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최후의 승부 (1)
천신라의 말에 준혁은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독고제가 말했던 운명.
그게 의미하는 바와 천신라가 말하는 바가 상충하는 이유를 말이다.
천혈족 입장에서 마선기는 다루는 힘이지 그들의 본질이 아니었다.
그런 마선기가 증폭의 증폭을 거듭해 그들의 본질을 뛰어넘는다면? 더군다나 그것이 자아를 가진 생명체라면?
과연 그것이 천혈족의 의지대로 움직일까?
준혁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천신라만 보더라도 확실했다.
그랬기에 천혈족은 처음부터 모든 일을 계획할 때 식아를 염두에 둔 게 틀림없었다.
식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아가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마선이라 하기엔 계약관계마저 희미했다.
처음엔 준혁 본인이 특별하기에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난 것뿐이었다.
천신라의 말대로 그저 증폭된 마선들을 잡아먹고 모으는 역할이었던 것이다.
만약 천신라가 식아의 능력을 가졌다면, 마선들을 다 모으고 흡수한 후엔, 결국 본인마저 식아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었단 소리.
‘천기를 읽은 것인가?’
천신라는 본인이 천혈족에게 임무를 부여받은 것처럼 말했지만, 준혁은 그것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규선에 올랐을 때, 얼핏 느꼈던 하늘과의 감응.
그런 과정을 통해 천신라 역시 본인의 진정한 정체를 깨닫게 되었고, 결국 본인이 천혈족에 의해 설계된 식아의 최종 먹잇감임을 감지했으리라.
그리고는 그것을 부정하고 모든 걸 자기 뜻대로 자신을 중심에 놓고 해석하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
그랬기에 천혈족 최후의 후인이라는, 천혈족의 본질인 ‘천혈’을 가지고 있던 독고제와 전혀 다른 얘길 하는 것이었다.
“어때? 내 얘기 재밌었나?”
“흥미롭군요.”
그동안 꽁꽁 감추었던 얘길 털어놔서인지 천신라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런 그가 눈가를 찡그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대와 나는 서로 적대할 필요가 없지. 나는 그저 식아의 능력을 빌리기만 하면 될 뿐. 그것을 빼앗을 생각은 아니니까, 합!”
파앗-
말을 하던 천신라가 갑작스레 위로 솟구쳤고, 준혁은 반사적으로 귀원패로 보호막을 만들며 물러섰다.
지이잉-
그 순간 천신라의 등 뒤에 있던 손의 수가 늘어나며 소름 끼칠듯한 파동을 퍼트렸다.
‘융합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가?’
그러자 연거푸 밀려나던 팔왕이 질색하며 크게 물러났고, 마규보 역시 이를 악물고 도망쳤다.
하지만 마규보가 얼마 움직이지도 못한 찰나의 순간.
“어딜!”
천신라는 지겨운 술래잡기를 끝내고 싶은지 마규보를 향해 본체를 움직였다.
그리고는 양손에 검은 실타래를 뭉치더니 멀리 떨어져 있던 마규보를 향해 내리쳤다.
촤아악-
그러자 법문의 마선들을 먹어 치우던 분신들이 먼지처럼 변해 사라졌고, 동시에 마규보의 발밑과 머리 위에서 엄청난 양의 실타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저자마저 흡수당한다!’
중괴가 말했던 시간, 공간, 왜곡의 결합.
공천귀도 천신라에 대해 완벽히 알지 못했던 만큼, 중괴 역시 틀릴 가능성은 컸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는 일.
준혁은 마규보가 흡수당할 것 같은 모습에 바로 몸을 움직이려 했다.
“이런.”
하지만 자신이 대화에 집중하는 사이, 천신라가 물밑에서 준비한 것인지, 손쓸 수 없는 상태임을 깨닫고 멈춰 서야만 했다.
투명한 가시, 손톱보다 작고 바늘보다 가는 투명 가시들이 마규보에게 향하는 길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게 규극마(葵棘魔)?’
본적은 없지만, 알고 있는 권능.
가시는 접촉하는 순간 피부를 파고들어 수사의 영력을 흩어버린다고 했다.
-이건 안 돼.
이겨내고자 하면 어려울 건 없지만, 그사이 마규보는 당하고 말리라. 적마도 거부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규극마는 그의 능력마저 억제하는 효능이 있었다.
‘어쩔 수 없나.’
준혁이 주춤하는 사이, 마규보는 실타래에 싸여가고 있었고, 어떤 방법을 써도 빼내 오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할 수 없군. 그는 포기하고 우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억지로 이루기보단, 다음 수를 준비하고 상대를 기다리는 게 나았다.
그랬기에 준혁은 곧장 준비해둔 수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결심과 함께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저건!!’
마규보의 등 뒤로 그림자처럼 내려앉은 이를 보고 준혁은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화여!!”
마규보가 실타래에 완전히 싸이기 직전.
어느새 그의 뒤에 나타난 소화여가 파뢰를 창처럼 찌르며 ‘진’을 발동하고 있었다.
“이자가 흡수되면 안 되는 거죠?! 제가 막을 수 있어요!”
숨은 상태로 미리 준비했다는 듯 소화여는 여유가 넘쳐 보였다.
샤르륵-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 한쪽에 미세한 틈이 만들어지더니 별빛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신비경에서 보았던 그 별빛.
그것이 마규보와 천신라 머리 위로 동시에 떨어지고 있었다.
마선들을 봉인할 수 있는 마선봉인진이 소화여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
‘무영기를 이렇게 완숙하게 펼치다니.’
소화여의 손끝에서 퍼져나가는 성광지력은 아무런 파동도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전 그녀에게 무영기를 가르쳤던 준혁은 새삼 자신이 그녀를 무시했다는 걸 깨달았다.
항상 여린 여인으로만 보았지, 진선에 오른 수사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선마궁에서 급히 법문으로 올 때도 급하게 공간 도약만을 생각했을 뿐, 진선에 오른 그녀가 이토록 빨리 찾아올 거란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도 참…. 아직 많이 부족 하구나.’
그 이유가 그녀를 한 명의 수사이기 전에 자신의 여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인 걸 깨닫고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준혁이 새삼 놀라는 사이, 천신라와 마규보 위로 떨어지던 별빛이 점점 진해지며 기이한 파동을 퍼트렸다.
‘저것이 마선봉인진이 발동하는 모습이구나.’
순간적으로 신비경의 마선봉인진이 준혁의 뇌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진법이?’
그리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생각한 순간.
파스르릇-
마규보와 천신라 발밑에 익숙한 황금빛 원형 진법이 만들어지더니 그 위로 고대 문자들이 떠올라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됐어요! 완전한 봉인식이 시작되기 전! 지금이 가장 약해질 때에요!”
그때 소화여가 희열에 찬 표정으로 준혁을 불렀고, 준혁은 곧장 뇌둔술과 함께 번쩍하는 뇌전으로 변해 천신라에게 쏘아져 나갔다.
준혁의 이동은 찰나와 같았고, 이동이 시작됐을 땐 이미 천신라의 뒤에 나타나 식검을 찔러넣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을까?
식검이 천신라를 통과했다고 여긴 순간.
천신라의 몸이 검은 구름으로 변하더니 흐물흐물 소멸해버렸다.
그리고는 떨어져 있던 마규보 앞에 뭉게뭉게 피어나더니 사람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푸욱-
사람의 형상을 띠기 시작한 구름에서 곱상한 피부를 가진 손이 튀어나오더니 마규보의 심장을 그대로 뚫어버렸다.
슈욱-
그러자 마규보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파징-
거대한 파장이 천신라로부터 파문을 일으키며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
적막이 맴도는 성채.
여기저기 부서진 잔해만 그득한 이곳은 현재 모든 게 정지 상태였다.
천신라가 마규보를 흡수한 순간,
속을 울렁이게 만드는 기묘한 파장이 주변을 덮었고, 그 즉시 천신라의 분신들이 소멸하듯 사라졌다.
분신에게조차 밀리고 있던 팔왕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동시에 살짝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에 느꼈던 파장.
그것은 선계에서 느낄 수 없는 느낌이었다.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울렁이면서도 편안해지는 기이한 기운.
한편으론 묘한 공포심을 자극했는데, 그 기운에 맞서려 하다간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만드는 울림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마규보를 흡수한 천신라는 희번덕 눈을 뜨며 황홀경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불편한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을 휙휙 저었다.
조금 전 소화여가 발동한 마선봉인진.
그것 자체는 천신라를 가두지 못했지만, 봉인진이 발동하며 발생한 황금빛 문자들이 여전히 천신라 주위를 맴돌며 그를 억압하려 하고 있었다.
“쯧.”
파리를 쫓듯 손을 휘젓던 천신라가 허공에서 발돋움하자, 발끝에서 파동이 퍼져 주변으로 퍼졌다.
투웅-
그러자 하늘에 생겨났던 틈이 메워지며 성광지력을 품은 별빛이 차츰 옅어지기 시작했다.
‘마선봉인진, 분명 효과가 있다. 헌데 화여의 수행이 안타깝구나.’
만약 소화여가 천신라와 동급이었다면, 그는 절대 봉인진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준혁은 조금씩 움츠러드는 팔왕과 점점 기세가 강해지는 천신라를 지켜보다, 더 이상 망설인다면 돌이킬 수 없다고 여겼다.
그 즉시, 준비해둔 물건을 꺼내 팔왕에게 날려 보내며 전음으로 말했다.
-저자가 결국 마규보를 흡수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정말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다들 정신 차리십시오!
휘리릭-
준혁이 날려 보낸 새카만 깃발이 팔왕에게 전달되자 전음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진대라멸진을 발동할 겁니다.
-진대라멸진?
대라멸진은 알지만 진대라멸진은 생소한 표현.
-지금 손에 쥔 깃발은 각기 다른 기운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어진 준혁의 설명에 팔왕의 눈빛이 생기를 찾았다.
서른여섯 가지 각기 다른 기운으로 운용되는 진대라멸진.
그것은 그들이 여태까지 알고 있던 진법의 지식을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제대로 발동만 한다면 천신라가 아니라 더 상위 수사라 한들 한 줌 재밖에 남지 않을 것처럼 여겨졌다.
다만 개개인이 각기 다른 네 가지 깃발을 이용해 네 개의 기운을 운용해야 했기에, 자칫 잘못하면 크게 낭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헌데 우린 여덟뿐이지 않은가? 나머지 한 명은?
각기 다른 4종의 기운을 여덟 명이 다룬다면 총합 32방.
진대라멸진은 결국 36방 대라멸진의 상위호환이었기에 한 방위라도 비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저기 숨어있지 않습니까?
준혁의 시선이 구름 사이에 떠 있는 전함을 가리켰다.
잠시 후, 준혁의 전음에 천휴림주가 허공을 도약해 근처에 나타나더니 네 개의 깃발을 받아 갔다.
사실 준혁이 말하지 않은 한 가지.
진대라멸진은 아홉이 아닌 총 열 명이 펼쳐야 했다.
진의 중추를 맡아야 하는 준혁은 깃발 운용을 배제하고 진을 움직이는 데만 집중하는 게 최상의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없는 수사를 억지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일.
하물며 이것은 분신을 이용할 수도 없었기에 대라멸진의 위력이 조금 약해지더라도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주위에 떠다니던 마선봉인진의 잔여물을 대부분 처리한 천신라가 준혁과 팔왕 등을 힐끔 보더니 소화여에게 고개를 돌렸다.
“날파리 같은 것이 귀찮아 죽겠군.”
그리고는 한 손으로 소화여를 가리키며 작게 읊조렸다.
“사라져라.”
지잉-
그 순간 소화여 주위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아무런 공간의 틈도 없는데,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로 빨려들 듯 쑤욱 사라져버렸다.
“화여!!!”
그 모습에 준혁은 재빨리 기감으로 주변과 그 너머의 먼 곳까지 살피고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장거리 도약을 하지 않는 이상 피해 갈 수 없는 자신의 기감 안에 그녀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빠르게 삼청조의 권능을 발동시킨 그는 천신라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를 어디로 보낸 것이오!”
다른 계면으로 간다 해도 유지되는 삼청조의 목소리가 전혀 닿지 않았다.
천신라는 그런 준혁을 내려보았다.
“새로운 융합을 시작하며, 잠깐 시험 좀 해보았지. 이제 찾을 수 없을 테니 굳이 심력을 낭비하지 말게.”
“어디로 갔냐 묻지 않았소!!”
곧이어 어깨를 으쓱거리던 천신라가 말했다.
“시공간의 틈이라고 할까? 시간과 공간을 왜곡해 그 사이에 처박아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