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시간 속에서 (1)
“물론 강체술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으셨다면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흠흠. 경험해보시니 어떠셨습니까?”
대막리는 혼잣말하듯이 작게 읊조리다가 준혁의 상태를 물었다.
비록 혼잣말이라지만, 공동 내 누구도 그걸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 없었으니, 명백히 무시였다.
‘설마 강체술 수련을 게을리해서 균열의 압력을 버티기 힘들었나?’라고 비꼬는 말이었다.
준혁은 머릿속의 혼란을 잠재우고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별것 없더군요. 마음만 먹는다면 삼사 년은 거뜬히 버틸 듯 하오외다. 그래서 혹시나 걱정할까 봐 미리 알려주러 나온 것이오. 조사를 마칠 때까지는 최대한 오래 버틸 것이니 기다리지 말라고.”
“아하,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희가 환영할 소식이군요.”
대막리의 눈초리가 슬쩍 올라가는 모습에 준혁은 시간이 틀어진 것 외에도 무언가 숨은 게 있다는 걸 눈치챘다.
대막리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균열로 들어간 지 겨우 하루도 안 지났는데.
그의 태도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마치 뒷배가 생겨서 말실수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아니면 더 이상 자신에게 고개 숙여야 할 이유가 사라졌거나.
준혁은 그런 대막리와 몇 마디 더 나눈 후 몸을 돌렸고,
“바로 가시려는 겁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잠깐 알려주러 나온 것이라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할 테니 림주께도 잘 전해주시구려.”
살짝 코웃음 치며 균열을 향해 가볍게 손을 젓던 준혁은 아무렇지 않게 균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준혁이 사라지자, 허리를 숙이고 있던 대막리가 깊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휴우. 큰일 날 뻔했구나. 조금만 늦었다면 밑작업이 들킬 뻔했어.”
천휴림주가 좌무란에게 명령을 내린 후, 그를 필두로 대막리까지 움직여 공동 외부에서부터 결계를 준비 중이었다.
다행히 1차 작업은 특별할 게 없었기에 금세 끝이 났고 준혁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조금만 더 상대가 일찍 균열에서 나왔다면, 진선인 상대방이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는 법.
상대가 이렇게 빨리 나타날지 몰랐기에 대막리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잠시 후, 가슴을 쓸어내리던 대막리는 균열을 지키는 이들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리고는 다시 공동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준혁이 나타났다 사라진 공동은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다만 대막리가 눈치채지 못한 한 가지.
결계 내부, 균열의 틈 사이에 새끼손톱만 한 꽃잎 한 장이 떨어져 바람에 나부끼듯 흔들리고 있단 것이었다.
***
“밑작업?”
균열 내부로 다시 들어온 준혁은 수결을 풀며 코웃음을 쳤다.
역시나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진행 중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어린아이라도 눈치챌 정도로 뻔한 일.
“역시 나를 믿지 못하고 무언갈 준비하고 있었구나.”
림주는 나침반처럼 생긴 마선의 눈을 믿기에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역시나 말과 행동은 달랐다.
애초에 천신라의 심장이라 불리는 보물 중의 보물을 다루는 일이었다. 그저 그 정도의 준비만 할 리 없다고 여겼기에 특별히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기분이 좋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었는데, 하지만 그런 마음 상태도 금세 가라앉았다.
현재 준혁에게 대막리나 다른 누군가의 장난질은 고심거리에 미치지도 못했다.
“난 분명 일주일이 넘게 이 안에 있었거늘. 겨우 하루도 되지 않았다고?”
머릿속은 온통 대막리의 말로 가득 찼다.
잠시 후, 생각에 잠겨 있던 준혁은 족자를 오두막에 걸어둔 채, 그것을 통해 버드나무 안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분광소를 보고는 기분 좋게 웃다가 손을 저었다.
혹시나 족자가 외부에서도 발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썼고, 그 결과를 확인하자 웃음이 나온 것이다.
대막리 눈에는 준혁이 균열로 들어서기 직전 이유 없이 손을 흔든 것이라 여겼을 테지만, 그 짧은 시간 그가 느끼지 못하게 족자를 펼쳐 분광소를 집어넣었었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
아쉽게 자신은 족자를 가진 채 내부로 이동할 수 없지만, 분신을 균열 내부로 보낼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기분 좋아진 준혁은 어느새 손안으로 끌려온 항아리 속에서 심주를 꺼내 다시금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이것으로 인한 현상일 텐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심주가 비록 모든 걸 왜곡할 수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현상을 의미했다.
시간이라는 것은 실재하지도 않고 감지하거나 건드릴 수도 없는 허상의 개념이었다.
심주의 왜곡하는 힘이 균열 내부와 외부의 시간 왜곡을 불러왔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이성적인 판단이었지만,
그게 정말 가능한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이걸 공천귀에게 맡겼을 리 없다.”
천신라가 바보도 아니고, 시간 왜곡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심주가 대단한 물건이었다면 분명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본인이 관리했을 게 분명한 일.
“도대체. 흠….”
준혁은 자신이 지금껏 익힌 공법과 비술 등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사고를 거듭했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두 눈을 번뜩였다.
“설마!!!”
영기가 세상에 가득 차며 지구에 격변이 일어나기 전.
그때까지 옛 구지대륙인 지구는 과학이라는 것이 발달했었다.
그가 비승하기 전까지도 과학 문물의 기기들은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었으니 굳이 격변 전과 후를 나눌 만한 일도 아니었고 말이다.
“중력은 시간을 휘게 한다….”
그런 과학의 시대 때, 어떤 고명한 학자가 한 말이 있었다.
행성 간에는 중력이라는 인력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고, 그 힘의 차이 유무가 서로가 느끼는 시간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만약 중괴의 힘이 심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외부와 단절된 균열 내부는 어떤 의미로는 하나의 작은 세상이나 다름없었고, 이곳은 중괴의 힘으로 인해 중력이 적용되고 있었다.
그것이 심주의 영향으로 왜곡을 빚었다면?
그렇다면 균열 내부와 외부의 시간차가 발생하는 게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준혁은 제대로 된 정보가 아닌, 얼핏 스쳐 가듯 우스갯소리로 들은 과거의 얘기를 떠올리며 심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지금의 현상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
며칠간 왜곡과 중력에 대한 상관관계를 따져보던 준혁은 결국 그것이 의미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심주의 힘을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실험을 할 수도, 그렇다고 균열 내부가 터져나가든 말든 중괴의 힘을 사용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결국 고민은 저 깊이 묻어두고 분신마저 해제한 후, 버드나무 중앙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균열 내부와 외부의 시간 왜곡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대충 계산해보자면 10배가량 차이가 나는 듯했다.
그러니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 덕분에 균열 밖으로 빈번히 오갈필요 없어졌기에, 원래 이곳에 온 목적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규선에 올랐지만, 마지막 천겁을 피해버렸기에 부족했던 천지 영기.
공천귀 창고 가득한 단약과 법기들을 전부 흡수할 수만 있다면, 부족했던 걸 채우고도 남았다.
그걸 기대하고 이곳을 찾은 것이었기에, 더는 지체할 시간도 고민에 빠질 필요도 없었다.
잠시 후, 심주를 봉인한 준혁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원통형 창고 전체를 의지 안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기감을 유형화시켜 모든 물건을 각인시키듯 천천히 관찰했다.
슈르륵-
그것을 시작으로 심주를 찾을 때만큼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수십 가닥의 금빛 실을 퍼트려 선반에 자리한 물건들을 선별적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우선 한쪽 선반에 수북이 쌓여있던 공간대와 팔찌, 그리고 상자들을 최하층으로 끌고 왔다.
수행을 올리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하급 단약이나 법기 종류는 전부 공간대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영석이나 기타 재료들도 마찬가지로 종류별로 여러 공간대에 옮겨 담았다.
“응? 이건 나연이가 쓰기 적당하겠군.”
“어? 그녀에게 잘 어울리겠군.”
“이건 산들, 이건 청호….”
기능을 살펴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지인이나 수하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따로 분류했다.
하나씩 분류하며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들을 빠르게 나눴고, 대부분은 구분 없이 금빛 실에 휘감긴 채 한 줌 영력이 되어 준혁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렇게 수많은 법기와 단약이 눈 녹듯이 사라졌고, 끝도 없을 것 같던 창고의 물건들은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건 밖에서 실험을 해봐야겠군.”
중간중간 별도로 자신의 개인 공간팔찌에 저장하는 물건도 있었고.
가볍게 기감으로 훑는 것으로는 기능을 파악할 수 없어 따로 한쪽에 모아놓기도 했다.
***
“후우….”
사쿠라에게서 받아온 착화방은 공천귀가 모아놓은 보물을 흡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외부의 기운을 흡수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낭비되고 흩어지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들을 원천 봉쇄했다.
“착화방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끝나겠구나.”
흡수하는 속도마저 빠르게 도왔기에, 10년이 지난 지금 벌써 창고 내 1할에 가까운 물건의 흡수가 끝난 상태였다.
물론 10년 내내 보물들을 흡수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것들을 흡수한 후 정제 과정을 거쳤고,
그것을 이용해 수행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래봐야 아직 부족했지만, 영기 총량도 부족하고 수행도 들끓었던 준혁의 상태로 보자면 엄청난 속도로 안정화가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혁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창고 내 물건을 다 흡수할 때까지 50년이고 100년이고 수련에만 매진하고 싶었지만, 외부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갈 채비를 갖췄다.
그렇다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한 가지 더 확인해야 할 게 생겼다.
10년간 흡수와 안정화를 진행하는 도중 팔목에서 빛을 내는 공천령과 족자에도 시간을 할애했고, 한가지 비밀을 알게 된 것.
자신이 알아낸 것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선 균열 밖으로 나가는 게 필수였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땐 림주를 비롯한 전원을 닭 쫓던 개 신세로 만들 수 있으리라 여겼다.
잠시 후, 준비를 마친 준혁이 족자 하나만을 소지한 채 조용히 사라졌고, 가치를 짐작하기 어려운 보물들만 고요한 적막에 둘러싸였다.
균열 내부는 바람 한 점 없었고, 버드나무는 여느 때처럼 조용히 흔들렸다.
***
균열 결계 밖, 분주하게 움직이던 이들이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얼굴이었는데, 앞으로 닥칠 일에 두려움과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3차 결계까지 완성됐습니다.”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좌무란은 수하들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결계에 고정된 채로.
“그래? 그럼 당분간 진행을 멈춘다. 아마 마지막 준비는 시일이 걸릴 터, 놈이 다시 재입장한 후 시작하는 게 좋겠지.”
좌무란의 말에 수하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람처럼 흩어졌다.
잠시 후, 다가온 대막리가 좌무란의 시선을 따라 결계 속 균열을 바라보면 입을 열었다.
“사형. 그자가 얼마나 버틸까요?”
“강체술에 특화된 마족이나 영수족이 아닌 이상 일 년쯤이 한계일 것이다. 아마 계면 간 압력쯤으로 여기고 호기롭게 움직인 것 같은데. 훗. 조만간 낭패한 모습으로 나타날 게 분명하지.”
좌무란도 준비 없이 처음 균열에 진입했을 때,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기억했다.
규선인 자신이 그랬으니, 상대방은 아무리 적마의 능력이 있다 해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단 하나. 만약 적마의 능력으로 균열 속 공천귀가 보물을 숨겨놓은 장소를 찾아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우우웅-
그때 균열에서 미세한 진동이 흘러나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딱 맞춰 나오는군.”
좌무란은 준혁이 어떤 행태로 나타날까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균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균열에서 사람이 튀어나온 순간, 하마터면 광소를 터트리며 본심이 새어 나올뻔했다.
“허. 괜찮으십니까? 이거…. 참. 행색이 말이 아니십니다.”
균열 밖으로 나온 준혁은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가 낭자해 있었다.
기력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웃긴 것은 그럼에도 허세를 보이려는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목에 힘을 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하, 안이 제법 맵군요…. 생각보다 조금 힘겹습니다그려.”
다만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는데, 당장 쓰러져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상당한 기간 요양이 필요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