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10화 (210/408)

210화. 한 걸음 (1)

눈꽃 비경, 내경 깊은 곳.

여기저기 팬 흔적과 거대한 구덩이가 그대로 남아 있는 자리,

뭉툭한 아홉 개의 법기가 원형을 이루고 그 중심에 푸른 막의 전송진이 나타난 곳에 수많은 이들이 잔뜩 밀집해 있었다.

선두엔 준혁을 시작으로 아마르곤, 아르나프 등 완영기 수사들이 서 있었고, 그 뒤론 산들바람, 청호, 바람꽃 등 준혁과 밀접하게 연관된 원영기 수사들이.

그리고 그들 뒤엔 거웅을 비롯한 흑오족 수사부터 시작해 아홉 종족의 원영기 수사들이 전부 모여있었다.

소곤소곤-

시간이 지날수록 모여있던 자들은 긴장이 풀리는지 친한 이들끼리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그때, 준혁이 수사들을 유혹하듯 일렁이는 푸른 막을 바라보다가 뒤에 대기하고 있던 수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시작합니다. 모두 숙지한 바대로 잘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말을 하는 준혁에게서 서슬 퍼런 기세가 흐르자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이 움찔거리며 침을 삼켰다.

마족을 청소하기 위해 준혁과 함께 떠났던 흑오족 수사로부터 준혁의 수행이 널리 퍼진 뒤였기에, 누구 하나 눈을 마주치는 자가 없었다.

다만 인간들은 준혁의 수행에 겁을 먹고 조심하는 것이었다면, 영수들은 공포와 동시에 존경이 함께한다는 것이 달랐다.

잠시 후, 준혁이 푸른 막으로 진입하며 주작의 봉인지로 사라지자, 그 뒤를 아마르곤이 뒤따랐고, 나머지도 한 명씩 차례로 몸을 움직였다.

특이한 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수행이 높은 순서대로, 마치 서열이 정해진 것처럼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봉인지 안에 들어온 준혁은 기감을 유형화시켜 주위를 살핌과 동시에 한 명씩 들어서는 자들에게 일일이 방향을 지정해주었다.

“아마르곤 수사, 먼저 얘기했던 대로, 아르나프 수사와 진의 중추를 맡아주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산들과 바람꽃 수사는 남쪽을, 청호 너는 여기 거웅 수사와 동북쪽으로 가거라.”

“네! 주인님.”

“명에 따르겠습니다!”

잠시 후 봉인지에 들어선 수사들은 준혁의 명령에 홀로 혹은 두세 명씩 짝을 이룬 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에 준혁은 수결을 맺은 후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봉인지의 중심지로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주작이 잠들어 있는 장소.

그곳을 본 준혁은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백호의 봉인지가 땅속 깊은 곳에 안식처처럼 마련돼있었던 것과 달리, 주작의 봉인지는 붉게 불타오르는 거대한 바위였다.

“철저하게도 막아두었구나.”

이중 삼중으로 봉인된 모습.

거기에 더해 봉인 밖으로 펼쳐진 진법은 상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봉인 결계 중 하나였다.

“그래도 한때는 동료였을 것일 텐데….”

준혁은 혀를 차고는 결계를 약화할 진법을 설치했다. 그리곤 결계의 기운이 반전되자 그제야 바위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파앗-

직후, 주작의 잔혼에게서 흡수한 기운을 활성화하자, 바위 속으로 흡수되듯 다른 곳으로 이동되어버렸다.

***

은은한 온기가 느껴지는 붉은 공간.

백호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공간으로 이동된 준혁은 재빠르게 사신들의 힘과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마기를 만들어 본인의 의식을 보호했다.

그런 후에야 의지를 표출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주작을 불러냈다.

“후배 최준혁이라 합니다. 유적을 통해 선배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 방문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흠. 그러시다면.”

한참이 지나도 주작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준혁은 잔혼결을 펼쳐 주작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스르르-

그제야 붉은 기류가 모여들더니 유적에서 보았던 청초한 붉은 머리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댄….”

여인은 유적에서 보았던 잔혼보다 조금 더 어두운 기색을 띠고 있었고, 의식의 강도도 생각보다 약해, 봉인 당하기 전 상태가 매우 나빴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대는…. 내 후인이 아니군요.”

청초한 여인이 살짝 불만스러운 듯 이맛살을 꾸겼다.

그 모습에 준혁은 잔혼에게 했던 것처럼 진실과 거짓을 적절하게 섞어 그녀에게 얘기해주었다.

얘기가 끝나자 주작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때가 왔군요. 나의 소망을 이뤄줄 이라면…. 후인이 아니라 하여도 내 힘을 넘겨줄 의향이 있습니다. 다만, 후배는 내 잔혼결을 완벽하게 익히셨을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그녀를 향해 준혁은 잔혼결로 정제한 그녀의 기운을 외부로 방출해 보였다.

“오!”

동시에 지금은 잔혼결에서 지워버렸지만, 주작이 만들어두었던 함정, 시전자의 힘까지 끌어쓰는 방식으로 기운을 움직였다.

그 모습에 주작은 기꺼워하며 손을 살짝 저었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충분히 그대가 자격이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잔혼결을 온전히 익히지 못했다면 쫓아내려고 했더니…. 이렇게 완벽하게 익혔을 줄이야.”

“마음에 드셨습니까?”

“그래요. 그대는 내 후인이 아닐진대 혈맥의 힘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주작의 혈맥, 정확히는 천봉족의 혈맥이라고 부르는 힘은 불의 내성과 회복에 관한 능력이었다.

술법 중 고온이나 마찰에 의한 피해를 경감해주고, 불을 가까이하면 신체의 회복은 물론 영기의 회복 속도까지 빨라지는 힘.

주작은 한참 동안 준혁을 살펴보더니 때가 되었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지금까지의 어둡고 지친 기운을 전부 날려버리듯이.

“그럼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터! 이제부터 내 힘을 넘겨줄 테니 잔혼결로 나를 받아들이세요.”

그리고는 청아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그녀는 입김을 불어 붉은 기운으로 전신을 휘감았다.

그 순간 주작의 몸이 불꽃으로 변하며 흩날리기 시작했고, 그 조각들이 준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모습에 준혁은 잔뜩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삼청조를 소환했다.

-아마르곤 수사! 지금입니다!

***

준혁이 붉은 바위에 손을 댄 채 가만히 서 있길 한참.

아마르곤은 그가 의식 세계에 접촉했다는 걸 깨닫고는 손끝으로 수십 개의 꽃잎을 만들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리고는 품에서 나무새를 꺼내 손 위에 올려두었다.

이제 계획대로 신호가 오면 원영기 영수를 지휘해 무상번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흡수진을 펼치면 되는 일.

원래 준혁의 첫 계획은 자신을 보조할 4명의 완영기 수사를 대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세월에 그것이 가능할지 몰랐기에 수많은 고민 끝에 원영기 수사들을 이용해 진법을 발동시킬 방법을 찾아내고 만 것.

문제가 있다면, 일을 행한 후 원영기 수사들이 반쯤 초주검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으나, 비경 내부는 안전했기에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그 계획을 듣고 난 후에야 아마르곤은 준혁이 백두 비경에서 호왕족을 쉽게 용서해준 이유를 깨달았다.

“이성적이라 해야 할지, 계산적이라 해야 할지.”

가장 오래 함께한 부하가 의지를 조종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그 순간 그런 판단을 했다니, 믿음직하면서도 한편으론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차가워진 것 같단 느낌도 들었다.

“하긴. 비정한 수도계에서 정에 휘둘리고 감정을 앞세우는 것보단 나은 것이니.”

문득 준혁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걸 떠올린 아마르곤은 자신도 모르게 눈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다.

왠지 그와 연결된 끈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손안의 새가 주둥이를 힘차게 움직였다.

-아마르곤 수사! 지금입니다!

“시작이구나!”

준혁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아마르곤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나머지 수사들에게 목소리를 날렸다.

“무상번을 발동한다!”

그리고는 꽃잎을 통해 목소리를 전함과 동시에 품속에서 36개의 무상번 중 자신이 배정받은 4개를 꺼내 허공으로 던졌고, 영력을 움직였다.

쿠웅-

그 순간 4개의 깃발이 미친 듯이 펄럭거리더니, 푸른빛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준혁이 서 있는 붉은 바위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푸른빛이 솟아 올라와 하늘을 밝히기 시작했다.

잠시 후 36개의 푸른빛이 봉인지 전체를 밝게 비추자, 아마르곤이 재차 소리쳤다.

“흡수진을 발동한다!”

쿠와와왕-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붉은 바위에서 붉은 실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더니 거대한 원진을 만들었다.

원진은 사방으로 퍼져나가기가 무섭게 무상번의 도움으로 기운이 증폭했고, 이내 봉인지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르릉-

그리고 흔들림이 멈춘다 싶은 순간.

후하악-

붉은 바위 위로 붉은 사슬에 감겨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는 거대한 봉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흡수진이 제대로 발동됐다는 걸 확인한 아마르곤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가진 영력을 전부 쏟아부어라!! 일이 끝나고 두 발로 서 있는 자가 있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리고 아마르곤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거대한 봉황 머리 위로 수백 미터가 넘는 진법이, 붉은 뇌전을 머금고 모든 걸 파괴해버릴 것 같은 원진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지상을 향해 뇌전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콰쾅! 번쩍!

동시에 붉은 바위에서 뻗어나간 원진에선 붉은 기운이 촉수처럼 일어나며 봉황의 몸 곳곳을 꿰뚫기 시작했다.

***

“이건 그대가 준비한 것인가?”

불꽃 조각으로 변한 주작의 기운이 준혁에게 거의 흡수되어갈 무렵, 얼마 남지 않은 조각 중 하나에서 주작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의 의식세계인 붉은 공간이 마치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면서 자신의 힘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

“그렇습니다.”

“내 잔혼이 분명 내 힘을 온전히 전해줄 거라 말해 주었을 텐데…. 왜인지 물어도 될까?”

말하는 사이 남아 있던 불꽃 조각은 줄어들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실험은 안전한 곳에서 해야 하고 말이지요.”

“위험과 실험이라…. 그댄 내가 그댈 속이고 있다고 여기고 있군요.”

속이고 있다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속인 것 아니냐는 말을 참은 준혁이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했다.

“무슨 일이 있을 줄 모르니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험이란 말은 다른 녀석들을 상대할 때 통하는지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고?”

“그렇습니다. 선배님의 염원을 이루기 위함이니 불쾌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준혁의 말에 대부분 흡수되고 서너 개 남아 허공을 떠돌던 불꽃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불쾌라니. 매우 좋습니다. 좋아요. 이런 철두철미함이라면 그들을 분명 처리할 수 있을 테지. 이제야 안녕할 수 있겠어….”

그리고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남아 있던 불꽃 조각들이 전부 준혁의 몸속으로 흡수돼 사라져버렸다.

-그들을 꼭 귀천시켜주게. 그러고 나면 내 의식의 잔재가 완전히 소멸하며 그대가 원하던 정보는 자연스레 알 수 있을….

의식의 잔재가 꺼져가며 말하는 내용에 준혁은 쓰게 웃음 짓고는 그녀의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후 혼잣말로 대답해 주었다.

“정보를 알게 된 후, 내가 소멸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작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한 수가 들키지 않았다고 여겼는지 편하게 눈을 감은 것 같았다.

사실, 주작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전부 이룬 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준혁이 그녀가 파놓은 함정을 제거하긴 했지만, 어차피 그 함정은 준혁을 해하려는 목적보다는 두 사신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던 일.

준혁이 자신을 희생해 잔혼결을 증폭시키진 않더라도, 흡수진을 이용해 그들의 힘을 약하게 만들 테니, 결과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같았다.

“아무튼 그대가 남긴 힘…. 내 소중히 사용해 드리리다.”

그 순간 준혁의 몸이 불꽃으로 뒤덮이며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봉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흔들리는 주작의 모습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