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흑마지(黑魔池) (2)
“이것이 무엇입니까?”
“복용하면 그대의 몸을 보호해 줄 것이다.”
빨리 먹으라는 듯 지긋이 바라보는 대막리의 눈빛에 준혁은 그가 건넨 하얀 단약을 단번에 삼켰다.
그의 진정한 능력을 경험한바. 쇠똥을 삼키라 해도 주저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억지로 먹은 단약이 몸속에서 녹아 사라지자 준혁은 놀라움에 두 눈을 번쩍 떠야 했다.
“왜? 독이라도 먹일 줄 알았나?”
대막리가 건넨 단약은 그의 영역의 힘 일부를 담고 있었고, 약효가 발휘되자 준혁의 피부 위로 보호막이 생성되었다.
준혁은 단약에 담긴 영역의 힘을 곱씹으며 힘의 원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자, 다들 움직인다.”
하지만 기운을 움직여보기도 전, 대막리가 영력을 끌어올리며 쏘아져 나갔고, 그 뒤를 이어 교휴가. 다음으로 준혁과 조호랑이 그 뒤를 따랐다.
슈앙-
그리고 비행법기의 도움 없이 이동을 시작하자, 준혁은 대막리가 단약을 건넨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암흑기가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구나!’
계면을 통과할 당시 종속의 힘을 빌리고서야 겨우 버틸 수 있던 암흑기가 마치 봄바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게다가 이동을 시작한 후 시간이 흐르자, 단약의 담긴 영역의 실체가 조금은 느껴졌다. 그것은 조호랑에게 배운 지식과 섞이며 준혁의 이해도를 부쩍 올려주었다.
***
이동 중, 삼경에 이른 수사는 아니었지만, 화신기에 오른 마족 수사를 세 번이나 조우하게 되자 대막리의 표정이 점차 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사방에 퍼져있는 마족을 보며 그들이 흑마지가 위치한 장소를 특정하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준혁은 긴박함이 많이 사라졌다고 여기며 조호랑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까 설명에 마정이 수사의 부족함을 채워준다 하지 않았습니까?
대막리는 마정과 진마정을 설명하며 수행을 견고히 하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라는 간단한 설명만을 덧붙였다.
수행이 올라갈수록 수사의 성질은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는데, 마정을 섭취하면 반대 성질의 기운이 증폭돼 기운의 균형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랬지.
-그럼 마족들은 어떤 이유로 그 물건을 탐내는 것입니까?
준혁 곁에서 음속으로 날아가던 조호랑은 준혁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살짝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흠, 그걸 알려면 우선 마정이 만들어지는 원리부터 알아야 해.
-경청하겠습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옳지. 너 암흑마기란 걸 들어본 적은 있어?
-처음 듣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어 보인 조호랑이 설명을 이어갔다.
-암흑기가 농축되면 그 안에서 암흑마기라는 물질이 생성돼. 하지만 암흑마기는 자연계 법칙에 어긋나는 극단적인 물질이지. 그래서 암흑마기가 생성되면 그 즉시 그 힘을 중화시키려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생겨나.
-아! 설마.
-뭐야? 벌써 눈치챈 거야? 그래. 그렇게 암흑마기와 중화의 힘이 결합하며 생성되는 게 마정이야. 그럼 왜 마족이 마정을 욕심내느냐 하면 말이지.
-마정 안의 암흑마기를 원하는 겁니까?
준혁이 어렵지 않게 결론에 도달하자 조호랑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너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근데 왜 그렇게 수행 상승이 느리지? 체질 문제인가?
그랬다. 인족을 포함한 선계의 수사들은 마정에 담긴 암흑마기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그 안에 섞여 있던 중화의 힘을 얻는 게 목표였다.
반대로 마족은 중화의 힘을 제거하고 암흑마기를 흡수하는 게 최우선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마정 중 진마정은 삼선급의 선인들도 오매불망 찾아 나서는 보물이었고 말이다.
***
“다행히 우리가 먼저 도착했군.”
화신기급 마족 둘을 더 해치우고, 수많은 흑마자 무리를 처리한 일행은 어느덧 흑마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래서 흑마지라 부르는 거였구나.’
흑마지는 연못이라는 이름답게 물웅덩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물웅덩이에 불과했지만, 닿는 즉시 준혁 정도의 수사는 압사시켜버릴 무시무시한 암흑기로 이루어진 것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주겠다.”
대막리는 흑마지를 본 게 처음이 아닌 듯 잠시 살펴본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품속에서 주먹만 한 단약과 절에서나 볼법한 범종(梵鐘)을 꺼내더니 말을 이어갔다.
“아까 먹어보았으니 대충 눈치는 챘겠지? 이 단약은 그것의 상위호환이라 여기면 된다. 이걸 먹는 순간부터 내 영역의 힘을 일정부분 가져다 쓸 수 있지.”
“몸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힘을 가져다 쓴단 말입니까?”
“그래.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면 내 영역의 힘 일부를 가져다 쓸 수 있을 테고, 거기에 더해 여기 극락종(極樂鐘)을 사용하면 흑마지 안에서 최소한 몸은 보호할 수 있을 터, 그 후엔 적마를 이용해 진마정을 찾아내면 된다.”
적마를 이용한다고 할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했기에 단약과 극락종을 받아든 준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대막리가 조호랑의 눈치를 살피더니 설명을 이어갔다.
“단, 안에서 머물 수 있는 건 삼일이다.”
“삼일….”
“살고 싶다면 그 안에 진마정을 찾아 나와라.”
“만약 찾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준혁의 질문에 대막리가 혀를 찼다.
“쯧. 할 수 없지. 우선 돌아온 후, 몸을 회복하고 다시 들어갈 수밖에.”
사실 대막리가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원래 그는 준혁이 진마정을 찾을 때까지 흑마지에서 나오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흑마지에서 나흘 이상 머물게 된다면 고도로 농축된 암흑기 때문에 몸이 붕괴할 테지만, 자신의 영역으로 보호하는 동안엔 붕괴를 막을 수 있었기에 뒷일은 고려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진마정만 구해 나온다면, 그 후에 준혁이 죽든 말든 전혀 상관할 게 아니었으니까.
대막리는 준혁의 대답에 부연 설명 없이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앞으로 여기 조호랑 수사에게 감사하며 살거라.”
대막리의 말과 행동에서 자신을 놓고 보이지 않은 거래가 있었음을 짐작한 준혁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감사하고 있습니다.”
“운이 좋은 자는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알지 못하는 법이지.”
준혁의 대답에 대막리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이번엔 교휴를 바라보았다.
“너는 근방에 마족 놈들이 다가온다면 흔적도 남김없이 처리하거라.”
“예! 스승님!”
“그리고 조호랑 수사.”
“말씀하시지요.”
“약속대로 나는 살길을 열어주었네. 그대도 약속을 지켜주길 바라는 바야.”
‘역시. 나를 살리는 조건으로 대가를 지불하기로 한 것이구나.’
시종일관 대막리와 조호랑 둘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던 준혁은 살짝 미안함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호의에 보답한다고 영원히 갇혀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 대황대륙에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할 수 없지. 만약 기대를 저버리게 된다면 훗날 갚을 수밖에.’
그녀의 은혜가 빚으로 남을지언정, 당장은 해야 할 일을 먼저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때, 음흉한 눈빛으로 조호랑을 주시하던 대막리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어둠밖에 존재하지 않는 먼 곳으로 세차게 고갤 돌렸다.
그리고는 인상을 구기며 입을 비틀었다.
“진마정을 찾는 건 잠시 미뤄야겠구나.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니, 상황이 녹록지 않겠어.”
잠시 후, 조호랑과 교휴도 누군가의 기척을 감지했는지 눈빛이 변했고, 한참 뒤에야 준혁도 새롭게 나타난 무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
“오랜만입니다. 대막리 수사. 주운대륙에서 마주치고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새롭게 나타난 무리의 선두엔 범인 인족처럼 생긴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평범해 수행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마에 자란 보라색 뿔이 아니었다면 수도자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굳이 좋은 만남도 아닌데, 그때를 기억하시나 봅니다.”
“하하, 어찌 잊겠습니까? 수사 덕분에 꽤 고생했었는데 말입니다.”
“저 역시 덕분에 고생 꽤나 했습니다.”
“뭐라구요? 하하하. 수사는 여전히 재밌습니다.”
웃기지도 않은 얘기에 마족 수사가 배를 움켜잡는 시늉을 하다가, 머쓱한지 헛기침과 함께 자세를 바로 했다.
“크흠. 뭐 좋습니다. 옛이야기를 더 나눠봐야 서로에게 좋을 게 없을 듯하군요. 그럼 주제를 바꿔볼까요?”
“…….”
“대막리 수사. 진마정을 저희에게 넘기시지요.”
단도직입적인 발언에 대막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마정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뒤에 보이는 곳이 흑마지 아닙니까? 다 알고 왔습니다. 진마정만 넘겨준다면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아! 물론 옛일도 전부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말을 마친 마족 수사가 손을 까닥 움직이자, 뒤에 서 있던 수사들이 분분히 흩어지며 대막리 일행을 빙 둘러 포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 대막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한 가지 묻고 싶군요. 도대체 진마정의 존재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하하. 역시 그래야 대막리 수사지요. 얄팍하게 속이느니 당당하게 나와야지요. 제가 어찌 알았냐? 저에게 묻기 전에 수하 단속을 하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대막리 주위 온도가 급격히 하강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는 살기가 유형화되어 주변에 퍼지고 있는 것이었다.
“스승님 말도 안 됩니다! 이 일을 알던 이가 몇 되지도 않습니다! 저자의 말에 현혹되시면 안 됩니다.”
교휴가 급하게 외쳤지만, 대막리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표정으로 차갑게 대꾸했다.
“조용히 하여라.”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마족 수사를 직시했다.
“혹, 중랑입니까?”
이번엔 마족 수사가 움찔하더니 놀란 얼굴을 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오호라. 설마 이곳이 함정은 아니겠지요?”
마족 수사는 대막리를 놀리듯 생글거리며 주변을 휙휙 돌아보는 행동을 취했다. 그리고는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게 둘째 제자를 어여삐 여기지 그러셨습니까? 첫째만 챙기니 이 사달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전부 쳐죽여주마.”
마족들을 쳐죽이겠다는 것인지, 자신을 배신한 제자를 쳐죽이겠다는 건지 모호한 말을 내뱉은 대막리.
그는 어느새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마족 수사를 바라보다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우우웅- 파앙-
그 순간 주변의 기질이 바뀌며 흑마지의 입구를 포함한 일정부분이 전부 영역으로 뒤덮였고, 잠시 후엔 수 킬로 퍼져나가며 마족 무리까지 감싸버렸다.
그리고 마족 무리가 영역에 들어온 순간, 대막리 주위에서 영역분신들이 나타남과 동시에 안개처럼 흩어졌다.
“어딜!”
하지만 영역을 다룰 수 있는 건 그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어느새 마족 수사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영역이 대막리의 영역과 겹쳤고, 마족 분신들이 나타나 대막리의 분신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때, 긴박하게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준혁의 귓가로 대막리의 전음이 전해졌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대를 지원해줄 수 없겠어. 내 도움 없이 혼자 흑마지로 들어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