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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58화 (258/408)

258화. 적지주 (2)

‘사왕? 명왕과 혈전을 벌였다던 그 사왕?’

이곳에 오기 직전 신배의 공간대에서 ‘명왕지처’라 적힌 유적의 지도를 발견했던 준혁은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준혁의 감상과는 별개로 적지주의 설명이 이어졌다.

“대황대륙의 팔황이라 말하면 알아듣겠지? 아주 오래전 사왕이 귀천하기 직전 나에게 자신의 환생체를 찾아주길 부탁했네. 환생체를 찾아 기억을 복구시킨 후 다시금 자신의 부족으로 데려다주라는 뜻이었지.”

“그게 가능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건 영생과 다름없는 일. 준혁은 적지주의 말에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하긴 인연실로 인연을 찾는 것과 크게 다를 리 없겠구나.’

준혁은 자신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경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인연실은 특수한 권능을 지닌 적지주의 능력으로 살아생전 두 사람에게 표식을 남기는 것이었고, 사왕의 경우처럼 아무런 인과가 없이 환생체를 찾는 건 적지주 본인의 권능을 소비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할 때마다 적지주가 받는 ‘반서’가 적지 않았기에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준혁의 생각과 달리 인연실 역시 적지주가 아무렇게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엄연히 한계와 제한이 엄격한 소비형 능력이자 절대 남발할 수 없는 권능이었다.

“가능은 하지만 쉽진 않은 일이지. 다만 무슨 일인지 그를 전혀 찾을 수가 없더군. 마치 나를 피하는 것처럼 말이야. 크흠, 한동안 헤매다 포기하고 말았지만, 막상 세상을 떠나려니 마음에 걸려. 그래서 하는 말이네. 자네가 대신 그를 찾아주게.”

“하지만….”

식검이 적지주를 잡아먹고 준혁이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든다는 건 비밀.

여기서 준혁이 아무렇지 않게 수락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자 받게.”

적지주는 아무런 무늬 없는 검은 반지를 꺼내 건넸다.

“사왕이 남긴 천영보 사신정(死神庭)일세. 이것이 그의 환생체 안에 남은 혈맥을 알아봐 줄걸세. 그 후엔 그를 그의 부족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네. 기억을 되돌리는 건…. 그것까지 바랄 수는 없는 일. 내 부탁은 그것 하나뿐이네.”

‘천영보! 사신정!’

어떤 법기인지는 모르지만, 천영보라는 이름만으로 수사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떤가? 해주겠나?”

준혁은 적지주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제가 태어난 곳에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다.’ 수사가 주신 물건 때문이 아닌, 제 인연을 찾아주신 보답으로 그 부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뭐라? 하하하. 마음에 드는구먼. 어이, 중괴, 이 아이의 말 들었나? 하하하.”

적지주는 준혁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급기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처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친구를 부르고는 같이 웃어줄 걸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결국 중괴라 불린 눈이 서글서글한 노인까지 소리 내 웃자, 그제야 준혁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크게 움직였다.

“좋구나. 좋아!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나겠구나! 가기 전 선물을 주겠네!”

적지주는 후련한 듯 호쾌하게 웃다가 준혁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러자 준혁의 손목에 감겨있던 붉은 실에서 붉은 기운이 빠져나와 적지주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붉은 기운이 빠진 실은 어느새 푸른 실로 변해 있었는데, 그때부터 준혁은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내 죽기 전 비밀을 알려줄까? 많은 이들이 내 인연실을 축복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얻어내려 나에게 소중한 보물들을 바쳐왔네. 하지만 그거 아는가? 내 능력은…. 사실은 저주일세.”

“예에?”

준혁이 진심으로 놀라는 사이.

“내 인연실은 권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의 몸에 기생해 생명을 빨아들이네, 적당한 시기에 인연을 만나 실이 저절로 풀리게 된다면 큰 해가 없지만, 시간이 지나도 이어진 인연과 닿지 못하면…. 점점 말라 죽어가는 것이지.”

‘허. 그럼 내가 여서령을 찾지 않았다면?’

이어진 적지주의 말은 충격이었다.

인연실은 특수한 인과관계에 놓인 사람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더 중요한 용도는 그렇게 연결된 수많은 인연에서 그들의 근원을 조금씩 흡수하는 것.

그것 때문에 적지주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위선경에 가까운 능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다만 그 이상의 경지는 깨달음과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지닌 영력만 계속해서 많아질 뿐 더는 발전이 없다 했다.

‘만약 그 능력을 혈단법에 녹여낼 수만 있다면?’

적지주의 말을 듣는 순간 준혁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혈단법의 흡수 공능으로 만들어 낸 금빛 실에 수행이 올라가며 식검의 흡수능력까지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적지주의 힘까지 하나 되게 할 수만 있다면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흡수능력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흡수 권능으로.

“자 그럼, 이제 나를 보내주게.”

자신의 능력과 준혁이 알아야 할 상황들, 거기에 넘겨준 공간팔찌 안의 중요한 물품들 몇 가지에 대해 설명을 마친 적지주는 평온한 얼굴로 두 팔을 벌렸다.

이제 진정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그 모습에 준혁도 상념을 날려버리고 식검을 소환해 손에 쥐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지켜보던 노인의 눈치를 살피다 소리 없이 식검을 움직였다.

***

적지주를 식검으로 빨아들인 준혁은 중괴라는 노인을 의식해 곧장 식검을 몸 안으로 집어넣었다.

“요란할 줄 알았더니. 그게 다인가?”

중괴는 아련한 눈으로 적지주가 식검에 잡아먹히는 모습을 보다가, 간신히 입을 뗐다.

“그렇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침묵하던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 순간 주변에 넓게 퍼져있던 황금빛 막이 순식간에 수축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스르륵-

콰과쾅!

동시에 천둥소리와 함께 몸을 찢어발길 것 같은 고통이 치밀어 올랐다.

영역이 사라지며 뇌명숲의 뇌기가 생명체에 반응한 것.

‘이 노인의 영역이었구나!’

준혁은 뒤에 서 있던 조말랑의 몸이 활처럼 휘는 걸 보고는 급하게 영역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뇌공지신을 펼쳤다.

“영역 선포!”

그제야 조말랑이 겨우 숨을 쉬는 모습에 준혁은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슬픈 눈으로 적지주가 사라졌던 장소를 바라보던 노인이 처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원하는 바를 이뤘으니, 내 도움은 필요 없겠지…. 진심으로 평온하길 바라네. 잘 가게.”

슬픔뿐 아니라 후련함까지 내포한 노인의 목소리에서 준혁 역시 숙연해졌다.

노인은 자신만의 작별 인사를 마친 건지, 묵념의 시간을 갖다가 준혁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이 노인…. 뇌명숲의 뇌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뇌명숲의 뇌기는 영역이나 보호구가 없음에도 노인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막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내 소갤 안 했군, 나는 중괴라고 하네.”

“저는 최준혁이라 합니다. 어르신.”

상대가 대천경 수사인 대막리보다 높은 수행을 가진 듯했기에 준혁은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그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사실 난 그동안 적지주 그 친구의 부탁 때문에 꽤 괴로웠다네.”

준혁이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자, 노인은 준혁이 꺼내 비행법기 끄트머리에 앉더니 천천히 자신과 적지주의 얘길 시작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말이야….”

같은 마선이었던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더군다나 선마궁과 법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서로의 처지가 더욱 둘을 가깝게 만들었다.

기나긴 삶에서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했고, 어느덧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어갔다.

그러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대립하게 된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적지주 그 친구는 언제나 끝이 있길 원했네. 그래서 언젠가부터 자신의 존재를 지울 방법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지. 하지만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할 리 없지 않겠나? 결국 나에게 부탁을 하더군.”

어느 날, 천휴림의 두 번째 정식 제자위를 받은 좌무란에게 기이한 비술을 얻어온 적지주는 그날부로 중괴와 함께 뇌명숲에 자리했다.

“뇌명숲의 뇌기를 극도로 압축시킬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힘으로 몸을 정화할 수 있다면, 영원불멸한 마선의 삶을 끝낼 수는 없지만, 모든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지.”

“아! 그런 것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물론 아무나 가능한 건 아니네, 그걸 이행하기 위해선 특별한 공능을 지닌 자가 필요했지.”

그게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뇌명숲에 자리한 자는 적지주와 중괴뿐이었으니 말이다.

‘뇌기를 극도로 압축할 수 있는 능력이라?’

준혁은 중괴의 영역이 특별했던 걸 떠올리며 그의 능력을 추론해보았다.

더불어 마선을 정화할 수 있다는 말이 쉽게 얻을 수 없는 중요한 정보란 걸 깨닫고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얼마 남지 않았었네…. 그럼 적지주 그 친구는 나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지. 그때 자네가 등장한걸세.”

“아! 그럼 제가 오지 않았어도….”

“그건 아닐세. 내가 왜 자네에게 고맙다고 했겠는가? 뇌기를 이용한 방법이라? 그래, 충분히 가능은 하지. 하지만 난 천휴림을 믿지 않네. 마선들을 혐오하는 그자들이 적지주 그 친구에게 순순히 비술을 내어주었다는 게 항상 의심스러웠어. 다만 그가 워낙 간절했기에 어쩔 수 없이 도운 거지.”

노인은 모든 상황 설명을 하고 나더니 홀가분한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생각지도 못한 사과를 건넸다.

“조금 전 일은 미안함세. 내 영역의 힘이 그 친구에게 쏟아지고 있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바로 해제한 것이니.”

“아! 아닙니다. 사정이 있으시리라 예상했습니다.”

자신과 조말랑을 위험에 빠트리는 행동에 화가 났었지만, 준혁은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다.

이어지던 상대의 설명에 이미 그의 수행을 어느 정도 확신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순간,

츄악-

단(丹) 속, 원영의 손에 쥐어져 있던 식검이 맹렬히 요동치더니 준혁의 허락 없이 스스로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이, 이게 무슨! 돌아와!’

준혁은 서둘러 영력을 움직여 식검을 불러들였지만, 마치 준혁의 명령 따위는 안중에도 없단 듯 행동했다.

체외로 튀어나온 식검은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다가 비행법기를 벗어나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노인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팔짱을 끼고 사태를 지켜보았다.

그사이 바닥과 충돌한 식검은 반발력에 한 번 튀어 오르더니 허공에서 엄청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동시에 반 토막 난 대검처럼 생긴 널찍한 식검의 검신 위로 적지주가 능력을 발휘할 때 보였던 핏빛 거미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거미줄은 검신을 뒤덮더니, 증식하듯 획을 늘려나갔고, 잠시 후엔 식검 전체가 핏빛 그물망에 걸린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변화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준혁이 의지를 내비치며 식검을 조종하려 애쓰는 사이, 식검의 검신을 가득 메웠던 거미줄이 점차 형태를 갖추면서 원형으로 변해갔다.

“저건!”

그 현상에 중괴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이자, 준혁 역시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많은 줄로 뒤덮인 원형 형태로 변해가던 핏빛 거미줄은 하나의 괴이한 문양으로 완성됐다.

문양은 가운데가 텅 비어있는 도넛 모양이었는데, 그 안을 채우고 있던 수많은 거미줄이 시곗바늘처럼 질서정연하게 변하더니 정확히 108개의 선이 되었고, 그 끝에 알 수 없는 문자가 나타났다.

“마선경!!”

노인은 그 문양을 알아본 듯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식검의 검신에 생겨난 문양의 중심에 흐릿한 핏빛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건 준혁도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마선경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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