 연락이 없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벌컥-
그때 업무실의 문이 열리며 도천의 수하중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왔다.
초조한 행색으로 창가에 서 있던 사내, 청명은 도천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재빨리 물었다.
“어찌 되었어?”
“사쿠라님께서도 연락이 끊기셨습니다.”
“비각주는?”
“비각주께서는···. 이번 일이 그곳 내경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며. 모두 철수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명이 바닥을 쾅! 하고 밟으며 소릴 질렀다.
“씨발! 누가 그걸 몰라! 방법을 알아 와야 할 것 아니야! 지금 그곳에 누가 있는지 몰라서 그래?!”
그동안 문주 자리를 맡으며 점잖은 척 대인배인척 잘 연기하고 있던 청명이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수하에게 보였다는 게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지 청명은 전음부를 꺼내 목소리를 담고는 사방으로 날려 보냈다.
잠시 후, 도천의 심복이 물러가자, 비각주 오명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주. 진정하십시오. 현재 무위각주뿐 아니라 사쿠라 님께서도 가셨으니 큰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겁니다.”
침착한 오명환의 말에 청명이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더 걱정하는 거 아닙니까!! 사쿠라 님께서 가셨음에도 아무 소식이 없다는 게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이럴 때일수록 진정하시고···.”
“지금 진정이라고 했습니까?! 진정이요?! 어르신의 유일한 혈육의 행방을 알 수 없는데 지금 진정이라고요?!!”
어느새 청명의 눈은 뒤집혀 있었다.
침착하게 상황을 보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문제가 터지자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비각주는 화를 내는 청명에게 달리 해줄 말이 없는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라고 왜 청명처럼 답답하지 않겠는가?
다만 비각주는 현재 일어나는 일들이 어쩌면 사람의 손으론 막을 수 없는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을 놓아버리는 중이었다.
“당장 결단기 이상 마선문도들을 전부 집합시키십시오. 내가 이끌고 갑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청명의 단호한 목소리에 비각주가 깜짝 놀라며 반대했다.
“안 됩니다! 만약 그랬다가 일이 잘못되면···.”
“이미 잘못되었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르신 혈육의 행방을 알아야겠으니 비각주는 명을 따르십시오.”
청명의 얼굴엔 결연한 의지가 맺혀있었다.
그때, 청명의 시야에 뿌옇게 무엇인가가 흔들린다는 느낌과 동시에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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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율과 그의 제자를 데리고 울릉도로 복귀한 준혁은 기감으로 섬을 확인해보고는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마지막으로 청명과 연락했을 때 나연이와 사유리가 눈꽃 비경으로 갔었다고 했으니 섬에 없는 것은 이해가 갔지만, 항상 성인봉에 머물던 사쿠라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자 의문이 생겼던 것.
거기다 기감을 통해 느껴지는 섬 수사들의 움직임은 평소와 달리 어딘가 어수선하고 무언가에 쫓기는 분위기였다.
그랬기에 준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청명을 찾아왔고, 심장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듯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니까. 얼마 전부터 눈꽃 비경이 검은 기운에 잠식당하기 시작했고, 처음 보는 괴인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준혁의 반문에 청명은 자신이 아는 바를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나열했다.
“그렇습니다요. 어르신. 소식을 접한 후 아가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무위각주가 비경으로 향했으나 그마저도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요. 결국 사쿠라님이 직접 아가씨를 구하겠다고 떠나셨는데···.”
평소 준혁을 의식해 아가씨라는 단어 사용을 자제했던 청명은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하는지 빠르게 말을 이었고, 준혁 역시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호칭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녀마저 행방불명이다?”
“예. 예. 죄송합니다요.”
준혁이 알기로 눈꽃 비경의 최강자는 삼청조를 만난 신비경에서의 뱀 같은 자였다.
수행으로 치자면 사쿠라보다 높았으나, 사쿠라의 신통을 생각한다면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행방불명 되었다면 분명 비경을 잠식하기 시작했다는 검은 기운과 괴인들이 연관되어 있을 터.
준혁은 시선을 돌려 비각주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모은 정보를 모두 가져오거라.”
“예!”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비각주는 몇 분 되지도 않아 옥간 꾸러미를 싸 들고 나타났다.
준혁은 비각주가 가져온 옥간을 공간대에 담고는 바로 흐릿하게 변하더니 모습을 감추었다.
준혁이 사라진 뒤 청명은 비각주에게 모든 인력을 동원해도 좋으니 눈꽃 비경에 관한 정보를 끌어모으라고 명령했고, 비각주가 사라지고 나자 남은 두 명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두 분은 누구?”
청명의 질문에 급하게 준혁을 따라온 도율과 김석환이 뻘쭘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준혁이 아무런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도율은 현재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였다.
‘원래 영수가 아니었던가? 아니면 뭐지? 언제 한국에 이런 세력을···.’
금제로 인해 준혁이 자신의 도움으로 비경을 빠져나왔다고 여기는 도율은 혼란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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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눈꽃 비경의 입구로 날아온 준혁은 입구 주위를 가득 메운 수사들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문이 퍼진지는 오래,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혹시나 모를 기연을 찾아 불나방처럼 모인 수사들이 시장을 방불케 할 만큼 모여들어 일행을 구하고 있었다.
준혁은 그런 이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곧바로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비경으로 들어서기 전,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대머리 수사 두 명이 다가오더니 준혁을 멈춰 세웠다.
“어이. 수사. 소문 듣지 못했나? 지금 안은 난리야. 예전처럼 외경이 안전하지 않다고. 살고 싶으면 최소한 열 명 이상은 무리를 만들어···. 으헉.”
화악-
털썩-
경고를 내뱉던 대머리 수사는 말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심장이 멈추는 충격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런 충격을 받은 건 대머리 수사뿐이 아니었는지, 어느새 비경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은 공포에 젖은 눈빛으로 벌벌 떨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준혁은 그런 이들을 무심한 눈으로 쓰윽 훑고는 가볍게 땅을 박차며 비경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곳에 오기 전 삼청조로 사쿠라에게 연락을 시도해본 준혁은, 그녀와의 연락이 닿지 않자 신경이 곤두서있는 상태였다.
그런 준혁 앞에서 거들먹거린 대머리 수사는 목숨이 붙어있는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저 사람···. 한국의 원영기인 최준혁 수사 아닙니까?”
“맞는 것 같네 그려. 나도 원영응결식에서 본 적이 있어.”
“그런데 방금 그건 뭐였죠? 오줌을 지릴 뻔했습니다. 원영기가 이 정도로 무서운 존재였습니까?”
제법 준수해 보이는 사내가 겨울도 아닌데 자신의 몸을 연신 쓰다듬으며 말하자, 대화를 받아주던 사내 역시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어찌 알겠나···. 헌데 저분은 그냥 원영기가 아닐세. 같은 원영기 초기 수사를 한 수만에 제압했지 않은가?”
“아···.”
“그리고···. 크흠, 나는 비경에 들어가기 전에 바지부터 갈아입어야겠어.”
< 160화. 이글대는포효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