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태왕(颱王) (2)
콰아아앙!!
충돌이 일으킨 충격파가 대지와 대기뿐 아니라 보호막 넘어 숲 전체를 울렸다.
“어어! 벌써!”
“그쪽부터 결계를 강화해라!”
보호막에서 멀리 떨어진 곳, 그곳엔 수많은 수사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혹시나 보호막이 깨져나가며 기파가 퍼져나가는 걸 막는 것.
만에 하나 시험을 치르는 중 팔왕이 끼어들 걸 염려한 웅왕의 조치였다.
하지만 현재 결계를 신경 쓰는 자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자신들의 왕과 처음 보는 인족의 대결에 넋을 놓고 있을 뿐이었다.
쿠아아앙!
“저자가 정말 인족이라고?”
“아무렴. 내 분명히 들었구먼. 예전에 봉황족에 난리가 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때 그 난리를 친 그자라더구먼.”
“말도 안 돼….”
“그럼 그럼 말도 안 되지. 신선이 된 거 아니냐고 말이 많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결계를 강화할 생각도 못 한 채 넋을 놓고 보호막 내부를 관찰하는 자들 중 가장 가까이 머물고 있던 두 사람.
그들 중 한 명은 혼백이 나간 표정으로 웅왕과 인족의 사투, 아니, 혈투를 지켜보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쉼 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 말이 아니라, 저게 말이 되냐 말일세.”
“무슨 소리야? 저 인족의 수행에 대해 말한 게 아니었남?”
갑작스레 대화가 끊기자 적막 속, 폭음만이 지속되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지속되던 폭음 사이로 혼백이 나간 것 같던 사내가 말을 이었다.
“저자… 를 보게. 처음엔 다른 자들처럼 왕께 덤벼들었거늘….”
“그렇지 그렇지. 그래서 인족은 멍청하다고 하는 거지, 그따구로 해봐야 힘으로 깨부수면 그만인걸. 왕께 그런 게 통할….”
“지금은 맞상대를 하고 있어….”
“…뭐? 맞상대?”
수다를 떨어대느라 보호막 내의 전투를 놓치고 있던 수다쟁이는 옆 수사의 말에 전투에 집중했고, 똑같이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세상에….”
그 안에선 두 명의 괴물이.
아니, 한 명의 왕과, 한 명의 인족이.
마치 누가 더 강인한가를 확실히 하자는 것처럼 치고받고 있었다.
그것도 서로 공평하게 공수를 한 번씩 나눠 받으며.
마치 처음 ‘왕’이라는 자리가 생겨났을 때, 모든 수사가 모여 축제를 벌였다던 그때의 그 사투처럼.
***
웅왕의 주먹질이 대기를 관통하며 궤적을 그렸다.
콰아앙!
마치 유성이 떨어지듯 호선을 그리던 주먹이 상대의 가슴팍을 두드리자, 상대는 이를 악물며 일곱 걸음 물러났다.
“제법이군!”
하지만 일곱 걸음 물러났던 사내는 거인이 움직이듯 쿵쿵거리며 다가오더니 지하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용암처럼 붉게 변한 주먹을 올려 쳤다.
콰앙!
피하고자 한다면 피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웅왕은 상대의 공격에 전신을 강화하며 받아냈다.
커억-
순간적으로 신음을 참지 못하고 작은 핏방울 몇 방울을 뱉어냈다. 그럼에도 본인은 상대의 공격에 다섯 걸음 물러난 것에 만족했다.
상대는 일곱 걸음, 자신은 다섯 걸음.
두 걸음 앞섰다는 것에 고통 따위는 사라졌다.
그리고는 재차 주먹에 세상을 분쇄해버릴 듯한 괴력을 담은 채 내뻗었고,
쿠우웅-
상대는 기다렸단 듯이 양손을 활짝 펴더니 아무 방비 없이 가슴으로 공격을 맞이했다.
“으윽-”
이번에는 작은 신음과 함께 여섯 걸음 물러난 상대.
그리고 상대에게서 날아오는 주먹에.
콰앙!
“이럴 수가….”
웅왕은 상대와 똑같이 가슴을 활짝 열고 별다른 방어 없이 주먹을 허락했고, 여섯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그때 상대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드디어 동수를 이루었군요. 이 정도면 만족하십니까?”
“아니! 아직이다!”
동수라니? 웅왕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상대가 태왕에 어울리는 인물인지 확인하려 하긴 했지만, 어느새 전투의 구도는 그것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지금은 마치 고대에 왕의 자리를 놓고 싸웠던 투사의 자리, 그 시절 그때 모습 자체였다.
절대. 절대 인족 따위에게 질 수 없었다.
평수를 이루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이번엔 내 차례. 이번에도 한 번 받아보시게!”
한편, 웅왕을 맞상대하고 있는 준혁은 황당함을 넘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웅왕의 의도대로 강체술만으로 상대하려던 건 맞지만, 어느샌가 자신의 의도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엔 혈단법을 극성으로 운영하며 오직 체술로만 웅왕을 상대했다. 그 와중에 술법의 사용을 자제하는 건 물론 마선들의 권능도 완전히 배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 무식하긴 했지만, 일반적인 수사들의 전투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공방을 오가며 지속되던 전투 도중, 웅왕이 자신의 공격을 방어 없이 견디는 모습에 자신도 그걸 따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실수였다.
그게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지금이 되었고, 이제 전투라고 하기도 민망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상대가 공격할 땐 무방비로 견딘다.
그리고 견딘 후, 재반격으로 멀쩡함을 증명한다.
웅왕의 눈치를 보니 공격을 견디며 충격파로 인해 물러난 걸음 수를 보고 우위를 논하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이러다 끝이 없을 것 같은데.’
문제는 준혁의 상태가 생각보다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신체 강도를 떠나, 초회복을 타고난 상대와 달리 준혁은 술법에 의지해야만 하는 인족이었다.
그랬기에 얼마 전부터 공격을 이겨냄과 동시에 성광지력으로 몸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다만 대놓고 성광지력을 사용하면, 사기꾼이니 정당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만 같은 분위기였기에, 느끼지 못할 만큼만 끌어다 쓰고 있었다.
‘이런 게 분위기에 휩쓸린다는 건가?’
준혁은 스스로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이 기나긴 수도자의 삶에서 가장 이치에 맞지 않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상한 고양감을 느끼기도 했다.
처음부터 웅왕이 만든 보호막 밖, 진을 치듯 대기하고 있던 웅구족 수사들.
그들은 어느새 성스러운 광경을 목도한 종교의 신자처럼 반쯤은 넋을 놓고 있었고, 감격에 겨운 눈을 하고 있었다.
몇몇은 심지어 바닥에 주저앉아, 웅왕의 승리를 기원하기까지 했다.
‘아니, 그의 승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승리인가?’
이제는 웅구족의 응원이 웅왕을 향해있는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만큼 대결의 구도가 말 그대로 ‘대결’이 아닌 ‘신성한 무언가’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때, 준혁의 뇌리로 벼락같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걸 받아낸다면! 그대를 태왕으로 인정하겠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력이 담긴 주먹이 정확히 자신의 심장이 향한 곳을 향해 뻗쳐옴을 느낄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준혁은 이번 공격에 담긴 위험성을 파악하고는 이전처럼 방비 없이 받아야 할지, 아니면 귀원패라도 둘러야 할지 고민했다.
허나, 이미 열병이 옮듯 중독돼버린 준혁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와보십시오!!”
콰아아앙!!!
잠시 후, 웅왕의 주먹에 가슴을 내준 준혁은 굉음과 함께 수십 걸음 물러나다, 멈춰 섰다.
그저 주먹질 한번을 견딜 뿐인데, 전신의 기력이 빠진 듯 축 처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웅왕의 눈에 감탄이 서렸다.
주위에서 ‘워워워’하는 함성이 커졌다.
“이제 인정한다. 그대는 그 어느 영수족보다 영수답다. 앞으로 나는 그댈 태왕이라 부르겠다.”
웅왕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준혁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축 처져있던 준혁이 서서히 어깨를 폈다.
그리고는 입가에 흘리던 피를 쓰윽 닦더니 웅왕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아직 끝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마지막 차례입니다.”
쿵쿵쿵.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인의 걸음 소리가 웅왕의 귀를 파고들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엔 당혹이 서려 있었다.
***
“세상에나. 인족이, 아니, 저분이….”
“새로운 왕의 탄생인가.”
수다쟁이 친구 옆에서 고대의 결투처럼 변해버린 전투를 지켜보던 사내.
그는 주변에서 흐느끼는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웅구족 수사들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있거나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그들도 눈이 있었으니 보았으리라.
왕의 마지막 주먹질에 쓰러진 줄 알았던 인족.
그가 최후의 반격을 가했고, 그 결과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자신들의 왕임을.
“이건 아니다! 이건 고대의 신성한 혈투가 아니니 저 인족이 우리의 왕이 되는 건 아니야!”
누군가의 외침이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외침대로, 이번 전투는 처음부터 고대에 왕의 자리를 놓고 벌이던 신성한 전투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양상이 고대의 결투처럼 흘러간 것이지, 처음엔 그저 실력을 겨루는 일반적인 전투였다.
실제로 고대의 결투는 기록상 전해오는 것이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사라진 지도 오래였다.
그랬으니 승자가 누구든 왕이 바뀌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마음 한편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 저자가 왕이 될 순 없지만. 우리의 왕을 넘어선 건 사실이다….”
만약 치졸하고 비겁한 술법, 웅구족이 취약한 술법을 사용했다면 화라도 날 테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경배를 드리겠다.”
말을 하던 사내는 결국 털썩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조아렸다.
그 누구보다 웅구족답게 승부를 치렀고, 그 누구보다 강했던 자신의 왕을 쓰러트린 사내를 향해.
강체술을 바탕으로 발전해온 영수족 중에서도, 유독 한눈팔지 않고 외길만 걸어온 웅구족.
그런 그들보다 더 웅구족 같은 인족을 향해서. 진심을 담아.
***
“끄응, 대단하군. 진심으로 인정한다.”
쓰러졌던 웅왕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준혁의 마지막 일격은 그가 경험했던 그 어떤 것보다 강렬했다.
가벼운 주먹질 안에 울분과 냉정이 가득했고, 그 가운데 따뜻함 마저 품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 전설처럼 내려오는 거인의 주먹질이 실존한다면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먹에 담긴 힘은 모든 게 완벽했다.
“봐주신 걸 알고 있습니다.”
준혁은 그런 웅왕에게 겸양의 말을 건넸고,
“싸울 땐 누구보다 영수족 같더니, 말하는 걸 보면 인족은 확실하군.”
웅왕은 처음으로 피식 웃으며 준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
웅왕이 인간들의 인사법으로 손을 내밀자 준혁은 그의 손을 맞잡으며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이제 태왕이 됐으니, 사휘족의 영토를 방문해야겠지. 그전에 나머지 팔왕을 불러야겠군. 이제 그대를 정식으로 맞이해야지.”
“웅왕께서야 인정한다지만 나머지는?”
준혁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 웅왕은 걱정 없다는 듯 말을 끊었다.
“찬성 두 표에 반대 두 표, 묵왕이 반대표를 던지지 않는 이상, 찬성 세 표로 그대가 태왕이다.”
‘다수결이라니, 이런 점에선 인간들과 다르지 않구나.’
영수족이라면 누구 하나가 반대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 같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 후, 준혁을 거대 오두막 내부로 안내한 웅왕은 밖에 대기 중이던 몇몇 수사들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웅구족이 손님을 맞이할 때 내놓는 그들만의 선식을 준비해왔다.
“인족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선주를 대접한다지? 이것들도 그것과 다르지 않으니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웅왕의 권유에 선식 하나를 집어 먹은 준혁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맛있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산들바람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서 그랬다.
오래전 자신에게 가장 좋아하는 먹거리를 주겠다며 이름 모를 음식을 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웅족의 선식과 거의 비슷했다.
물론 이쪽이 훨씬 더 맛있고 품질이 좋았지만.
‘산들에게 주면 좋아하겠군.’
준혁은 눈치껏 선식을 공간팔찌에 조금씩 옮겨 담으며 웅왕과 가벼운 대화를 이어갔다.
동시에 머릿속 한편으론 무식하게 치고받던 대결을 떠올렸다.
처음엔 의미 없이 단순 무식한 결투 방식에 의문이 있었으나, 마지막 일격을 겨루며 생각이 바뀌었다.
술법 없이 가진 역량을 주먹질 한 번에 담으려다 보니 그것이 쉽지 않았고, 오히려 그 어떤 술법보다 복잡하게 느껴진 것.
특히나 준혁은 너무 많은 기운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경우가 남들보다 더했다.
‘마지막…. 그건 분명 삼지행이면서 삼지행이 아니었다.’
만약 몇 번의 공수만 더 주고받았다면 새로운 심득을 얻었을 것만 같은 아쉬움에 선식을 연달아 삼켰다.
“마음에 드나 보군, 다행이야. 헌데 먹는 건 잠시 미뤄야겠어. 다들 빨리도 도착했군.”
생각이 깊어져 가던 준혁은 웅왕의 말에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어느새 도착한 인물들이 준혁을 지그시 바라보며 거대한 오두막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