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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73화 (273/408)

273화. 자휴궁(紫庥宮) (1)

듬성듬성 보이는 범인들의 논밭과 종류를 짐작기 어려운 식용나무들이 늘어선 들판 위.

임주성을 조용히 빠져나온 일행은 준혁의 비행법기에 올라타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목적지는 임주성의 동쪽에 자리한 자휴궁.

4대 종문 중 비경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곳이었다.

"자휴궁 수사들의 도움을 받아 비경으로 향할 생각이십니까?"

하늘을 가르던 중, 문득 궁금함에 준혁은 중괴에게 질문했다.

언뜻 보기엔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중괴의 선택이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과연 다른 종문의 힘을 빌리는 게 현명한 선택인가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비경을 차지하려 준비 중인 자휴궁이 중괴와 손잡는 걸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진선경 수사까지 존재하는 거대 세력과 손잡는 건 아무래도 위험이 따랐다.

준혁이 소우자나 무명의 개인적인 무력을 빌리려고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준혁의 질문에 중괴는 그럴 리 있겠냐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그곳이 진짜 공천귀의 거처라면 아무리 갚아야 할 빚이 있다 한들 우리를 대가 없이 끼워주기나 하겠느냐? 아무리 부궁주와의 친분을 들이민다 해도."

‘그래,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지.’

준혁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반문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규마 그놈은 굉장히 교활한 놈이니, 후일 네놈이 도움받기도 힘든 것이 분명한 일. 그러니 내가 직접 찾아가 보은의 대가로 비경에 대한 정보만 얻어올 생각이다."

"아!"

"그 후에 4대 종문이 싸우든 말든 알게 무엇이냐?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우린 적마의 능력으로 흐흐."

평소에도 진중하지 못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음흉해 보이는 중괴의 모습에 준혁은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어차피 위험한 일은 내 차지라 그거겠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상상이 갔기에, 준혁은 쓰게 웃으며 비행 법기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비행법기의 속도를 올리기 위해 영력을 조절하는데, 중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놈의 도움을 받아야 하거늘 꺼리는 것 같아 말하는데, 사실 나는 공천귀와 친우사이다."

중괴의 느닷없는 말에 준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후, 준혁이 경청하겠다는 자세를 취하고, 소화여와 태식이 귀를 쫑긋 세우자, 중괴의 설명이 계속됐다.

"하지만 그의 거처를 찾는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지."

말문을 연 중괴는 오래된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이, 목소리를 무겁게 깔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중괴는 오래전 선마궁과 마찰을 빚었는데, 그때 자신의 중요한 물건을 강제로 빼앗겼다고 말했다.

선마궁의 궁주인 천신라가 중괴의 물건을 파괴하라 명했지만, 친우인 공천귀가 그걸 말렸고, 결국 그의 물건은 공천귀가 전담하게 되었다는 얘기.

즉 중괴가 비경을 찾아가려는 이유는 그 안의 금은보화 따위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물건을 찾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는 내 물건만 찾으면 된다. 나머지는 네 녀석이 가지든 버리든 알아서 해도 된다."

‘물건이라? 설마 본명기라도 빼앗긴 건가?’

수행이 올라갈수록 법기 사용이 줄어들고, 본신의 능력과 의지력이 더욱 중요했다.

하지만 평생을 몸속에서 배양해야 하는 본명기라면 중요도가 차원이 다른 문제.

준혁이 식검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어차피 적마의 힘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건 준혁뿐. 비경 안이 어떤 환경일지는 몰라도 결국 중요한 일은 자신이 도맡아야 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랬기에 준혁은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 순간, 중괴의 몸에서 미세한 파동이 흘러나왔고, 잠시 후, 그의 두 눈이 불타오르듯 금빛 광채를 뱉어냈다.

화악-

"아…."

하지만 갑자기 변한 중괴의 두 눈은 정상은 아니었다.

한쪽은 어마무시한 힘을 담은 금빛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한쪽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내 눈. 빌어먹을 천신라에게 빼앗긴 내 한쪽 눈을 찾는 게 네가 해야 할 일이다."

***

중괴의 정확한 수행을 알진 못했지만, 황금빛 눈이 나타난 순간 준혁은 자신이 개미보다 하찮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전해 받았다.

중괴가 위선경 수사들은 압살할 때 느꼈던 압도감보다 더 강렬했고 전율적이었다.

‘이게. 진정한….’

지금 이 순간, 중괴가 ‘죽어라’라고 명한다면, 스스럼없이 식검을 소환해 자신의 목줄을 끊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것이 진정한. 의지….’

상대방의 말이 세상의 법칙이 될 것 같은 느낌에 준혁은 하염없이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려야 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한 것처럼.

"애송아 그 눈빛은 뭐냐? 존경의 눈빛이냐?"

"그, 그, 그렇…. 습니다."

준혁은 이를 악물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자 중괴가 신기하다는 듯 입가를 호선으로 만들었다.

"제법이구만. 근데 이런 것 가지고 놀라면 쓰나? 한때는 더 잘나갔는데."

스아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괴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주변의 기운이 한순간에 바뀌었고, 그제야 태식과 소화여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흐에엑."

"켁켁. 어, 어르신."

준혁이 중괴의 말에 대답한 것과 달리, 황금빛 눈이 드러난 동안 두 사람은 아예 숨도 쉬지 못한 것이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내 의지력 따위는 한낱 깃털보다 가벼운 것이었어.’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모르지만, 이 순간 준혁은 자신이 추구해야 할 강함을 조금이라도 엿본 기분을 느꼈다.

영역 싸움이란 결국 의지력의 표출.

결국 법기 따위에 의존하는 싸움은 압도적인 의지력 앞에선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에 깊은 한숨이 나왔다.

‘갈 길이 정말 멀구나…. 이런 강자의 횡포 앞에서 내 의지를 곧 세울 수 있는 날까지 정진하자.’

추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강함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경지라는 건 잡히지 않는 먼 미래의 일. 준혁은 헛된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빠르게 상념을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만약 비경이 공천귀의 거처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나눈 후, 다시 비행법기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직후, 영력을 최고조로 올렸고, 법기는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

비행법기를 최고속도로 유지하길 한 달.

수십 미터에 이르는 자색 나무가 드문드문 보이자, 중괴는 준혁에게 법기 하나를 받아 갔다.

"금방 다녀오마."

그리고는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중괴가 사라진 후, 준혁은 비행법기를 회수한 후 지상으로 내려갔다.

"이래서 자휴궁이구나."

자줏빛 그늘의 궁전이란 이름답게 곳곳에서 자색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본문 가까이 가면 오직 자색 나무만 존재해 괴기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아름답다 했다.

준혁이 자색 나무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자, 인근에 내려섰던 소화여도 냉큼 가까이 다가왔다.

"저도 소문으로만 들었지. 자휴궁의 자강목(紫强木)은 처음 보네요."

자색 나무 자강목이 보이면 그때부턴 자휴궁의 구역이라는 말이 있었다.

명심해야 될 건, 누구라도 자강목을 베어가거나 훼손하는 순간, 자휴궁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란 것.

"소저도 말이오?"

"살아온 날이 길면 뭐 하겠어요? 항상 죽음을 걱정하며 아버지의 그늘에 숨어 살았는데. 사실 이렇게 멀리 나온 건 처음이랍니다."

"허어…. 그럼 그 긴 시간 동안 성내에만 머물렀단 말입니까?"

"네. 슬프지만 그래요."

사실 소화여가 말하지 않는 게 있었는데, 그녀는 외출을 할 수 없는 몸이었다.

지금이야 소천경에 이르러 영역으로 화기를 완벽히 차단할 수 있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주위에 사람이 머물 수도 없었고, 심지어 동식물도 타들어 가는, 말 그대로 재앙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왠지 그녀에게서 여동생에게 느꼈던 짠함을 느낀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앞으로 나와 함께 하며 많은 곳을 둘러보시오. 머나먼 미래의 여정까지는 알 수 없으나, 우선은 천운대륙을 넘어 남운대륙까지 가야 하니. 꽤 긴 여행이 될 테니까."

무리한다면 음속을 이중으로 돌파할 수 있는 준혁이 최고속도로 이동한다 해도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장거리 이동.

물론 초장거리 전송진을 이용해 훌쩍훌쩍 뛰어넘겠지만, 긴 여행이란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대인과 함께요? 그러도록 할게요."

‘응?’

준혁은 자신이 강조한 것과 상대방의 대답이 미묘하게 어긋남을 느꼈지만, 굳이 정정해주진 않았다.

그녀를 오랫동안 돌봐줄 생각이 있었으니 그것 역시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대인께선 자휴궁이 왜 자강목을 소중히 하시는지 아시나요?"

"왜 그러는 겁니까?"

준혁이 평소에도 궁금한 것은 바로바로 물어보던 걸 떠올린 소화여는 목을 가다듬더니 설명했다.

"바로 천하 일절로 알려진 자휴궁의 자하공법을 익히는 데 있어 자강목이 필수라 그렇답니다."

"설마 목기를?"

"맞아요. 목족을 제외한 대부분 종족이 목기를 받아들이기 힘든데, 자강목을 이용한 자하공법은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고 아버지께 들었어요."

목족이란 말에 아마르곤이 떠올라 씁쓸해진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아마르곤 수사…. 부디 무사히 버텨내야 합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나, 그때까진 반드시.’

순간 얼마 전 느꼈던 중괴의 압도감에 막막해졌던 감정까지 떠오르며 빠른 시간 안에 수행을 올려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아로새겨졌다.

그때 시선을 내린 준혁의 시야에 소화여의 손끝이 들어왔다.

아무렇지 않아 하는 얼굴과 달리,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금단현상을 겪는 약쟁이처럼.

‘아! 소우자가 하루에 한 번씩 냉기를 주입했다고 했지!’

그제야 준혁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환자나 다름없는 그녀를 방치했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되면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 그녀가 너무 편한 모습으로 함께했기에 당장 터질지도 모르는 시한폭탄이란 생각을 못 한 것이었다.

"소저? 혹 견디기 어려우신 겁니까?"

준혁의 시선이 자신의 손끝에 머물러있음을 눈치챈 소화여는 냉큼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아니에요. 아직은 견딜만해요."

그녀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법.

준혁은 기감을 유형화시켜 그녀를 살폈고, 말과 다르게 몸을 둘러싼 영역을 넘어 열기가 미약하게 새어 나옴을 알 수 있었다.

‘진작 말을 할 것이지. 어째서?’

월광지력이 한번 사용할 때마다 소비되는 힘이란 건 함께 있던 소화여도 알고 있는 사실.

‘설마 나를 배려한 것인가?’

‘그녀는 나를 믿고 등불까지 처리했, 아!! 그래서 그런 것이구나!’

그 순간 준혁은 그녀가 등불 법기를 부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약 소우자와 연결된 법기가 존재했다면 그녀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게 그에게 전해졌을 터.

소화여는 처음부터 이러기 위해 법기를 부순 게 틀림없었다.

잠시 후, 생각을 마친 준혁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고, 손은 그녀의 심장이 자리한 곳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대, 대인."

준혁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소화여가 움찔했다.

"가만히 있으시오.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어르신이 오면 안전한 곳에서 해결해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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