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태왕의 흔적 (2)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신다면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처음의 능글능글한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몽호야.
군기가 바짝 든 군인처럼 준혁의 심기를 거스를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옆에서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태백랑을 살짝 곁눈질한 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이라…. 내 충실한 수족이 되라 해도 말인가?”
“그, 그건….”
“흐음.”
“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태왕이시여! 어차피 사휘족은 태왕의 그늘 아래 매인 몸. 명대로 행하겠습니다!”
***
“자네, 참….”
사휘족을 떠나 백랑족으로 향하는 길.
태백랑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준혁을 응시했다.
준혁은 하늘을 가르는 와중에 말을 걸어오는 태백랑 때문에 살짝 속도를 줄이며 응수했다.
“왜 그러시는지?”
“아닐세. 그냥 처음에 알던 그이가 맡는가 싶어서.”
준혁은 누군가를 만날 때 그자가 자신보다 하위수사라 해도 쉽게 여기거나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상대가 어떤 실력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는 것도 있었지만, 상대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준혁이 몽호야를 휘몰아치듯 닦달하는 모습이 태백랑의 눈엔 신기하게 비쳤으리라.
그리고 그런 태백랑의 심리를 눈치챈 준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게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런 모습 저런 모습, 모두 제가 가진 일부분일 뿐이지요.”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그 아이에게 전부 맡겨도 되겠나? 자네가 그곳에 머물지 않으면 예전과 그리 다르지 않을 텐데.”
준혁의 능청스러움에 태백랑이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그 역시 사휘족의 사정을 알고 있었는지, 준혁이 몽호야에게 예전처럼 모든 일을 넘기고 떠나오자 걱정했다.
“아 그것이라면 조만간 해결될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내가 모르는 해결책이 있나 보군.”
준혁이 사휘족의 영토를 떠나 자신의 본거지인 대화성으로 돌아간다고 여긴 태백랑.
준혁은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 나중에 동의를 얻을 때나 언급하려던 말을, 궁금해하는 상대의 눈빛에 결국 꺼냈다.
“전송진을 연결할 겁니다.”
“뭐?! 전송진?”
생각지도 못한 답이었는지, 태백랑이 비행을 멈추며 우뚝 멈춰 섰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공간석이면 몰라도, 전송석은 선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물건 중 하나가 된 지 오래.
영수족이라고 전송진을 이용하기 싫어서 대황대륙과 타 대륙을 비행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었다.
‘가능? 가능을 논하기 전에 동의를 얘기할 줄 알았더니.’
준혁이 생각을 숨기며 대답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려운 것도 없지요. 당장은 흑석대륙을 관통하는 전송진이 먼저이니 그것을 마무리하는 대로 사휘족까지 통로를 열 생각입니다. 물론 그전에 팔왕의 동의를 얻어야겠지만.”
사휘족의 영토는 웅왕이 다스리는 지역을 넘어 백랑족을 지나, 꽤 깊은 곳에 자리한 상황.
“혹? 우리 백랑족에도 가능한가?”
“안 될 것 무어 있습니까? 백랑족에 길을 열면 그녀도 매우 기뻐하겠군요. 원할 때 언제든 방문할 수 있으니.”
“고, 고맙네!”
덥석-
준혁은 갑작스레 두 손을 잡아 오는 태백랑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사실 전송진 설치는 오히려 자신이 부탁해야 할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간다고 속으로는 어리둥절해했다.
왜냐하면, 전송진이 설치된다는 말은 이동의 간편함만을 논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황대륙의 방비에 허점이 될 수도 있었기에, 당연히 팔왕의 승낙을 얻어내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준혁이 생각하지 못한 한 가지.
그건 바로 팔왕이 지왕의 힘으로 일정 부분 연계를 하고 있는다고는 하나, 서로 간의 왕래에 시간을 너무 낭비한다는 것이었다.
준혁은 웅왕의 신호로 팔왕이 간단하게 서로 간의 영토를 넘나들며 방문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급한 일이 있을 때 각 종족의 비술을 이용한 둔술을 사용해야 했고, 그것은 준혁이 혈둔술을 사용하며 정혈 일부분을 소비하는 것처럼 부담되는 일이었다.
또한 그런 장거리 둔술은 진선급 이상의 영수들만의 전유물이었고 말이다.
그랬기에 전송진이라는 말에 화색을 드러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나? 말만 하게!”
“필요한 게 생기면 그때 말씀드리지요. 지금은 그걸 논하기엔 시기상조 같으니.”
“좋네! 좋아! 무엇이든 말만 하게, 그게 어떤 것이든 구해다 줄 테니!”
태백랑은 붙잡은 준혁의 손을 연신 위라래로 흔들었다. 그의 반응을 보건대, 아마 팔왕 전원이 똑같은 부탁을 해올 가능성이 있었다.
‘제무무가 바빠지겠군. 나에겐 잘된 건가?’
준혁은 전송진으로 인해 생기게 될 이득을 떠올려보며 멈췄던 비행을 재개했다.
그렇게, 전송진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오는 태백랑의 질문에 답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상공!”
백랑족의 경계에 들어서자마자 번개처럼 날아와 안기는 조호랑을 맞이해야 했다.
“잘 지냈소?”
“어쩜 이리 오래 걸리셨나요. 하마터면 제가 대막리의 거처로 찾아가려고 했어요.”
“하하, 그랬소?”
가벼운 해후를 마친 준혁은 조호랑과 함께 백랑족 심처로 이동했다.
대화성으로 향하기 전 이곳에 온 이유.
조호랑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바로 아마르곤과 청호를 만나기 위함이었으니까.
하지만, 심처로 이동한 준혁은 청호만을 대동한 채 돌아왔다.
“아마르곤 그자는?”
“지금 중요한 고비인듯해 방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준혁이 흡족해하는 표정으로 돌아오자 질문을 던졌던 태백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한동안 더 그 친구를 부탁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부탁이라니. 우리 사이에 서운하게.”
“그리고 이것.”
말을 하던 준혁은 품속에서 휴대용 공간대 하나를 꺼내 건넸고.
“이게 무엇인가?”
“아마르곤 수사가 이번 고비를 넘기고 나면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공천귀의 창고에서 목족의 수행에 도움이 되는 물건을 모아 태백랑에게 전했다.
잠시 후, 백랑족에서의 일을 마무리한 준혁은 가벼운 담화를 끝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만간 뵙도록 하지요.”
“그땐…. 알지?”
그리고는 기대감에 가득 찬 태백랑을 향해 웃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백랑족에 첫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
흑석대륙 상공.
조각배 법기 위엔 세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준혁과 조호랑, 그리고 청호.
청호는 준혁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눈이 마주치자 바짝 얼은 듯, 시선을 피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거라.”
진선에 오르기 전에는 평생 영수족의 거처에서 수련만 해야 할 줄 알았던 청호.
청호는 자신을 백랑족의 심처에서 데려온 준혁의 의중이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다른 한 가지가 너무 궁금해 결국 입을 열었다.
“저…. 주인님. 저만 돌아가나요?”
“무슨 말이지?”
“누님께선… 어찌 되시는지…. 그 봉황족의 금지가 외부와 차단돼, 누님이 많이 외로우실 텐데….”
“왜? 또 둘이 놀러 다닐 생각을 하느냐?”
“아, 아니에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걱정돼서….”
준혁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청호가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자신의 수행을 볼 수 없는 다른 이들과 달리, 청호는 종속의 인 때문에 미약하게나마 미증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규선에 오른 준혁의 존재감에 한껏 움츠러든 것이다.
한없이 가깝고 따뜻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론 미증유의 존재감에 압박을 느끼고 있는 것.
“걱정 말거라. 이미 함께하고 있으니.”
그런 청호의 곁으로 다가간 준혁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괄량이가 또 사고를 쳐서 현재 내 몸속에서 안정화를 진행 중이다.”
“예에에에?! 또요?”
준혁의 행동 때문인지, 청호가 조금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며 한껏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 대신 안정화가 끝나면 너도 꽤 놀라게 될 것이야.”
‘이제 너와 비교할 수도 없는 수행을 지녔으니….’
뒷말을 삼키는 준혁.
산들바람의 성격에 수행 차이가 심해진다고 청호를 박하게 대하진 않을 게 분명했다.
오히려 수행에 자신이 붙었기에 더 놀 궁리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과연 청호도 그럴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시키지 않아도 수행을 올리기 위해, 산들바람과 동급이 되기 위해 힘쓸 수도 있고,
아니면 예전보다 더 산들바람을 따를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점점 거리를 두거나.
“놀라다뇨?”
“보면 안다. 그때가 된다 한들 지금처럼 사이좋게 지내거라.”
잠시 후, 두 사람의 사이가 질투 났는지, 조호랑이 끼어들며 대화가 끝이 났다.
그리고는 새로운 대화가 꽃을 피우며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
멀고 긴 여행인 듯, 오랜만에 대화성으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준혁을 반긴 건 소우자였다.
“주군을 뵈옵니다.”
전송진을 이용하기 시작할 때 미리 기별이 간 건지, 소우자를 필두로 대화성의 주요 인물들이 전부 모여있었다.
“주군을 뵙습니다!!”
심지어 가벼운 동맹관계인 교호홍과 청교장까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의문이 생기려는 찰나.
이어지는 소우자의 행동에 준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선도에 입적한 후! 주군께서 한발 더 나아가 규선에 오른 건 만천하 수사들의 복입니다! 규선에 오르신 걸 감축드립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준혁이 비행법기를 이용해 전송진이 설치되지 않은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그가 규선에 오르며, 동시에 팔왕이 되었다는 소문이 선계를 뒤흔들었다.
진선에 오른 지가 엊그제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규선에 올랐다는 말을 믿지 않는 자들도 대다수였다.
하지만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법.
팔왕 중 태왕이 귀천했고, 그 자리를 준혁이 대신했다는 소식이 대황대륙에서 전해지자, 더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실 준혁이 태백랑에게 스스로 규선이라 말했기에 그렇게 소문이 난 거지, 아니었다면 신선이라는 말이 퍼졌을지도 몰랐다.
“진산문에 가 있는 화여에게도 연락이 왔습니다. 함께하지 못해 죄송하다 전해주라 하였습니다.”
소우자는 딸에게 받은 옥간을 조심스럽게 꺼내, 준혁에게 내밀었다.
“죄송할 게 뭐 있는가. 나를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그래도….”
“오히려 내가 미안하군.”
준혁이 옥간 속 내용을 확인하고 그것을 품에 넣자, 소우자가 감격한 얼굴로 고갤 숙였다.
짧은 말이었지만, 주군의 표정에서 자신의 딸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모여있던 인원을 전부 해산시킨 준혁은 소우자와 조호랑만을 대동한 채 자신의 거처로 이동했다.
교호홍과 청교장이 함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단박에 묵살됐다.
거처에 도착한 그는 기다리란 말을 남기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자릴 비웠고.
며칠이 지난 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부적을 가지고 나타나 소우자에게 넘겼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부적이 정신부의 일종임을 눈치챈 소우자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묻자, 준혁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내 권능의 일부를 담은 정신부다.”
정확히는 삼청조의 권능 중 극소량을 배합한.
“정신부가 가진 부작용을 없앤 물건이니 사용하는 데 꺼릴 필요 없다.”
“무엇에….”
말이 끝나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반문하는 소우자를 향해 눈썹을 끌어올린 준혁이 말했다.
“믿을 수 있는 자들. 올곧은 자들을 선발하라. 그들과 함께 새로운 터전을 만들 테니.”
“예? 새로운 터전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옵니까?”
어안이 벙벙한지, 소우자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했다.
그런 소우자를 향해 준혁은 품속에서 족자를 꺼내 펼치며 웃어 보였다.
“앞으로 이 안에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 것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하게 안전한 거처를. 그리고 난 자네가 그 일을 맡아주었으면 하는군. 그리해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