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자휴궁(紫庥宮) (2)
종이 한 장만큼 가까운 거리.
소화여는 준혁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영기파동에 질끈 눈을 감았다.
비록 직접 피부에 닿진 않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남자의 손길이 신체에 닿을락 말락 했기에,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더군다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처음이야….’
마치 준혁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녀는 남자는커녕, 평생토록 사람 혹은 동물조차 가까이해보질 못했으니 신체적 접촉이란 걸 상상만 해도 솜털이 서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부끄러움에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비록 검은 천에 싸여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때 감미로운 목소리가 소화여의 귓가를 스쳤다.
"영역을 제거하시오."
‘영역을? 그렇게 한다면 주위가….’
불바다, 아니 불지옥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준혁이 거듭 요구하자 소화여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감싸고 있던 영역을 제거했다.
화악-
그 순간 태양의 열기가 주위로 확산됐다.
‘아! 너무 상쾌해! 상쾌? 어?’
샤아아-
태양지력에 주위 나무를 비롯해 모든 게 타버릴 거란 걱정도 잠시. 준혁을 중심으로 일정 공간의 온도가 급하강했다.
그리고는 소화여가 생각지도 못한 상쾌함에 두 눈을 뜬 순간.
쩌저정-
"이, 이게…. 세상에나!"
그녀의 몸이 심장을 중심으로 얼어가기 시작했다.
***
어릴 때부터 소화여 곁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지력이 스스로 발화했다.
그때부턴 하루하루가 치열한 전쟁이었고, 또한 지옥이었다.
아비마저 평생 수련한 공법을 바꿔야 할 정도로 그녀의 상태는 심각했고, 가까이 존재하는 모든 걸 태워버렸다.
남들은 강해지기 위해, 아니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수련을 한다면, 소화여는 반대로 태양지력을 억누르기 위해, 그것이 스스로 성장하는 걸 방해하기 위해 수련을 했다.
평생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살아야 할 줄 알았다.
수십 겹의 결계로 방어된 방에서, 냉기가 담긴 단약을 약처럼 먹으며 처참하고 처절하게.
그러다 결국 끝은 다가왔고, 결국엔 영역의 힘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태양지력은 강력해져만 갔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었는데….’
그랬는데, 그를 만났다.
처음엔 자신을 치료해준 어르신을 만나기 위한 행보였지만, 그곳에서 이상한 끌림이 느껴지는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평소 누군가의 곁에 다가가는 걸 끔찍이 싫어했지만, 이상하게 그의 곁으론 발길이 갔다.
그래서 성내의 이것저것을 설명했고, 자신의 행동에 아버지마저 놀랐는지 여러 번 힐끔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가 월광지력을 지녔다는 말에 스스로 이해할 수 없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살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에게 끌렸던 거야.’
끝이 없이 넓은 중천 아래, 셀 수 없이 많은 선인이 있다지만, 그중 자신의 태양지력을 견딜 수 있는 그리고 약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소화여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그 존재를 느끼고 다가갔던 것이었다.
샤아아-
‘아! 이런 게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청량? 청아? 그런 단어로 표현되는 감정일까?’
처음 느껴보는 서늘하고 차가운 감각, 피를 관통하듯 온몸을 식혀주는 청량감에 소화여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얼어붙어 가던 몸은 서서히 원상태로 돌아가며 기묘한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주르륵-
그리고 흐르는 눈물에 또 한 번 왈칵 설움이 복받쳤다.
‘내가 눈물을 흘리다니.’
지금껏 울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수십 번 수백 번 울어도 눈물 따위는 태양지력 앞에 수증기조차도 남기지 못했었다.
눈물 흘리는 게 사치라 여겼는데, 이렇게 행복한 감정인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때, 한없이 차가운 감각에 익숙해질 때쯤, 소화여는 문득 자신의 피부층에서 느껴지는 열감마저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느꼈다.
‘설마!’
조심히 손을 올려 유일하게 드러난 미간과 그 주위를 스치듯 만져보았다.
‘매끄러워!’
매끄럽다는 말,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평생 화상을 입은 것처럼 울퉁불퉁 고름이 말라붙은 듯했던 피부.
재생하면 일그러지고 다시 재생하면 변형이 왔던 못난 감촉과는 차원이 다른 부드러움이었다.
순간, 소화여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잡아당겼다.
마침내 얼굴을 양손으로 더듬고는 결국 환희에 찬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아!!"
결국 또 한 번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한편, 준혁은 눈앞의 여인이 얼굴을 만지든 탄성을 지르든 신경도 쓰지 못할 만큼 내부에 집중한 상태였다.
월광지력이 침투해 죽을 뻔한 경험이 있던 준혁은 삼대지력을 다루는 데 제법 능숙하다 자부했다.
그랬기에 마족 수사에게 성광지력을 모을 수 있는 법기를 얻었을 때도, 미약하지만 그것에서 천천히 성광지력을 뽑아낼 수 있었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에 심장에서 직접 힘을 발현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쓰고자 마음먹고 움직였다.
‘처음엔 가볍게.’
그렇게 그녀의 심장 바로 앞에 손을 들이밀고 월광지력을 천천히 주입해 태양지력에 맞서게 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소화여의 상태는 순식간에 호전됐고, 심지어 월광지력의 낭비도 극히 적었으니까.
하지만 준혁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정반대 성질을 가진 월광지력과 태양지력이 만나 서로 상쇄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두 기운은 만나자마자 서로 잡아먹을 듯 달라붙기 시작했다.
‘증식한다!’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월광지력이 태양지력의 힘 일부를 잡아먹고 몸집을 키우면, 태양지력이 힘껏 반항해 월광지력 일부를 잡아먹고 힘을 부풀렸다.
그렇게 두 힘이 이상 반응을 보이자 준혁은 재빨리 꼬리물기를 시작한 두 힘을 자신의 몸으로 끌고 왔다.
증식의 승자가 누가 되었든 간에, 소화여는 어떤 힘도 감당하지 못할 건 뻔했으니까.
만에 하나 준혁이 의도한 것과 달리 월광지력이 너무 강력하게 증폭해버리면 자신이 천년수 아래서 겪었던 고통이 재현되는 것이었고,
반대로 태양지력이 증폭해버리면 그건 그녀의 생명을 더 빨리 갉아먹는 일이 될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이건 또 무슨!’
융합하듯 서로를 잡아먹던 두 힘이 준혁의 몸으로 넘어오자 이번엔 또 다른 힘이 얼씨구나 하고 움직였다.
그동안 법기에서 조금씩 흡수하고 있던 성광지력.
그것이 두 힘 사이의 줄다리기에 끼어들더니 서로 잡아먹기를 하던 두 힘을 양쪽으로 견제하며 미묘한 배치를 유도했다.
그리고 그 순간.
찌르르-
새로운 힘이 몸 안에 들어오자 예의 주시하고 있던 원영이 식검을 삼키며 혈단법을 운용하듯 합장을 했다.
촤르륵-
그러자 놀랄 일이 발생했다.
서로 물어뜯기만을 반복하던 월광지력과 태양지력, 그리고 성광지력이 원영의 신호에 맞춰 단(丹) 주위로 날아가 원영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시에 단 아래로는 검을 구슬이 나타났고, 단 위로는 빨간 구슬이 나타났다.
‘암흑마기와 정혈!’
마치 마름모 형태의 정팔면체 구도를 그리며 움직이는 다섯 가지 기운.
차분히 살피니, 삼대지력이 회전하며 공명하고 있었고, 암흑마기와 정혈은 그것을 견제하듯 원영과 본체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준혁은 원영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며 다섯 가지 힘의 변화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저 밀고 당기기가 아니다!’
그때 계속해서 회전하던 삼대지력이 변화를 일으켰다.
가장 나중에 합류했고 기운이 약했던 태양지력이 조금씩 소멸하더니 증발하듯 날아가 버렸고, 정확히 그 정도의 양만큼 성광지력과 월광지력도 사라졌다.
그 순간 원영이 합장했던 손바닥을 천천히 떼자, 양 손바닥 사이로 찬란한 빛을 품은 은빛 구슬이 나타났다.
그리고 은빛 구슬이 만들어진 순간, 할 일을 끝마쳤다는 듯 암흑마기와 정혈이 원래의 자리를 찾아 흩어졌고,
잠시 후 월광지력과 성광지력도 더는 상대할 놈이 없다는 듯, 몸을 휘돌다 다시 가라앉았다.
‘설마 삼대지력이 하나 된 건가?’
준혁은 조마조마했던 과정이 끝나자 조심스레 원영의 의지를 움직였다.
그러자 원영이 양 손바닥 안에 모여든 구슬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찰나의 순간, 준혁은 은색 구슬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원영이 소중히 품고 있는 은색 구슬.
그것은 예상대로 삼대지력이 하나 된 힘.
의지에 따라 월광지력으로도, 태양지력으로도, 심지어 성광지력으로도 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준혁을 놀라게 한 건 바로 공명을 끝낸 힘의 크기.
그것은 각각 소비된 세 가지 힘의 총량보다 정확히 세 배 가까이 되는 힘이었다.
즉 융합을 끝낸 삼대지력은 세 배나 강력해진 것이다.
***
‘아! 아쉽구나!’
삼대지력이 하나 된 힘을 여실히 느끼며 관찰하던 준혁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떤 힘으로도 변화하는 은색 구슬을 보고 혹시 무한히 증폭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은색 구슬을 즉시 태양지력으로 치환해 몸 안의 월광지력과 성광지력을 끌고 와 융합을 유도했다.
하지만 결과는 꽝.
한번 융합을 마친 삼대지력은 어떤 힘으로도 변화는 가능했지만, 더는 융합과정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즉, 융합과정을 통해 3배로 힘이 늘어나는 작업은 순수한 삼대지력의 공명 과정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더 욕심내면 그게 도둑놈이지.’
다만 준혁의 미래는 밝았다.
이미 몸 안의 충분히 자리한 월광지력, 거기다 무한히 태양지력을 만들어내는 소화여. 마지막으로 하계에 존재하는 성광지력으로 유지되는 신비경들.
앞으로 삼대지력을 증식시킬 방법이 눈앞에 있었기에 전혀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세 힘이 하나 된 거니 삼원지력?’
준혁은 내면을 둘러보던 일을 마치자, 뜬금없이 작명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이름을 짓기도 전, 그제야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여인 때문이었다.
"아니, 왜 울고…. 그러고 보니 가리개를."
눈물 콧물 된 여인은 너무 아름다웠다.
징그럽게 일그러져있던 피부가 사라지자, 선명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맵시가 살아나면서 도도하고 선한 모습이 교차하는 절색의 얼굴이 드러난 것.
사쿠라와 비견될 정도로 아름답게 변한 소화여는 살짝 웃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남성의 마음을 뒤흔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준혁은 상대방의 태양지력이 잠잠해지면 자연스럽게 몸 상태가 호전될 걸 알았기에, 변화한 그녀의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선인이란 오행과 몸의 균형이 바르게 잡혀 미남 미인이 많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으니까.
털썩-
"대인. 이 은혜. 평생토록 갚겠습니다. 대인께서 저를 필요 없다 하셔도 죽는 날까지 보필하겠어요."
"아직 완치된 게 아닙니다. 잠시 호전된 거지 앞으로도 꾸준,"
준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 소화여는 몸을 수그린 자세로 고개를 양옆으로 세차게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도 바보는 아니랍니다. 무한히 증식하는 제 힘을 영원히 억누를 수는 없겠죠. 그러니 완치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런 감정을, 이런 행복을 한순간만이라도 느끼게 해주신 것…. 그것 하나만으로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흠, 우선 일어나시지요."
여인의 마음을 이해하긴 한 걸까?
준혁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서 얘기하시지요. 과례는 불편합니다."
"과례라니요? 대인께선 제 생명은 물론 제 삶을 바꿔…."
스아악-
그 순간 두 사람이 서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공간이 갈라지며 엄청난 영기파동이 퍼져나갔다.
손을 내밀던 준혁과 고개를 흔들던 소화여는 그곳에서 퍼진 영기파동에 깜짝 놀라 급하게 태세를 바꾸며 몸을 움직였다.
그사이, 공간이 갈라진 곳에서 중괴가 모습을 드러내며 급하게 소리쳤다.
"애송아! 당장 움직여야 한다! 빨리 저 녀석을 챙기거, 에잉 빌어먹을 늙은이가 벌써!"
중괴가 태식을 손가락질하며 명령을 내리려는데 하늘 높은 곳에서 또 다른 영기파동이 퍼지며 목족의 공간 이동진과 비슷한 문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중괴가 손을 휘젓자 태식이 지푸라기처럼 날아와 바닥을 굴렀다.
"커억. 어, 어르신 갑자기 왜?"
"설명할 시간 없다! 귀찮은 놈이 따라붙었으니 우선 피하고 얘기하자."
하지만 중괴의 말은 실현되기가 어려웠다.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 이미 공간 이동진 너머로 거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발을 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