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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29화 (329/408)

329화. 백랑족으로 (2)

굳이 기세를 퍼트리지 않음에도, 교천묘에게서 느껴지는 파동은 자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자타가 잔잔한 호수 같았다면, 교천묘는 들끓는 용암 같았다.

‘실로 대단하구나….’

바라보기만 해도 살이 떨리는 느낌에 준혁이 긴장한 사이, 조호랑이 폴짝거리듯 움직여 교천묘에게 준혁을 소개했다.

“할아버지, 예전에 제가 말한 그 사람이에요.”

“응? 저 인족 놈이…. 그놈이란 말이냐?”

조호랑의 소개에 백랑족의 족장 교천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준혁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모습에 준혁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양쪽 어깨에 손을 올려 공손히 예를 표했다.

“투왕이시자 태백랑 교천묘를 이렇게 뵈어 영광입니다. 저는 인족 수사이긴 하나, 혈맥의 힘을 지녀 영수족과 남이라 할 수 없으니, 좋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준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교천묘는 누런 이빨이 훤히 보이도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혈맥의 힘? 어느 종족의 뿌리를 이었단 거냐?”

교천묘의 반문에 준혁은 백랑족과 비슷한 계열인 백호 혈맥을 드러내면서 은연중 천혈의 힘을 발산했다.

그러자 교천묘가 두 눈이 휘둥그레 변하며 놀란 표정을 했다.

“이 아이 말대로 정말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거봐요, 제 말 맞죠?”

옆에서 조호랑이 추임새를 넣는 사이, 교천묘는 준혁의 본질을 느끼겠다는 듯, 숨을 깊게 들이시면서 생각에 빠진 얼굴을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준혁의 기운을 만끽한 그는 어떤 결정을 내린 듯, 만족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 영수족과 일정 부분 인연이 있다는 말은 맞는 것 같군. 헌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

거대한 나무 상층부.

그곳에 구멍을 내어 거처로 사용하고 있는 교천묘의 침실.

바른 자세로 좌정한 준혁 앞엔 교천묘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는 허례허식 따윈 없는지, 동네 친구를 만난 것처럼 편안한 자세였다.

“우지(牛智)를 찾아왔다?”

조호랑이 말한 혼을 분리해주는 선사의 이름이 우지.

“네, 그렇습니다. 그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흐음…. 그가 머무는 곳을 알려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다만 혼자서 찾아갈 수 있을까?”

교천묘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자, 준혁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대황대륙 깊은 곳, 명왕의 금지에 숨어 산다는 말은 이미 조호랑을 통해 알고 있던바.

하지만 적마를 가지고 있는 준혁은 위치만 알 수 있다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가 머무는 곳만 알려주신다면 혼자 해결하겠습니다.”

준혁의 확언에 교천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려주지, 내 손녀가 그토록 맘에 들어 하던 이인데, 그 정도 도움을 주는 건 일도 아니지.”

“할아버지!”

“왜 소릴 지르고 그러는 게야. 귀청 떨어지겠네.”

얼굴이 붉어진 조호랑을 향해 투덜거리던 교천묘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검은두더지족, 암왕이 다스리는 곳이 나오지.”

“암왕이라….”

“그곳을 지나 더 북쪽으로 나아가면 명왕의 영토가 나오고, 명왕의 심처에 그가 있을걸세.”

“혹, 그자가 명왕이란 자에게 잡혀있는 것입니까?”

준혁의 반문에 교천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명왕이 보호해주고 있는 것이지. 천신라로부터.”

‘천신라? 여기서 왜 그 이름이….’

준혁이 놀란 듯 움찔하자, 교천묘가 별것 아니란 듯 덤덤하게 설명을 이었다.

“우지 그자는 말이야, 천신라에게 쫓기고 있었지. 대충 이유는 짐작 가는 바가 있지만, 뭐 아무튼 그렇다는 거지.”

“그럼 명왕이란 자가 천신라로부터 그를 보호해줄 정도의 실력자인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적마를 이용해 몰래 만나러 가는 건 위험한 일. 하지만 준혁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교천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네 우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

“... 알려주신다면 새겨듣겠습니다.”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크흠.”

‘이런 것도 몰라?’라는 교천묘의 눈빛을 준혁이 피하지 않고 바라보자, 조호랑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준혁은 교천묘의 심기가 불편해질 때마다 적절하게 응수해주는 그녀의 행동에 작게 고개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그게 그러니까.”

조호랑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 그건 대황대륙과 다른 대륙 간의 협약에 관한 것이었다.

오래전 대륙의 패권을 두고 끊임없이 이어지던 전쟁은 모든 걸 파괴했고, 결국 삼선에 오른 최강자라 불리는 자들은 한가지 협약을 맺게 된다.

각 종족이 일정부분 대륙을 나눠서 가지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팔왕이라 불리는 영수족의 여덟 왕은 개별 종족의 실력으로는 선마궁이나 법문 천휴림 같은 삼대 세력에 견줄 바는 아니었으나, 그들은 뜻이 모일 때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존재들이었고, 가장 발언력이 세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팔왕이 대륙을 선점할 기회를 가져갔고, 그렇게 그들이 고른 것이 대황대륙이었다.

대황대륙은 천운대륙이나 남운대륙을 합친 것보다 넓었고, 그 당시 선계의 중심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대황대륙을 영수족들의 삶의 터전으로 구분 지으며 서로 한 가지 약속을 했어요.”

약속이 무엇인지 대충 예상이 갔지만, 준혁은 아무 말 없이 설명을 경청했다.

“각 종족은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만약 이를 어길 시 협약은 없던 것으로 한다.”

‘그럼 이상하지 않은가?’

대충 예상은 했지만, 준혁은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

“알아요. 다른 대륙은 모든 종족이 어울려 산다는 것이죠?”

그랬다. 대황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은 종족 구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모든 이들이 경원시하는 마족들도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어울려 살아갔다.

준혁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조호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다 교천묘를 한번 째려보고는 말을 이었다.

“휴우. 맞아요. 협약은 아주 오래전 이야기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들 평화롭게 어울리게 되었죠. 저희만 제외한다면.”

종족을 구분 짓는다는 건 발전을 늦추는 행동이었고, 인족을 포함한 수많은 종족은 조금씩 서로에 대해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오래전엔 선계의 외곽이라 불리던 천운대륙과 남운대륙이 현재에 와선 선계의 중심지가 된 것이었다.

반대로 대황대륙은 여전히 영수족만 출입할 수 있는 영수족만의 대지가 된 채 여전히 빗장을 걸어둔 상태였고 말이다.

조호랑은 그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지, 설명을 끝내고도 입을 쉬지 않았다.

“다들 문호를 개방하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질 못하고 있죠. 누구 때문에.”

그 누구가 누굴 말하는지 너무 뻔했기에 준혁은 조호랑의 삐친 표정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조호랑이 대막리와 함께 있던 걸 떠올리며, 그녀가 어른들의 반대에도 외부와 소통하기 위해 힘쓰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럼 오래전엔 구지대륙이 선계의 중심이나 다름없었겠구나.’

조호랑의 기나긴 설명에 지금은 하계로 떨어져 나가버린 지구의 위상이 예전엔 꽤나 높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제야, 고대의 힘을 간직한 천혈족, 용각족을 비롯한 목족과 수많은 영수족, 그리고 한 명 만나기도 힘든 마선들이 대거 발견된 것까지, 외곽이라 생각했던 지구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협약이 남아있는 한 천신라를 비롯한 누구도 쉽게 이곳에 손을 뻗지 못해요.”

“그렇군요. 명왕 때문이 아니라 대황대륙 자체를 침범하지 않는 거군요.”

“그래요. 팔왕 어르신들이 예전과 달리 사이가 안 좋다고는 해도, 만약 대황대륙이 침략당한다면 그 순간 하나로 뭉치실 거니까요.”

수행의 높낮이는 있겠으나 팔왕은 전원이 규선에 오른 실력자들. 천신라가 신선에 올랐다고는 하나, 여덟 명의 규선을 동시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때, 조호랑의 투덜거림에 민망해하고 있던 교천묘가 손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왜인지는 말하지 않았군, 그놈을 왜 만나려는 거지?”

***

아마르곤과 진마족 수장에 관한 얘기가 준혁의 입에서 나오는 동안, 교천묘의 눈썹이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그는 그 누구보다 가족과 동료, 그리고 의리라는 것에 민감한 이였기에 준혁의 사정에 요동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교천묘는 성큼 다가와 준혁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너 맘에 든다.”

상대의 눈빛에 깃든 호감을 읽은 준혁.

“그럼 도와주시는 겁니까?”

조호랑의 설명이 끝난 후, 적마를 이용해 혼자 명왕의 심처를 방문하겠다는 계획을 배제한 준혁은 교천모가 자신을 도와주길 바랐다.

“물론이다. 그런 우정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이냐?”

“감사합니다. 태백랑이시여.”

하지만 준혁의 감사 인사가 섣부른 오판이었는지, 교천묘는 준혁의 어깨들 몇 번 토닥거리더니 제자리로 돌아가 굳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심중의 말을 꺼냈다.

“단! 협약에 의해 혈족의 일이 아니면 나는 대황대륙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내 손녀와 영원의 가약을 맺어라. 그럼 도와줄 테니.”

갑작스러운 발언에 조호랑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준혁은 그의 말 중 이상한 부분을 지적했다.

혼인에 대한 건 천혈과 심영근의 영향이라 여겼기에 크게 개의치 않으면서.

“우지란 자는 명왕의 심처에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그곳이 대황대륙 밖이란 말입니까?”

“하나만 생각하는군, 네놈이 그자를 만나 설득한다고 치자, 그 후엔? 그놈이 순순히 네놈을 따라 대황대륙 밖으로 나갈 것 같으냐? 그리고 나간다 한들? 자타 그놈으로부터 친구를 구할 자신은 있고?”

“아….”

준혁은 아마르곤을 구해야겠다는 일념과 초조함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일을 생각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정확히는 혼을 분리하는 힘만 얻고 나면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키고 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위험이 있을 수도, 목숨을 위협받을 수도 있을 테지만, 분명 방법은 있다고 생각하면서.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 빠른 인정은 좋지. 그래서 내 제안을 받아들일 테냐? 네가 저 아이와 영원의 가약을 맺는다면 그깟 거무튀튀한 먹구름 같은 놈 따위야 내 손에서 처리해 주지. 명왕에게도 내가 직접 부탁하고.”

잠시 후, 준혁이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진 듯 보이자, 교천묘가 경고하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시간이 많지 않음을 명심해야 할 거다. 네 친우의 수행을 생각하면, 그놈에게 완벽히 잡아먹히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지금 이렇게 고민하는 사이에도 자아를 잃어가고 있을 테지.”

‘틀린 말이 아니야. 내가 머뭇거릴수록 아마르곤 수사는…. 하지만.’

교천묘의 말에 고민이 깊어진 준혁은 그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조호랑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호랑 수사,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네? 예, 말씀하세요.”

“수사께서도 저와 영원의 가약을 맺고 싶으신 겁니까? 다른 모든 건 배제하고 본인의 의사로?”

준혁의 질문이 너무 직설적이었을까. 조호랑은 바로 답변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네. 저는 함께하고 싶어요.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땐 그저 호기심이었어요. 이상하게 끌리는 향기가 저를 자극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라요. 매일 같이 있고 싶고…. 얘길 나누고 싶어요.”

“저와 남운대륙을 다녀온 후로도 말입니까?”

대놓고 언급하진 않았지만, 주서령과의 인연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냐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그녀는 저보다 당신을 더 일찍 만난 것 말고는 저와 다를 게 없는데?”

“떼잉.”

교천묘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사이, 준혁은 그를 향해 웃어른에게 올리는 예를 보이며 몸을 숙였다.

조호랑의 답변에 마음을 정했다.

“태백랑께서 주신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혈족이 아니면 도움을 주실 수 없다 했으니, 백랑족과 인연을 넘어 혈족이 되겠습니다.”

“오호 잘 생각했다. 잘 생각했어.”

준혁의 확답에 교천묘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조호랑의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준혁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단, 혼사에 관련된 모든 일은 제 친우를 무사히 구한 후로 미루겠습니다. 그때 이 일에 대해 자세히 논하였으면 합니다. 말씀대로 지금은 한시가 급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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