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화. 전승자 (2)
산들바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 있게 말하긴 했지만, 준혁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한번 진선에 오르며 반강제로 수행을 올렸었고, 그로 인해 수행을 안정시키는 데만 100여 년이 걸렸다.
비슷한 규모의 영기구름이라면 모를까, 그 이상은 준혁에게도 부담이었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지.’
하지만 준혁에겐 화신체 비술이 있었고, 그걸 이용해 영기를 수정체에 압축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산들바람을 대신해 영기구름을 받아내는 건, 힘겹지만 가능했다.
정작 중요한 건.
‘천겁. 그것이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알 수가 없다.’
만에 하나 상공의 석양빛 영기구름이 자신의 예측을 넘어서고,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또 한 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이 올라버린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천겁이 시작된다면?
타인의 천겁은 몇 배나 강력할 테고, 준비되지 않은 준혁이 그걸 이겨내는 건 정말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절대 그건 안 되지. 우선 산들의 수행 상승을 완전히 막을 순 없을 테니, 그것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화신체로 만든다.’
짧은 시간 고민을 마친 준혁은 결심을 다졌다.
산들바람과 자신 둘 다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을 가기로 말이다.
***
우선 준비가 필요했다.
금지 밖 상공에 떠 있는 석양빛 영기구름.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엄청난 규모로 뭉치고 있는 기운은 염화족 여인의 말에 의하면 규선에 이를 정도의 양.
준비 없이 덤빈다면 필패였다.
“산들, 비승할 때를 기억하느냐? 그때 비술을 한 번 더 행해야겠다.”
“몸속에 숨는 거 말이야?”
“그래. 이번엔 그때처럼 모든 걸 차단할 필욘 없다. 오히려 종속의 인으로 연결된 심상을 더욱 강하게 자극해야 한다. 마치 너와 내가 하나가 된 듯이.”
이어지는 준혁의 설명에 산들바람은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도움을 받아 비술을 사용.
작은 구슬로 변해 준혁의 몸속으로 몸을 숨겼다.
준혁은 그 즉시 구슬을 성광지력으로 단단하게 감싸고는 그녀와 연결된 끈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 금빛 실을 만들어 또 한 번 꽁꽁 감싸버렸다.
‘우선은 하늘을 속여야 한다.’
산들바람이 자신의 몸속에 숨었다 한들, 이미 그녀를 인식하고 모이기 시작한 영기구름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먼저 하늘이 자신을 산들바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준혁은 우선 용암 호수 밖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적마의 권능을 이용해 금지 안에서 가장 영기 흐름이 안정적인 장소를 찾았다.
파앗-
“이곳이 적당하겠구나.”
금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화정.
그것이 놓인 제단 앞에 도착한 준혁은 화정에 눈길을 주다가 그 앞에 좌정했다.
도착하기 전까진 생각하지 못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마정을 이용해 화신체를 만드는 것에 이상이 생긴다면 그 즉시 봉황족의 화정을 사용해도 괜찮을 거 같았다.
물론 명왕도 같은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잠시 후, 좌정한 채 호흡을 가다듬던 준혁은 내면으로 깊이 침잠했다.
그리고는 산들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사신결을 운용했다.
‘우선은 화기부터.’
하늘을 속이기 위해 산들바람인 척하기 위해선 그녀가 가진 본질을 흉내 내야 한다.
아니, 흉내보다는 빌려온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준혁이 사신결을 운용하자, 준비하고 기다리던 원영이 조심스럽게 산들바람이 변한 구슬로 다가갔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구슬을 덥석 껴안은 원영의 몸에서 금빛 실이 거미줄처럼 번졌다.
그리고는 구슬을 감싼 금빛 실과 동화되더니 스며들듯 그것과 하나가 되었다.
“후우….”
그때부터 산들바람이 머금고 있던 화기가 밀려들었다.
잠시 후. 준혁은 식은땀을 흘리며 몸속에 들어차기 시작한 화기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태양지력을 사용한다면 훨씬 수월할 테지만, 하늘을 속이기 전까지는 그럴 수가 없었기에 오직 몸으로 초고열의 기운을 버텨야 했다.
‘이것을 혼자 힘으로 견디고 있었다니. 장하구나.’
어린애처럼 장난만 좋아하던 산들바람이 자신도 버거운 기운을 애써 이기려 하던 모습에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에 마냥 웃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안 되는 건가?’
산들바람을 잠식하고 있던 화기를 가져오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그녀의 영혼에 심어진 불의 근원은 건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대신할 순 없다.’
그 말인즉, 결국 모든 것을 혼자 받아낼 수 없다는 뜻.
준혁이 감내해야 할 압력의 일부는 산들바람도 같이 버텨야 한단 뜻이었다.
‘어쩔 수 없지.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니.’
인공 자아가 심어놓은 불의 근원을 움직일 수 없었던 준혁은 결국 그 일을 포기하고 전함과 흑룡을 꺼냈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양손을 번쩍 들며 세상에 맞서듯 소리쳤다.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겨우 구름에 불과하지 않으냐!”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외치는 그였다.
그 순간 준혁의 몸이 용암보다 시뻘겋게 변하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태양지력을 배제하고 월광지력의 도움도 받지 못하자 몸속의 수분이 말라갔고 피가 들끓었다.
이제 석양빛 영기구름을 흡수하기 시작하면 이 고통은 지금보다 수 배 혹은 수십 배 강렬해질 게 분명한 일.
그럼에도 준혁은 주저 없이 외쳤다.
“오라!!”
그 순간, 하늘이 응답했다.
***
준혁의 부름에 하늘 가득 모여 압축하고 있던 석양빛 구름이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올릴 때와는 달리, 영기구름은 회오리치며 한곳으로 뭉치지 않고 전체적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지상과 가까워지더니 구름 곳곳이 불타오르며 초고열의 불덩이로 변했다.
화르륵-
그 순간 불덩이를 중심으로 영기구름이 회오리치더니, 어느새 상공엔 집채만 한 불덩이를 머금은 수백 개의 회오리가 가득 찼다.
그것은 마치 하나하나가 소천경 수사가 수행을 올릴 때 불러온 것만 한 영기구름처럼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세상을 녹여버릴 불 송곳니처럼 보이기도 했다.
“허어, 저런 식으로…. 저기에 있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런 것이 가능하단 말이오.”
“고대의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 아니겠소? 우리도 대비해야 합니다.”
팔왕 중 다섯 명이 모여있던 곳엔 어느새 일곱 인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상공의 영기구름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지금의 현상을 좋게 판단하진 않았다.
천지 현상으로 모여든 영기구름의 흡수 속도를 조절하는 건 이곳에 모인 이들 전원이 할 수 있는 일.
하지만 영기구름 자체를 여러 조각으로 분리해 안정적으로 조금씩 흡수하려 하는 모습은 그것을 조종하는 이가 얼마나 의지력이 높은지를 대번에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꿈에라도 불가능한 경지였기에, 두려운 마음도 살짝 들 정도였다.
“그는…. 어찌 되었을까?”
그때 누군가의 혼잣말이 흘렀고, 그 말로 인해 몇몇 인원이 반응을 보였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태백랑이었는데, 그는 당장이라도 금지 안으로 달려가고 싶은지 초조함을 비췄다.
“내가 말렸어야 했어.”
“말렸어도 어떻게든 갔을 이네. 소용없는 후회 따윈 하지 말고 앞으로나 생각하게. 저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인 것이 저것이라면…. 우리가 감당 못 할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니.”
태백랑의 한숨에 명왕이 조언했고, 모두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진 않았겠지….”
이어지는 태백랑의 말에 누구 하나 대답하는 이가 없었지만,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한 가지를 예측하고 있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천지 현상.
그것은 그저 수행을 올리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보기엔 너무 파괴적이었고, 그 압력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으니까.
그 안에서 약하디약한 신체를 가진 인족이, 그것도 진선에 막 오른 이가 버틴다는 것은 그들의 사고 안에선 어려워 보였다.
한편, 지상에서 팔왕이 어떤 대화를 이어가든 상관없이 지하 깊은 곳에선 감탄과 탄성, 그리고 안타까움이 동시에 터져 나오고 있었다.
“된다! 하지만, 그것까지가 내 한계구나. 하아.”
준혁은 어마어마한 양의 영기를 한 번에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완벽히 제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가진 의지력을 총동원해 천지 현상에 직접 관여했고, 원하는 바를 이뤄냈다.
남들이 들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혀를 내둘렀을 일.
바로 영기구름을 수백 개로 갈라버리고 그것들을 단계적으로 흡수하게 준비한 것이다.
거기까지만 본다면 정말 대단한 일을 행했다고 할 만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영기구름이 수백 개로 갈라지면서 흡수한 후에 일어나야 할 반응이 미리 나타났다.
몸속으로 들어온 후에야 발화를 시작해야 할 순수한 상태의 영기가, 벌써부터 초고열의 화기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해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순수한 신체의 강도만으로 버텨야 할 충격이 몇 배나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즉 영기구름이 가진 기운을 제어하는 데는 훨씬 쉬워졌지만, 그 반대급부가 생겨버린 것이었다.
그때, 상공에서 지상과 가장 가까이 머물고 있던 불덩이가 회오리치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준혁은 더 이상의 고민과 상념은 일을 방해한다는 걸 알았기에 즉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는 양손을 하늘 높이 뻗은 채 불덩이 회오리가 가진 화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
쿠오오오-
모든 기운을 맨몸으로 받아낸 뒤, 사신결을 이용해 한차례 가공했고, 그중 일부를 정제해 산들바람에게 주입했다.
나머지는 고도의 의지력을 이용해 재가공했고, 화신체 수정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그렇게 수백 개로 갈라진 영기 뭉치, 아니 불덩이 중 3할가량을 흡수했을 무렵.
“으. 윽.”
조금씩 하지만 빠르게 성장하던 산들바람의 수행은 삼경의 마지막 관문을 두들겼고, 진선에 오를 준비를 마쳐버렸다.
동시에 총 5개의 화신체 역시 영기가 가득 차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내몰렸다.
‘너무 빠르다.’
그것은 준혁의 예상을 가뿐히 상회하는 속도였고 그를 당황하게 하기 충분했다.
그의 계산은 초반부터 엇나가 버린 것이었다.
대륙을 건너며 전부 소모해 버린 수정이 세 개.
그 안에 담긴 영기의 총량은 엄청난 것이었기에 다섯 개의 화신체면 대부분의 영기를 담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진선이 가진 영기의 총량과 규선급 영기구름의 총량은 애초부터 그 그릇의 크기가 달랐다.
아직 공간팔찌 안에 몇 개의 마정이 더 남아있었지만, 그것만으론 상공의 영기를 전부 처리할 순 없어 보였다.
‘이렇게 되면 산들에게 더 많은 기운을 보낼 수밖에 없구나.’
결국, 준혁은 산들바람의 수행 상승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규선에 오르는 것과 비교한다면 한없이 약할 테지만, 타인의 천겁을 대신 받는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던 준혁.
그는 어떻게든 산들바람의 수행 상승을 억제하려다 막고 있던 제어를 해제해 버렸다.
쿠오오오-
그 순간, 어마어마한 양의 기운이 산들바람에게 몰려갔고, 그녀의 존재감이 부각되며 성장하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도 신호가 전해졌다.
콰쾅!
상공에 뭉쳐있던 불덩이들이 무언가에 밀려 거리를 벌렸고, 그 사이로 한없이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하늘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금세 새빨간 석양을 머금었고, 곧이어 준혁이 경험한바 있던 뇌전을 방출했다.
으득-
그 즉시 준혁은 전함을 발동시키며 금지 밖으로 보냈다.
“막아라!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전함이 살아있는 마선도 아닐진대 준혁은 마치 명령을 내리듯 외쳤다.
현재 산들바람은 수행만 오른 것이지 실상은 약하디약한 촛불이나 다름없는 상태.
준혁이 천겁을 직접 받아낸다면 그 충격이 분명 전해질 것이었기에, 어떻게든 영향이 미치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곧이어 흑룡을 집어 든 준혁은 그것을 머리 위에 띄우며 수결을 짚었다.
그러자 흑룡이 준혁을 보호하며 한 뼘이 넘는 검은 막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준혁이 준비를 마친 순간.
콰콰쾅!!
감히 진선급의 천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엄청난 두께의 뇌전이 세상을 삼킬 듯 전함 위로 떨어졌다.
타인의 간섭을 눈치챈 하늘의 응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