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청룡의 후인 (1)
끝도 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극히 짧은 순간 적마의 능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준혁은 비경의 경계를 넘어 도착한 곳이 출발한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바다 위라는 걸 깨닫고 기꺼워했다.
수행이 오르며 적마를 다루는 능력까지 상승했다고는 하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버뮤다 삼각비경을 통과하진 못했을 터.
삼각비경의 육지가 아닌 바다 위에 떠 있다는 것은 비경의 경계를 지나 삼각지 안에 들어섰다는 것과 같았다.
그걸 확인하듯 기감을 퍼트린 준혁은 만족한 표정을 한 채, 입을 벌려 아마르곤을 배출했다.
“한 번에 성공하신 겁니까?”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허공에서 사람 형태를 갖춰가던 아마르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발아래, 바다 표면 아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준혁의 시선 또한 내려갔다.
“눈치채셨습니까?”
“어찌 모르겠습니까? 저 아래에서 느껴지는 이 기운을.”
동의한다는 듯 준혁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마 봉인이 깨어진 상태거나, 외부로 드러나 있는 것 같습니다. 가보시지요.”
준혁의 말에 아마르곤이 전신에 영력을 둘렀다.
백호로 인해 힘이 제거당하고 주작보다 약해진 상태로 봉인되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고대에 사신이라 불렸던 청룡의 힘을 이어받은 후인.
계면의 압박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다고는 하나, 만에 하나 본체가 직접 힘을 쓸 수 있는 상황이라면 쉽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첨벙-
하지만 아마르곤과 다르게 준혁은 믿는 구석이 있는지, 주저 없이 바닷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 아마르곤 역시 영기를 보호구처럼 만들어 몸을 감싼 후,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
바다 끝, 바닥에 도달한 두 사람이 마주한 건 작은 날개를 몸에 바짝 붙인 채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용이었다.
아무런 보호막도 결계도 사용하지 않고 물속에서 미세하게 숨을 쉬며 잠들어있는 듯한 모습.
수행은 전혀 밖으로 드러나질 않았는데, 살이 떨릴듯한 위압감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계면의 압박을 받지 않고 있었다.
다만 몸에 구멍이라도 난 듯 보이지 않는 기운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바다 위에서 느꼈던 그 기운이었다.
“설마.”
그 모습에 무언가를 알아차린 준혁은 기감으로 먼저 확인한 후, 청룡의 후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아! 내부에 금제가 가해져 있군.”
그리고는 어떻게 된 상태인지 확인하고, 쓰게 웃고 말았다.
청룡의 후인은 주작의 정보대로 정신체가 따로 봉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본체가 봉인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백호가 청룡을 죽인 후, 그의 후인에게까지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그를 강제로 잡아다가 구지대륙을 봉인하는 매개체로 이용한 것.
그 과정에서 상대가 오랜 세월을 겪으며 망가질지 어떨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세월에 깎여나가도록 방치되고 있었다.
자신은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본체와 정신체를 완벽하게 분리해 봉인한 것과는 전혀 다른 안배였다.
그리고 그 결과, 청룡의 후인은….
“죽어가고 있구나.”
숨을 쉬고는 있지만,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
정확히는, 이미 죽었어야 할 존재가 억지로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잠시 씁쓸하게 혀를 찬 준혁은 수결을 맺어 청룡 후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의식의 잔재는 남아있을 테니 확인을….”
그때, 거대한 신체에서 희미한 기운이 느껴진다 싶은 순간, 하얀 안개 같은 것이 준혁을 향해 쏜살같이 쏘아져 다가왔다.
청룡 후인의 상태를 확인하느라 초근접해 있던 준혁이 피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수사!!”
그 모습에 아마르곤이 빛살처럼 변해 폭사되며 움직였다.
하지만 아마르곤이 준혁 곁으로 다가가기도 전.
촤르륵-
준혁의 몸에서 수십 가닥의 금빛 실이 나타나 하얀 안개 같은 것을 꽁꽁 싸매버렸다.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장난질이라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백호 수사.”
준혁의 입에서 백호라는 단어가 흘러나오자, 하얀 안개가 크게 요동치더니 조그마한 하얀 호랑이로 변해갔다.
그리고는 금빛 실에 구속돼 고통스러워하다가 펑 소리를 내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흐읍-
청룡의 후인 몸속에 숨어있던 백호의 잔혼을 처리한 준혁은 백호결을 이용해 그 힘을 흡수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아마르곤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알고 계셨다면 미리 말해주셨으면 좋지 않았겠습니까?”
준혁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미리 대비를 한 모습. 아마르곤이 그답지 않게 투덜대자 준혁이 피식 웃고는 금빛 실을 회수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못 느껴 그런 것입니다. 걱정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어찌 된 일입니까?”
아마르곤의 의문에 준혁은 주작과 백호의 기억 속에서 알게 된 내용을 말해주었다.
“백호가 저에게 사신들의 힘을 모아오라고 하신 건 아시지요?”
“물론입니다.”
“사실 그에게 청룡의 기운이 필요하진 않았습니다. 이미 오래전 준비를 마친 후였으니까요. 다만 저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의도는 이것의 몸속에 남겨둔 자신의 잔혼을 회수하기 위해서지요.”
설명을 이어가던 준혁이 청룡 후인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잔혼결을 완벽하게 익히고 백호결과 현무결을 만들어낸 후에야 깨달은 내용.
그건 바로, 그들이 유적에 남겨놓은 잔혼은 후인에게 넘겨주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지. 그 오랜 시간 인고의 시간을 거쳐 만들어낸 의식이나 다름없는 걸 욕심 많은 그것들이 후인에게 넘겨줄 리가 없지.’
처음부터 백호를 비롯한 사신들이 유적을 만들고 그곳에 후인을 남겨놓은 행위는 종족의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훗날 봉인에서 풀려나기 위한 안배. 제물로서 마련된 것이었다는 게 진실이었다.
안전하게 보호받고 잠들어있던 청호는 종족의 대를 이을 후보가 아니라, 백호를 위해 희생당할 운명이었던 것이었다.
잠시 후 준혁이 풀어놓은 얘기를 듣고 난 아마르곤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비정, 비정이라…. 정녕 비정하군요.”
그의 목소리엔 씁쓸함이 가득했다.
그때, 다 죽어가던 청룡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사람 머리통만 한 눈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는 아무런 동작 없이 눈동자만 좌우로 움직여 상황을 파악하는가 싶더니, 준혁에게 눈길을 고정했다.
잠시 후, 물결 파문이 일며 힘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수사가 그의 잔혼을 처리해주신 겁니까?”
입이 아닌 머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와 소리가 전달되자, 준혁은 살짝 물러나며 그와 온전하게 눈을 마주칠 수 있게 거리를 두었다.
오랜 시간 백호의 잔혼에 지배당하고 있었기에 잔혼을 처리하면 청룡 후인의 의식이 깨어날 거라 여기고 이미 준비를 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렇습니다. 청룡의 후예여.”
고마움을 표현하려는 것인지, 커다란 눈을 여러 번 깜빡인 후인이 말을 이었다.
“내 그대에게 제안할 것이 있는데…. 들어볼 용의가 있으십니까?”
“편히 말씀해보십시오.”
충분히 예상가는 제안이었기에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준혁이 예상한 대로 말했다.
“그자의 잔혼을 처리한 걸 보면…. 그대에겐 충분한 능력이 있어 보입니다. 만약 그대가 백호 그자를 영원히 잠들게 해준다면, 내 안에 잠들어있는 그분의 정기를 온전히 건네드리겠습니다.”
그분의 정기란 백호가 가져가지 못했던 청룡 본신의 능력이 분명했다.
“그런 것이라면 굳이 부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이미 백호와 현무, 그리고 주작까지 전부 소멸했으니까요.”
말을 마친 준혁이 수결을 맺자 그의 몸 주위로 각각의 색을 띤 세 개의 구슬이 나타났다가 천천히 회전한 후 다시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대한 눈동자에 경악이 비치다, 한참 후에야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혹…. 어찌 된 일인지 저에게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겨우 용기 낸 듯 말하는 후인의 목소리에 준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자신이 겪은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처음 백호 유적을 방문해 청호를 거둔 일부터 시작해, 마지막으로 현무를 처리한 것까지.
짧지 않은 시간 준혁의 얘기를 경청하던 후인은 어느새 바닷속 멀리 시선을 옮긴 채 후련하면서도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
“주작께서 그렇게 가셨군요….”
후인의 깊은 탄식 속에 백호에 대한 분노보다 주작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다고 느낀 준혁은 혹시 자신의 의문이 풀릴까 질문을 던졌다.
“유달리 주작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시는군요. 혹, 제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준혁의 질문에 한참 동안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던 후인이 다시 시선을 준혁에게 고정했다.
“그대의 얘길 들어보면 그분께서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는 듯하더군요.”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영원불멸한 존재. 굳이 스스로를 희생해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하아…. 그대의 말이 맞습니다. 삼선경에 근접한 그분께서 하시기엔 바른 선택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해가 가는바….”
청룡의 후인이 얘기한 바는 준혁에게 작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주작과 청룡은 평생을 수련 반려로 함께했었고, 서로 은애하던 사이.
즉 주작의 복수는 자신을 기습해 봉인한 것이 아닌, 사랑하던 이를 잃은 것에 대한 복수였던 것.
그리고 사랑하는 이가 세상에 없으니 스스로 삶에 의미가 없다고 여겨 자신을 불태워 복수를 감행했던 것이었다.
‘수행이 올라갈수록 감정은 마모되고 사라지는 것인 줄 알았더니 이미 신선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들이, 허….’
그 순간, 청룡 후인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던 준혁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자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술법과 진법에 대한 지식욕도 있었고, 강해지고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욕구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부가적으로 얻는 것들이었지 자신이 처음 강해지고자 했던 이유는 동생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 후엔 그 마음이 여서령에 대한 마음의 짐으로 바뀌었고, 그 약속을 이행하고자 하는 강한 신념으로 선계로 가고자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기도 했다.
물론 온전하게 여서령만을 생각하며 달려온 길이냐고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가진 본질적인 가치 추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명확했다.
그러다 보니 준혁은 자신에게 되물어야 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계로 올라가 그녀를 찾게 된다면? 그땐?’
준혁에겐 동생과 함께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것이 영원불멸한 존재가 되어 영생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원이 행복이란 말과 동일시되는 건 아니니까.’
그때 그동안 관계를 맺어왔던 수하들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마르곤을 비롯해 청호와 산들바람, 그리고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천균까지.
‘하아. 나는 분명 명확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여겼거늘. 지금 보니 그렇지가 않았구나. 마치 흘러가는 대로…. 아!’
그 순간 뇌리를 강타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세 명의 사신의 기운을 받아들인 후.
그들의 힘이 너무 강대했기에 미량의 기운만 흡수하고 대부분은 구슬 형태로 만들어 검은 사슬로 봉인을 해버렸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미량의 기운조차 지금 준혁에겐 어마어마한 힘을 내포한 기운
준혁은 그런 기운을 흡수하고도 수행이 오를 기미가 없자, 이곳 계면의 한계 때문이라 여기고 별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자신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젠 알 것 같았다
쿠아아앙-
그 순간, 바닷물이 준혁을 중심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