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제이콥, 올리비아 (2)
캐나다 부부가 함정에 빠지길 기대하며 약화시켜 놓았던 금지의 결계.
준혁은 결계를 원상태로 복원시키고는 곧장 일본으로 향했다.
두 명의 원영기를 풍선처럼 끌고 눈꽃 비경으로 들어온 준혁은 조각배 형태의 비행 법기를 꺼내 두 사람을 태우고는 하늘을 갈랐다.
며칠 뒤 중경에 자리한 연합지가 멀리 보이자, 조각배 선두에 서서 비행 법기를 조종하던 준혁은 삼청조를 소환해 어깨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영수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고, 백호 기운을 슬쩍 흘리며 연합지로 다가갔다.
“큰둥아!”
의도적으로 기감과 함께 기운을 퍼트리자, 가장 먼저 산들바람이 반응해 나타났다.
“빨리 돌아온다고만 하고, 영영 오지 않을 줄 알았어!”
산들바람이 달려와 품에 안기자, 준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사실, 당분간은 방문하지 않으려 했기에 속으로 뜨끔하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곧이어 바람꽃을 위시한 각 영수족의 원영기 수사들도 기운을 느끼고는 우르르 몰려왔다.
“수사! 돌아오셨습니다!”
황웅족 원영기 수사인 거웅이 유독 반갑게 맞이하자 준혁은 산들바람을 떼어낸 후, 가볍게 인사를 해주고는 다른 이들에게도 한 차례씩 시선을 주었다.
“최근 마족들은 어떠합니까?”
준혁의 물음에 거웅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이상할 정도로 너무 조용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경에 진입해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의견을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거웅의 대답에 준혁은 공간대에 보관해둔 두 완영기의 원영을 떠올렸다.
연형기 마족은 움직일 수 없을 테고, 완영기 두 명은 이미 처리된 상태. 게다가 이성을 잃은 마족들을 치료해줄 사람도 준혁이 처리했으니, 그들은 손발이 전부 묶인 것과 마찬가지.
“내가 바람꽃 수사를 구하기 위해 잠입했을 때 살펴보니, 그들도 봉인에서 풀려나며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경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할 테니 결계를 손보고 힘을 기르는 게 맞을 겁니다.”
준혁이 걱정인 듯 조언하자, 거웅을 비롯한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에 동조하지는 않는지 의문이 생긴 듯한 표정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걸 받으시지요.”
준혁은 캐나다 부부를 던져주었다.
“이 인족들은 결계를 유지하는 재료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준혁이 인족 두 명을 잡아 와 내밀자, 결계를 다루는 데 능숙한 흑오족 수사가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갔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인계받고 깜짝 놀랐다는 듯 두 눈을 껌뻑거렸다.
“이자들은 원영기 수사들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결계를 유지하는 데 꽤 도움이 될 겁니다.”
“도움뿐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준혁이 연구를 핑계로 결단기급 수사들을 여럿 빼가, 그 자리를 메꾸느라 영석 소비가 급증해 있었다.
최근엔 활동하는 인족들마저 줄어들어 난감해하고 있던 차.
준혁의 호의에 수사들이 전부 반색했다.
하지만 준혁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명령도 아닌 부탁이란 말에 전원이 귀를 쫑긋 세웠다.
***
적호족의 심처에 들어서자, 바람꽃이 어렵다는 듯이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최 수사. 그대가 인족이니 그런 말을 한 건 이해하지만…. 다른 이들이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어요. 아니 어렵다고 봐요.”
준혁이 말한 부탁이란, 앞으로 인족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더는 비경 안으로 들어오는 인족을 공격하지 말아 달라는 것.
그 이유로, 마족을 몰아내기 위해선 인족이 가진 힘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댔다. 그 힘을 입수할 때까지는 인족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좋다고 말이다.
마족들을 몰아내야 그들에게 잡혀있는 각 부족의 수사들을 구할 수 있으니, 최대한 협조하라는 식으로 좋게 돌려 말했다.
하지만 모여있던 수사 중 황웅족 수사만이 유일하게 그러겠다고 즉답했고, 나머지는 생각해보겠다고 하며 각자의 부족으로 돌아갔다.
“제가 인족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준혁의 말에 바람꽃이 의외란 얼굴을 했다.
“그럼 정말 인족들이 가진 방법으로 마족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준혁은 호왕족과 마찬가지로 눈꽃 비경의 영수들과 인족의 관계도 개선하겠다는 의도가 컸다.
백호의 기운을 빼앗아 오는 데는 호왕족의 도움이 필요했고, 주작의 기운을 빼앗아 오는 데도 영수족의 도움이 필수였으니까.
다만, 마족에 관한 이야기도 진실이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자신이 가진 물건 중 마족의 봉인지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물건이 있었다.
하지만 그 물건을 작동시키기 위해선 꽤 많은 수사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건 영수족만으론 부족했다.
인족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말은 그런 뜻으로 전한 것이었다.
그때 세 사람이 자리한 장소로 영수들이 사용하는 전음부가 속속 날아들기 시작했다.
바람꽃은 무슨 일인가 싶어 전음부를 확인하더니, 준혁을 향해 입꼬리를 길게 늘어트렸다.
“다들 최 수사의 의견에 따르겠다네요. 대신 자신들의 수장을 꼭 구해달라는 내용이에요.”
바람꽃을 따라 준혁도 입꼬리를 말아 올리자, 산들바람이 준혁의 소매를 흔들었다.
“이제 이곳에 계속 머물 거야?”
종속의 인으로 연결된 끈을 통해 뜨거운 감정을 느끼며, 준혁은 산들바람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분간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수행을 올리는 데 집중할 거야. 마족을 몰아내는 데 다른 인족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내가 강해져야 그것도 가능하거든.”
준혁의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산들바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 끝자락을 꽉 쥐었다.
마치 도망가지 말란 듯이.
“그럼 나도 같이 갈 거야.”
“산들아!”
산들바람의 말에 바람꽃이 정색하며 소리쳤다.
준혁을 따라가겠다는 건 인간들의 세상에 가겠다는 것.
인간들이 영수를 한낱 기르는 동물 취급한다는 걸 알았기에 그녀로서는 절대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달리 준혁은 그녀의 말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 같이 가자.”
“정말?”
“최 수사!”
산들바람은 기쁜 듯 되물었고, 바람꽃은 또 한 번 소리쳤다.
“수사,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인족은 다른 종족과 달리 겉모습으로 많은 걸 판단합니다. 산들이의 모습을 보고 영수라 생각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고요.”
만약 산들바람이 영수란 걸 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수행이 원영기이고, 종속을 맺은 이가 준혁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업신여길 가능성은 없었다.
“산들이는 왜 데려가려는 거죠? 평소 수사라면 절대 반대했을 텐데?”
바람꽃이 걱정을 놓지 못하는 듯 보이자, 준혁은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이번 기회에 경험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곳에 두고 저 혼자 떠나면, 또 수행은 뒷전으로 놓을 테니까요. 그리고 바깥을 경험하고 나면 먼저 돌아가고 싶다고 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뜬금없는 전음에 바람꽃은 준혁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준혁이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산들바람의 수련 상태.
원영기라고 하기엔 너무 낮은 수행과 조잡한 실력. 준혁은 이번에 폐관에 가까운 수련을 진행하며 산들바람을 뜯어고칠 작정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훗날 사신의 힘을 부여받을 그릇이 될지도 몰랐기에 미리 그 바탕을 다져놓을 작정이었다.
***
준혁은 영수족과의 협의를 끌어낸 후 곧장 울릉도로 향했다.
눈꽃 비경을 빠져나오자 산들바람은 황홀감을 느낀다는 듯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아~ 이게 바깥세상이구나! 내가 그 좁은 곳에서 나오다니! 믿기지 않아.”
꼬마의 모습을 한 산들바람이 기지개를 켜며 이제 막 출소한 범죄자 같은 말을 내뱉자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특별히 다를 것도 없어.”
“다를 게 없다니! 큰둥이 네가 그 좁아터진 곳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마치 어른이 훈계하듯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말하는 산들바람을 보며, 준혁은 하려던 말을 삼키며 쓰게 웃었다.
‘이곳이 비경 안보다 작은 세상이란 걸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긴 하네.’
눈꽃 비경은 지구를 포함한 수많은 비경 중에서도 손꼽히는 넓이를 가진 곳.
준혁은 산들바람이 다시 눈꽃 비경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사실을 모르게 할 생각이었다.
그때 준혁의 기감에 멀리서 폭풍 치는 영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누군가 수행을 올리며 나타나는 현상, 그리고 기운의 크기와 방향을 느낀 준혁은 누가 수행을 올리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도천! 드디어 원영기에 오르는구나!’
섬을 봉쇄하기 전, 준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도천에게 인지경과 함께 명혼단 한 알을 보내주었다.
앞으로 수련하는 준혁을 대신해 비경을 오고 갈 인물이 필요했고, 그 적임자로 도천을 생각해 둔 것.
아니나 다를까 도천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원영기에 오르며 준혁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 큰둥아? 누가 원영기에 오르려나 봐? 영기 폭풍이 느껴져.”
얼마 지나지 않아 산들바람도 느낄 만큼 기운이 증폭해져 은은하게 대기를 흔들었다.
***
시간이 조금 지나 울릉도에 접근한 준혁과 산들바람은 수많은 사람들이 섬을 벗어나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와 인족들이 엄청나. 바글바글하네.”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떠는 산들바람에게 준혁이 울릉도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섬 보이지? 저곳이 앞으로 네가 지낼 곳이야.”
“저기서 흰둥이랑 같이 사는 거였어? 저 섬에 집이 있어?”
준혁은 산들바람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준 후, 기감으로 도천의 상태를 살폈다.
어느새 하늘은 오색 빛을 머금은 영기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기운은 넘실대며 계속 커지고 있었다.
그때, 준혁을 발견한 사쿠라와 청명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최 수사! 안 보이길래 어디 간…. 그 아이는….”
사쿠라는 준혁 옆에 딱 붙어있는 산들바람을 보더니, 안색이 굳어졌다.
영수족에 붙잡혀있을 당시를 떠올린 것.
그리고 옛 기억을 끄집어낸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어? 저거 삼청조 도둑이네? 예전에 도망갔었는데…. 아! 큰둥이 네가 잡아 온 거야?”
준혁은 어디서부터 설명해줘야 할지 생각하다가 청명이 다가오자 시선을 돌려버렸다.
“청명, 섬의 일반인들은?”
결단기에 오를 때 발생하는 영기 폭풍이면 그저 기절로 끝날지 모르지만, 원영기라면 몸이 허약한 일반인은 잘못될 수도 있는 일.
“징조가 보이자마자 바로 배를 띄웠습니다요.”
“잘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지?”
강렬한 기운을 뿜어대는, 사실은 기운을 조절할 줄 모르는 산들바람을 보며 청명이 조심스럽게 묻자, 준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여동생이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아직 철이 없어 장난이 심할 수도 있으니 섬 내에도 미리 알려두고.”
인간의 문화를 모르니 산들바람의 행동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까 봐 준혁은 미리 언질해 놓았다.
“철이 없다니! 나도 어른이야!”
“그래, 알았어.”
준혁은 고개를 끄덕여주며 청명을 향해 ‘봐? 내 말 맞지?’ 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사이 몇몇 인원들이 더 다가오며 인사를 나눴고, 모두에게 산들바람을 일일이 소개했다.
사쿠라와 어느새 나타난 최나연, 천이화만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아무 말 없이 준혁의 행태를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본격적으로 영기구름이 회오리치며 엄청난 파동을 퍼트리기 시작하자, 모두 긴장한 채로 성인봉에 자리한, 도천이 머무는 곳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시작합니다요!”
청명의 말과 동시에 오색 빛을 머금은 영기구름이 섬 중앙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원영기의 탄생이냐, 아니면 원영 응결에 실패하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단 한 명, 준혁만이 무언가를 감지하고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남들이 보지 못하게 손을 살짝 흔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