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소화여 (1)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소우자의 딸이었다. 두꺼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전신을 검은 천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특정 종교가 떠오르게 두 눈만이 확인 가능했는데, 미간 사이와 콧등 위의 피부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곪아있었다.
‘외모 때문에 온몸을 가리고 있는 것인가?’
준혁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아니라 판단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는 하지만 전왕문의 문주도 꽤 많은 초연단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보다 세력이 큰 묘립성의 성주가 딸을 치료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여인의 수행은 소천경. 준혁보다 살짝 앞서있는 상태였다.
그 말인즉 어떤 상태가 되었든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인의 등장에 소우자는 헛기침한 후, 성문 너머로 손짓하며 중괴를 종용했다.
"화여까지 보셨으니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선사께서 목숨을 살려준 이 아이를 모른 척하실 겁니까?"
"끙."
중괴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썼지만, 한편으론 여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살피고 있었다.
‘목숨을 살려줘? 그럼 은인이 아닌가? 헌데 왜 꺼리는 것처럼 보이지?’
잠시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중괴가 소우자의 뒤를 따라 성문 안쪽으로 이동하자, 준혁과 태식도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성문 안쪽으로 펼쳐진 세상은 이곳이 진짜 사람들의 거주지임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2층 3층으로 이루어진 목조건물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중간중간 석재로 만들어진 건물도 눈에 띄었다.
태식은 익숙한 듯 조용히 뒤를 따르며 준혁이 궁금증을 표할 때마다 건물의 용도나 그 안의 사정을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저곳은 법기 감별소입니다."
"법기 감별? 그게 무슨 뜻인가?"
법기란 영력을 주입하면 기본적인 성능과 사용 방법을 자연히 습득할 수 있는 물건. 그것을 감별한다는 건 일반인들이나 할법할 소리였다.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준혁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소화여가 설명을 이어갔다.
"법기란 건 주관적인 가치를 매기기가 참으로 어려운 물건이죠. 어떤 이에겐 다시 없을 보물이라도 또 누군가에겐 쓸모없는 것일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감별소에서는 기능을 제외한 법기가 품은 영기 총량을 측정해 가치를 매기는 일을 한답니다."
"그 말은 성능과 상관없이 영기 총량만 높다면 더 고가에 거래된단 말입니까?"
"이해가 가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어차피 저곳을 이용하는 자들은 대부분 저급 수사들. 당연히 통용되는 법기도 최하급이나 하급 물품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이해가 가실 거예요."
"아!"
숨은 기능이 있는 물건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고 의문을 가지던 준혁은 여인의 말에 절로 납득이 갔다.
최하급 물건에 특별한 기능이 담겨 있진 않을 터.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계산 방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도 지금껏 본 적 없는 용도의 건물들이 나타나면 태식과 여인이 번갈아 가며 설명해주었고, 그것은 기나긴 길을 걷는 내내 계속되었다.
***
"어르신 먼저 안으로 드시지요."
성내의 다양한 건물들을 지나 탑처럼 생긴 건물 앞에 이르자, 소우자가 옆으로 비켜나며 중괴를 선두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바로 움직이며 준혁과 나머지 일행도 탑을 올라 정상으로 향했다.
‘밖에서 볼 땐 수십 층은 돼 보였는데, 겨우 이 층에 불과하다니.’
탑처럼 생긴 건물은 겉만 화려했지, 내부는 단순했다.
수십 미터 높이를 지닌 1층을 지나자 평범한 거주공간이 나타났다.
중괴를 상석에 앉힌 소우자는 그 옆에 자리했고 여인이 쪼르르 걸어가더니 중괴 옆에 앉았다.
뒤늦게 도착한 준혁과 태식이 차례대로 남은 자리에 착석하자, 기다렸다는 듯 중괴가 소우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리 말했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네. 화여 일이라면 다음에 다시 얘기하게."
중괴가 이토록 단호하게 나올지 몰랐는지, 소우자는 크게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것이었구나.’
두 사람의 대화에서 준혁은 [보은] 명단에 적힌 소우자와 적지주의 관계를 알 수 있었다.
소우자의 딸인 소화여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좋질 않았다. 이유 모를 증상으로 온몸에 화기가 가득했고, 어떤 방법을 써도 화기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던 것.
하지만 딸을 지극히 사랑하던 소우자는 치료를 포기할 수 없었고, 급기야 자신이 익힌 모든 걸 포기하고 이름난 빙공 계열의 공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오직 화기를 억눌러 딸이 정상적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만으로.
‘아비의 마음이란 말인가.’
준혁은 경험한 적 없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 역시 동생을 치료하기 위한 일념 하나로 살아갔던 날이 있었으니.
빙공을 익힌 소우자는 그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실력은 일취월장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엄청난 세력을 일구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소우자의 능력으로 딸의 병을 고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소화여는 누가 도와주지도, 스스로 노력하지도 않고 점점 수행이 올라갔고, 그와 더불어 몸 안의 화기마저 더욱더 강력해지고 말았다.
결국, 소우자가 선택한 건 적지주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딸을 그냥 볼 수 없었기에 이번 생의 인연은 포기하지만, 다시 태어날 딸을 만나기 위해서.
헌데 일은 이상하게 해결돼 버렸다.
적지주와 함께 있던 중괴가 자신의 능력으로 냉기를 한곳으로 압축시켰고, 그것을 소화여에게 주입함으로써 병을 낫게 만들었다.
그래서 소우자가 [보은] 명단에 올라가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소우자가 지금 중괴에게 극진히 예를 다하며 허릴 숙이는 이유는.
"어르신,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최소한 천 년은 버틸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보시면 아시겠지만 벌써 이 아이의 화기가 다시 흉악한 힘을 드러내는 중이옵니다."
소우자의 말에 지금껏 모습을 가리고 있던 소화여가 얼굴의 검은 천을 풀어냈다.
그러자 화상을 입은 것처럼 여기저기 파이고 고름이 가득한 피부가 드러났다.
‘흐음….’
사쿠라의 의자매인 사유리의 모습과 흡사함에 준혁은 침음을 삼켜야 했다.
‘그때 그 아이는 목기가 문제가 됐었지? 그걸 목족의 공법으로 억누르니 해결되었었는데.’
하지만 그런 단순한 것을 소우자나 다른 고위수사가 모를 리는 없는 일.
준혁은 조용히 그녀를 살피며 생각을 이어갔다.
그때, 중괴가 자리를 박차며 몸을 일으켰다.
"에잉! 이럴 줄 알았지. 내 바쁘다 말하지 않았더냐? 하루 이틀에 할 수 있는 일이면 내가 이 아이를 모른 척했겠냐 이 말이다! 그리고 그때도 내가 말했지? 기억나나?"
"예…. 화기를 억누를 수 있는 건 같은 삼대지력인 월광과 성광뿐이라고…."
"그래! 기억하는구나? 헌데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느냐? 네 딸아이 몸속의 태양지력은 스스로 증식하고 있다고 말이다!"
중괴가 어울리지 않게 짜증을 내자, 주변이 침묵에 쌓인 것처럼 조용해졌다.
평소에 할 말 다 하던 준혁마저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중괴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았다.
‘시간은 핑계이고,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니 화가 난 것이구나.’
평소 중괴의 성격을 볼 때, 가엾은 여인의 상태를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할 게 뻔하니 애초에 회피하려 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런 준혁의 예상이 맞듯 중괴는 소화여를 바라보며 탄식을 뱉었다.
"화여야."
"예, 어르신."
"그땐 네 아비가 평생을 모은 냉기와 적지주 그 친구가 가지고 있던 빙정을 이용했기에 네 몸속의 태양지력을 누를 수 있었단다. 하지만 이젠 힘들다. 네 수행이 올라감에 따라 점점 더 강해져 가는 그 힘을 억누르려면 순수한 월광지력이 아니면 절,"
그때 말을 잇던 중괴가 갑작스레 멈칫하더니 잠시 후에 목이 고장 난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 어르신?"
그리고는 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다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입을 벌리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았구나!’
그 모습에 모두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중괴에게 시선을 집중했지만, 준혁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숨어서 지켜보던 중괴 앞에서 월광지력을 사용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멀리서 유심히 관찰하지 않았으니 그저 빙공 계열의 공법이라 여길 수도 있는 일.
하지만 중괴의 눈빛을 보니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중괴가 입을 열었다.
"애송아."
"예, 어르신."
"네놈이 그 잡놈들을 상대하며 사용했던 힘을 지금 보여줄 수가 있느냐."
아니요, 라고 말하면 뒷수습이 불가능할 걸 알기에 준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실히 느껴지는 중괴의 감정을 볼 때, 그가 소화여라는 여인을 꽤 아끼고 있음이 틀림없었으니까.
"예상하신 것이 맞습니다."
주변을 한 번 훑은 준혁은 부담스러운 눈빛에 덤덤히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손끝에서 하얀 서리가 일어나며 파동을 일으켰고, 파동은 퍼지는가 싶더니 손안으로 끌려왔다.
그리고는 하얀 구슬 형태로 단단하게 모여들자, 주변 온도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한기는 빙공 계열을 극한까지 익힌 소우자마저 입을 떡 벌리게 만들었다.
***
"서, 설마…. 이것이 월광지력?"
지독히 차갑고 감정표현이 없던 소우자가 말을 더듬은 걸 보면 진심으로 경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찌 그러지 않으랴?
중괴의 말에 따르면 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는데.
준혁은 손위에 뭉친 월광지력을 가볍게 털어내 중괴에게 날려 보냈다.
"이것입니다."
허공에 둥둥 떠 날아오던 하얀 구슬은 중괴의 얼굴 앞에 이르더니 의지를 가진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하얀 냉기를 발출해 누구나 느낄 수 있게 힘을 발휘했다. 그 와중에 준혁의 조종으로 외부에 해를 끼치지 않았기에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게 했다.
"진짜 월광지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중괴는 월광지력으로 만들어진 구슬을 직접 만지지 않고 주위를 가볍게 휘저어 냉기를 모았다.
그리고는 그 기운을 음미하듯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월광지력이 삼대지력이라고는 하나 저렇게 놀라워할 일이란 말인가?’
선계에 처음 올라왔을 때 만났던 노인의 말에 의하면 수행을 상승시키기 위해 천년수와 적유목을 이용한다고 했었다.
천년수는 월광지력의 근원이 되는 나무이고, 적유목은 태양의 힘을 품은 나무.
즉 두 가지 힘은 귀하긴 하지만, 많은 선인이 보유한 능력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준혁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나무가 500년간 모아온 월광지력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준혁과 달리, 선계에서는 정제 과정을 거친 천년수와 적유목을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순수한 힘을 보존하는 건 어려운 일.
즉 시작은 월광지력과 태양지력이지만 정제 과정을 거치며 전혀 다른 힘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럼 그걸 선계에 선인들이 모를까?
그건 아니었다. 그들도 정제 과정 중 두 가지 삼대지력이 쓸모없게 변하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월광지력이든 태양지력이든, 생명체가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었다.
천휴림의 대막리조차도 삼대지력 중 하나인 성광지력을 주 힘으로 사용했지만, 준혁처럼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사용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세세한 선계의 상황을 모르는 준혁이 의문을 이어가는 사이.
소우자가 중괴 앞에 떠 있는 구슬에서 시선을 떼며 준혁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냉혹한 얼굴로 마치 명령하듯 입을 열었다.
"자네 필요한 것이 있는가?"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엇이든 주겠네. 원한다면 성주 자리도 내어주겠네."
"......"
"그러니, 내 딸아이와 평생을 함께해 주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