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전마족 (2)
새로운 마족의 출현을 알아차린 준혁은 토율서를 이용해 꽁꽁 언 이브람의 사체를 땅속에 숨겼다.
뾰로통한 표정의 원영마저 체내로 들여보내고는 수결을 맺어 전신의 기운을 단으로 모은 후, 탁기를 이용해 마족의 공법을 운용했다.
그러자 준혁의 피부가 미세하게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눈동자가 진한 보라색으로 번들거렸다.
잠시 후 마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하자 신비경의 입구에서 원영기 마족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준혁을 보고는 멈칫했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준혁의 전신을 뒤덮은 마기를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철저한 약육강식의 마족 문화.
준혁은 완영기 수행을 온전하게 드러내며 말했다.
화악-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준혁에게서 엄청난 영기 파동이 퍼져나오며 주변을 짓누르자, 원영기 마족은 철렁한 심장을 부여잡으며 대답했다.
“저, 저는 육구 공격대의 일원인 카람이라 합니다. 선배님께서는 누구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준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못마땅하다는 듯 눈초리로 대하다가 마지못한 척 입을 열었다.
“난 이이(二二) 공격대의 부대장이다.”
“아! 어쩐지! 수행이 심상치 않다고 여겼습니다. 이십 번대 공격대의 부대장을 이렇게 볼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이브람의 지식 속에서 이들 육구 공격대는 30번대 이하의 공격대원들을 본 적이 없다는 정보를 얻어 이를 바탕으로 거짓 신분을 만들었다.
전마족의 공격대는 숫자가 낮을수록 전투력이 높음을 의미했다. 그중 십 번대 이하로는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했기에, 전장에서 가장 강한 축에 속하는 20번 대 초반의 공격대라 둘러댄 것.
“너희 육구 공격대는 지금 상황이 어떻더냐?”
“무슨 상황을 말씀하시는 건지….”
“우리 공격대는 갑작스런 상황에서 깨어나 보니 대장과 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이성을 잃은 상태다. 네놈은 겨우 원영기에 불과한데 이렇듯 제정신인 걸 보면 우리와는 다른 듯 보이는구나.”
준혁의 말에 원영기 마족은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아닙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대원 중 한 놈이 그 증세를 치료할 수 있었기에 그나마 상황이 나은 정도입니다.”
“치료? 그놈은 어디 있느냐? 너희 대장에게 부탁해 데려가야겠다.”
“그것이…. 저도 그놈을 찾으러 나온 것인데….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머물고 있으신 겁니까? 저희가 봉인지 근방은 전부 뒤졌는데….”
원영기 마족이 말꼬리를 흐리며 질문하자, 준혁은 순간적으로 강렬한 기파와 함께 살기를 쏘아 보냈다.
살기에 원영기 마족이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나자, 준혁은 번개처럼 움직여 마족의 목을 움켜잡았다.
“대장의 안전을 장담 못 할 상황이거늘, 네깟놈에게 말해야 할 의무라도 있더냐?”
“커억, 아, 아닙니…. 크륵.”
이브람의 기억을 토대로 보자면 마족은 부탁을 하는 것보단 강한 힘으로 찍어누르는 게 오히려 더 존경심을 끌어냈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기분이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그 기분을 해소하려는 듯, 준혁은 기파를 쏘아 보내 한 번 더 충격을 준 후 손을 휘둘러 상대를 벽 쪽으로 던져버렸다.
쿵-
원영기 마족이 벽에 부딪힌 후, 급하게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자, 이번에도 한걸음에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 댔다.
“밖에서 기다리거라. 너희 대장을 만나야겠으니.”
“예…. 예!”
잠시 후. 원영기 마족이 몸서리를 치며 공동을 빠져나가자, 기감으로 거리를 측정하던 준혁은 손을 저어 땅속에 묻힌 이브람의 사체를 꺼냈다.
그리고는 발끝으로 바닥을 퉁 치며 혈단법을 발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브람의 시체는 검붉은색을 띠는 하나의 구슬로 변해버렸다.
혈정단을 챙긴 준혁은 잠시 고민에 빠져있다가 혀를 차고는 신비경 입구로 몸을 돌렸다.
“어쩔 수 없지.”
법기를 흡수해 최대한 탁기를 모은 후 움직이려 했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마족의 거주지로 들어갈 방법이 생겼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마기 때문에 마족의 혈정단은 삼가려 했지만, 만약 탁기가 부족해 일이 틀어질 것 같으면 혈정단을 복용할 생각이었다.
안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적당한 타이밍.
지금은 안전보다는 마족이 봉인돼있었던 장소로 들어가 열쇠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
신비경에서 나온 준혁은 원영기 마족의 뒤를 따라 구덩이가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
거리낌 없이 구덩이로 몸을 날리는 마족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과는 차원이 다른 진한 마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은 대장님을 만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우선 부대장님께 안내해 드릴까요?”
준혁에게 한 번 당한 뒤론 꽤나 정중하게 바뀐 마족을 보며 준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니. 육구 공격대가 봉인되어 있었다던 장소로 안내해라.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확인을 해야겠다.”
준혁의 요구에 마족은 잠시 인상을 찡그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부대장님. 그, 그게 말입니다. 그 안엔 아직 나오지 못한 저희 부대원들이 남아있고. 또…. 말씀드리진 못하지만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어서….”
마족의 말이 끝나기도 전, 이미 이브람을 통해 정보를 전부 습득해놓은 준혁은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며 말했다.
“왕께서 하사한 심기방(沁氣舫)을 찾고 있는 것이겠지?”
“허억! 그걸 어떻게….”
심기방, 그것은 조각배 모양의 법기였는데 평소엔 수십 개의 나뭇조각으로 분리되어 공격용으로 사용하다가, 모든 조각을 모아 하나로 뭉치면 결계를 이루는 기운을 해체하거나 뽑아내는 데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전마족의 왕에겐 총 세 개의 심기방이 있었고, 전부 다 그가 본명 법보나 마찬가지로 여길 정도로 중히 여기는 물건이었다.
“너희들만 심기방을 받은 줄 아느냐? 우리 역시 특수 임무를 이행하며 그것을 하사받았었다. 허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십 조각으로 나뉜 심기방의 일부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져 버렸더군.”
“저희와 같습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같은 처지란 것에 안심한 듯 마족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안내하거라. 너희의 사정을 파악해 우리가 갇혔던 곳과 비교하면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원영기 마족은 경쾌하게 몸을 돌리더니, 마기가 점점 진해지는 안쪽으로 서둘러 날아갔다.
준혁은 이브람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놓은 얘기가 잘 통하자 내심 안심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의 대장인 연형기 수사는 봉인지에서 나와 거주지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몸을 사리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자들은 육구 공격대의 두 명의 부대장이었는데, 두 명 다 봉인지 밖에 있다고 했으니, 최대한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면 그뿐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봉인지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던 열쇠의 행방만 찾아내면 모든 일은 계획대로 풀릴 예정이었다.
***
“멈춰라.”
깨진 모니터처럼 지지직거리는 공간의 틈을 발견한 준혁은 원영기 마족과 함께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들어가기 직전 둘을 막아서는 자가 있었다.
“부대장을 뵙습니다.”
“그래. 이브람을 찾으러 간다더니 그놈은 어디 갔느냐? 이자는 누구고?”
육구 공격대의 부대장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준혁을 훑어보았다.
“이분은 이이 공격대의 부대장이십니다. 저희처럼 얼마 전에 정신을 차리셨다고 합니다.”
“오호~ 이이 공격대?”
완영기 초기 수행을 지닌 육구 공격대의 부대장은 이이 공격대란 말에 씨익 웃어 보였다.
마치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준혁은 상대방이 자신의 기운을 읽고 수행과 비교해 마기가 부족하다는 걸 알아차리기 전 빠르게 말을 꺼냈다.
“이곳과 다르게 우린 대장과 나만 깨어났다. 대장께선 계면의 압박으로 겨우 몸을 추스르고 계셔서, 나 혼자 해결책을 구하기 위해 주변을 뒤지다 이자를 만났지.”
“소문 익히 들었습니다. 이이 공격대면 적린공법(赤鱗功法)으로 유명하신 자림님이 대장으로 있으신 곳 아닙니까?”
‘자림?’
준혁은 이브람의 기억을 통해 육구 공격대원 전원이 이이 공격대의 신상에 대해 모르고 있다 여겼었다.
그가 알고 있는 건, 이일 공격대와 이이 공격대는 신비에 싸여있어 아무도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
하지만 상대방이 말하는 걸 보니 상황이 난처하게 변해가는 듯싶었다.
맞다고 얘기했을 경우, 상대방이 자신을 의심해 떠보는 것이라면 바로 의심부터 살 테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일.
결국 준혁은 거론 자체를 회피하며 다른 주제로 넘어가려 했다.
그때 준혁을 안내했던 원영기 수사가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입니까?! 그 유명한 자림님이 이이 공격대셨습니까? 어쩐지! 소문에 이이 공격대가 지나가면 붉은빛이 함께한다더니, 그게 그 말이었군요!”
준혁은 완영기 수사의 말에 대한 답인 듯, 혹은 원영기 수사가 말한 내용에 반응하듯 애매하게 고개를 살짝만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우선 그대들이 봉인되어 있었던 장소를 확인해보고 싶다. 그래야 우리와 차이점을 찾아내고 의식을 무너트린 이유를 조금이라도 파악할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이곳 대장을 만나 부대원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자도 빌려 가고 싶은데.”
완영기 수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준혁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에 어렵겠습니까? 서로 같은 목적으로 임무를 수행 중이었을 텐데. 하지만 조금 전 모종의 이유로 봉인지에 작업을 지시해놓고 온 길입니다. 반나절이면 될 테니 제 거처로 가 잠시 얘기나 나누시지요.”
“심기방 때문이라면 숨길 필요 없다. 우리 역시 가지고 있던 심기방이 사라져 그 이유를 파악하는 중이니, 그것 역시 내가 봉인지에 가려는 이유 중 하나다.”
심기방이란 말에 완영기 마족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하다가 무엇을 확인하려는 듯 자신의 수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준혁에게 시선을 돌리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것 때문은 아닙니다. 이곳에서 포획한 영수족 놈들 때문이지요. 우선 자리를 옮기시면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준혁은 그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가 껄끄러웠으나, 거듭 요청하자 할 수 없이 수락해야 했다.
“그러도록 하지.”
***
잠시 후, 텅 빈 토굴에 들어서자, 앞장서 이동하던 완영기 수사가 손을 저었다.
손짓에 따라 바닥의 흙이 뭉치더니 의자 비슷한 모양으로 굳어졌다.
거처라 하기엔 휑한 공간은 왠지 모를 섬뜩함이 전해져왔다.
“편하게 앉으시지요.”
기감을 퍼트려 토굴 안을 살핀 준혁은 상대방의 친절한 행동에 비웃음을 날렸다.
“편할 리가 있겠나? 이렇게 진법을 덕지덕지 발라놓은 장소에서?”
준혁이 매섭게 쏘아보자, 상대는 피식 웃더니 의자에 털썩 앉았다.
“눈치채셨습니까? 그럼 저도 한 가지만 여쭙지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이 공격대의 부대장이라 말하지 않았나?”
“흐흘. 마기가 흐르는 걸 보면 마족인 것은 맞는데…. 무슨 이유에서 이이 공격대의 부대장을 사칭하는지 궁금합니다.”
준혁은 상대방이 이이 공격대와 인연이 있다고 확신했다.
“반대로 묻고 싶군. 그대는 왜 나를 의심하는 거지?”
준혁의 반문에 상대가 히죽히죽 웃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한 이이 공격대장 자림님 말입니다. 흐흘, 그분이 저희 혈족의 일원이셔서 말입니다.”
상대방의 말에 준혁은 은밀히 영력을 움직였다. 마음먹는 순간 상대의 목을 날려버릴 생각.
“그래서 알고 있습니다. 그분 밑의 두 부대장께서는 여인이란 걸 말입니다. 혹시 그 모습으로 여인이라 말하진 못하시겠지요?”
피식-
준혁은 자신이 만든 가짜 신분이 완벽하다고 여기진 않았지만, 이런 이유로 간파당했다는 것에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상대방은 준혁의 웃음을 보고는 똑같이 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여인이 아니신 것 같으니 이제 이곳에 모신 목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흐흘.”
그때 준혁이 들어선 곳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통로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널찍한 어깨에 뿔이 나 있는 투박하게 생긴 사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새로운 이의 등장에 준혁 맞은편에 앉아있던 완영기 마족이 재밌어 죽겠다는 듯 장난스러운 표정을 했다.
“당신이 어디 소속인 줄은 몰라도, 이곳에 숨어들어오려던 진짜 목적은 알아야겠습니다. 흐흘, 그 머릿속을 뒤적거리면 거짓말은 못 하겠지요?”
상대의 반응에 준혁은 차분하게 반문했다.
“할 수는 있고?”
“흐흐흘, 소개하지요. 나와 같이 육구 공격대의 부대장을 맡고 있는 차락이라고 합니다.”
한쪽은 한없이 가벼운 듯 장난스러운 사내, 그 옆엔 무표정의 듬직한 곰 같은 사내.
두 완영기 마족이 준혁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