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새로운 질서
삼대 세력 중 최강이라 평가받던 선마궁.
선마궁의 궁주 천신라가 귀천했다는 소식은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뿐 아니라 법문의 수장 역시 하늘로 돌아갔으며, 두 세력의 수많은 마선들 역시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동시에 믿기 힘든 소문 역시 퍼졌다.
최준혁이라는 수사가 신선에 올랐으며, 천신라와 마규보를 귀천시킨 장본인이라는 소문이.
사람들은 경악과 함께 자세를 낮춰야 했다.
삼대 세력 중 두 곳을 궤멸시킨 신선이 어떤 자인지 알 수 없으니 심연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두 세력을 잡아먹은 그자가 그다음으로 어딜 눈독 들일지 판단할 수가 없는데.
모두가 숨을 죽이고, 눈치를 보며, 최준혁이란 수사에 대해 사방팔방으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선마궁과 법문을 제외한 다른 곳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아무 사건도 없이 지나갔다.
그렇다고 아무런 변화가 없던 건 아니었다.
선마궁은 마선들을 제외한 수사들이 모여 새로운 세력으로 거듭났다.
선마궁이 위치했던 곳이 ‘대류(大流)’라는 강 근처에 있었기에 ‘대류성’이라 새로이 명명하고, 대륙의 다른 성처럼 성주가 자리했다.
폐쇄적이던 성향이 180도 달라져, 일반성처럼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로 변했다.
반대로 법문의 살아남은 일반 수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곳곳에 작은 문파를 만들었다.
개중 몇은 법문이 위치했던 곳에 자리를 잡기도 했으나, ‘하늘의 구멍’이라 불리는 천겁의 흔적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의 여파에 금방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법문이 자리했던 장소는 이제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지역이 돼버렸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
그건 두 세력을 궤멸시킨 최준혁이란 수사가 세웠다는, ‘마선문’이라는 신비 문파의 등장이었다.
대화성 인근 어딘가에 있다고 소문이 났을 뿐, 그곳의 실체는 밝혀진 게 없었다.
심지어는 구성원이 누군지, 세력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수사의 마음을 뒤흔드는 소란이 있었으니.
-마선문에 입문하며 수행을 크게 올릴 수 있다.
-오래전 멸족당했다던 지목족, 그들의 영지에서나 만끽할 수 있던 수행증진 효과가 마선문에선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선계의 중심지는 천운대륙에서 호란대륙으로 서서히 옮겨갔다.
-대화성 성주 소우자가 모든 걸 알고 있다!
정확히는 호란대륙의 대화성으로.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삼대 세력 중 선마궁과 법문이 사라지자 천휴림 역시 활동을 줄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의 눈치를 보듯이 말이다.
***
남운대륙의 고마성.
남운대륙의 중심인 남운성의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중림으로 통하는 경계에 위치한 곳.
그곳은 교역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으며, 남운대륙에서 가장 많은 전송진이 자리해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런 고마성의 성채 중심.
발끝까지 내려오는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 깐깐한 중년처럼 보이는 사내와 얘길 나누고 있었다.
“자네, 그 소문 들었나?”
“뜬구름 잡기는, 무슨 얘긴지 말해야 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겠어?”
깐깐한 중년 사내가 생긴 것답게 트집을 잡자, 노인이 오만상을 찌푸리다 입을 열었다.
“대화성 인근에 자리 잡은 마선문 말일세.”
“마선문? 처음 듣는걸?”
“허어. 이 사람, 도통 안 보이더니 어디 땅속에서 면벽만 하다 온 건가?”
“어찌 알았어? 20년 만에 처음으로 밖으로 나온 거야. 그래서 가장 가까운 자네에게 온 거고. 잠시 몸 좀 의탁하려고.”
“…….”
상대의 무식을 지적하려던 노인은 의외의 답변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내 신색을 회복하고 말을 이었다.
“잘 듣게, 천운대륙의 주인이었던 천신라가 죽었네, 마규보 역시 말이야.”
“으잉? 그게 참말이야?”
“내가 그럼 거짓을 말하겠나? 비승 수사라 알려진 최준혁 선사가 그들을 전부 귀천시켜 버렸어.”
“…….”
하늘이나 다름없던 삼대 세력의 두 신선의 귀천 소식에 중년 사내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두 세력의 주춧돌이나 다름없는 마선들도 전부 사라졌지.”
“모두 어디로 갔는데?”
“낸들 알겠나? 소문으로는 전부 귀천했다는 얘기도 있고, 또….”
“또?”
“전부 최준혁 선사의 발아래 모였다는 말도 있지.”
“그게 가능한 소린가?”
“소문이 그리 들리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만약 두 세력에 속해있던 마선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면 그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선계의 세력 판도가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그 세력이 선계의 뜻이 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가 수련하는 동안 그런 일이 있었다니…. 짧은 시간 많은 게 바뀌었겠어.”
“그랬지. 많은 것이 바뀌었고 바뀌고 있지. 그리고 내가 이 얘길 꺼낸 건 다름 아닌 그 소문 때문일세.”
“소문?”
“모든 이야기의 중심인 최준혁 수사가 마선문이란 걸 세웠단 말일세. 그리고 그곳에 입문하면….”
“입문하면?”
노인이 말끝을 흐리자, 중년 사내가 귀를 쫑긋 세웠다.
“수행증진 속도가 수배에서 수십 배까지 빨라진다고 하네.”
“뭐이! 그게 정말이야!?”
대화의 끝. 중년 사내의 얼굴에 기이한 욕망이 들끓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 움직이려는 사람처럼.
아니, 중년 사내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친구인 노인과 함께.
***
대화성 인근.
산세가 험해 수사들을 제외한 범인은 발조차 들일 수 없는 세지곡(細支谷).
그곳에 작은 문파가 자리 잡았다.
문파의 이름은 승천문(昇天門).
대륙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종문의 이름이었다.
아니, 종문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작은 문파들도 가장 즐겨 쓰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런 승천문의 입구.
“제무무 수사. 설치가 완성됐습니다.”
“잘했네. 이로써 마선문은 그분의 뜻대로 절대 외부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야.”
준혁의 명을 받은 제무무는 세지곡에 승천문이라는 이름의 작은 문파를 만들었다.
그리고 승천문에 공천귀의 공간이자 신비경인, 모두의 보금자리로 향할 수 있는 전송진을 설치했다.
이제 신비경 주변으로 이동해 모두의 보금자리인 ‘마선문’으로 직접 이동해야 할 일을 없앤 것이다.
“헌데 제무무 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 말해보게.”
제무무는 준혁의 평정심을 흉내 내며 마치 자신이 신선이 된 것처럼 뒷짐을 쥐고 입을 열었다.
평소 제무무가 준혁을 동경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수하는 피식 웃다가 말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마선문의 노출을 꺼리는 이유가 뭡니까?”
‘최준혁 선사께서는 천신라와 마규보를 처리하고 최고 수행을 여실히 선보였는데, 왜 굳이 외부로 드러내길 꺼립니까?’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누구도 감히 허튼 생각을 할 수 없을진대, 왜 점점 더 꽁꽁 모습을 감추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쯧. 그러니 자네나 나나 아직 그분을 따라가려면 먼 것이지.”
“혹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 어렵다고.”
입술을 적신 제무무가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는 수행을 올리고자 하는 수사들의 진정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셨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수행을 올리는 것과 대외적으로 모습을 감추는 게 무슨 상관이라고? 혹시 수행증진 효과 때문입니까?”
“쯧쯧. 하나만 생각하는군. 자네 지금 수행이 어찌 되는가?”
“뭘 그런 걸…. 이제 소천경에 올랐다는 걸 알지 않으십니까?”
제무무는 머리를 긁적이는 수하를 힐끔 보다가 시선을 멀리 옮겼다.
“그럼 그동안 수련에 정진하며 수행을 올리는 것에만 최선을 다했는가? 아니면 아등바등 살아남기 위해 매진했는가?”
“당연히…. 아!!”
“이제 알겠는가? 그래. 그분께서는 수사의 삶은 고난과 혈투로 점철되어서는 아니 된다 말씀하셨네. 그런 것은 당신께서 경험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셨어. 그리고 그런 말씀도 하셨지.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은 그저 덧없는 생명 연장을 위한 것. 진정한 신선이 되기 위해 오직 수련에만 힘쓰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이야. 그러기 위해선 외부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하고.”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알쏭달쏭한 말에 수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질문했다.
“그럼 그렇게 외부의 부침 없이 수행만 올리면…. 수행을 올리고 나서는 무얼 한단 말입니까? 어차피 수행엔 끝이 없는데.”
“그렇지 않아도 말해주려 했네. 그분께서는 그런 말씀도 하셨네. 우리가 신선이 되기 위해 수행을 올리는 건, 결국 세상의 이로움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마찬가지. 훗날 만족할만한 수행에 도달하면 그때 이룩한 수행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말이야.”
“베푼다…. 라. 설마. 수행이 낮은 다른 수사들을 돕는다? 그런 말입니까?”
“작게 생각하면 그런 것도 맞겠지. 허나 나는 다른 의미로 생각하네. 같은 수사뿐 아니라 범인들까지. 그리고 범인을 넘어….”
어느새 제무무의 눈에 존경의 빛이 떠올랐다.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것. 그것이 수도자의 자세라고 그분께서 그러셨네.”
***
흑석대륙 동쪽 경계선. 서봉산맥 정상.
그곳에 자리한 계면간 전송진.
준혁은 아마르곤과 함께 하계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구에 존재했던 대륙간 결계를 제거하자 지구와 비경 간의 경계가 무너졌고, 이종족과 인간들은 서로 편하게 왕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계면간 전송진의 압박을 견딜 수 있는 원영기 이상의 수사들이 앞다투어 선계로 입장하고 있었다.
바글바글.
“많이 그립습니까?”
준혁은 수많은 인파를 바라보며 물었고, 곁에 있던 아마르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러겠습니까? 그 친구를 본 게 언제인지. 이제 얼굴도 가물가물합니다.”
규선의 수행을 공고히 다진 아마르곤이 과거의 일을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원한다면 생생한 모습으로 환영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만큼 상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예전에 보았을 때 잘 지내고 있는 걸 확인했으니, 아마 곧 올라올 겁니다.”
준혁과 아마르곤이 기다리는 한 사람.
그녀는 바로 연형기 수행을 지닌 목족의 여왕.
준혁에게 최나연이라는 가족이 있다면, 아마르곤에게는 혈족이자 친구인 그녀가 있었다.
지구에 존재하는 계면의 압박 때문에 항상 지하 깊은 곳에서 평생을 숨어 살아야 했던 비운의 천재.
“저기 왔군요.”
잠시 후, 아마르곤이 비승한 목족 무리를 가리켰고, 그곳에서 그리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선계의 영기를 만끽하려는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마르곤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번개처럼 날아왔다.
“아, 아마르곤!”
“잘 지냈습니까? 여왕이여.”
장난기 가득한 아마르곤의 음성에 목족의 여왕은 그를 와락 안았다.
그러길 한참, 준혁을 인지하고 주춤거리며 물러나더니 허리를 깊게 숙였다.
“최 수사.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준혁은 가볍게 손을 저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목족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 적유목까지 뽑아와 걱정이 많았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제 맘껏 누리시지요.”
“감사합니다. 수사.”
지구와는 달리 수행을 맘껏 표출하며 살라는 말.
목족의 여왕은 다시금 깊게 허리를 숙였고, 이번엔 준혁도 말리지 않았다.
인족들이나 하는 인사방식을 고수하는 것만 보아도 지금 얼마나 준혁에게 고마움을 느끼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어색한 인사가 끝나자 아마르곤은 목족의 여왕과 다른 목족 수사들을 데리고 족자 안으로 전부 사라졌다.
이미 목족들이 살아갈 장소가 준비돼있었고, 수련에 필요한 모든 물자가 마련되어 있어서 금방 적응할 수 있어 보였다.
약속을 이뤄냈다는 뿌듯함에 아마르곤이 어느 때보다 밝아 보여, 준혁 역시 기분이 좋았다.
그때, 준혁의 등 뒤로 익숙한 기척이 느껴지며 목소리가 전해졌다.
현재 묘립성과 대화성, 그리고 선마궁이 자리한 곳에 새롭게 문을 연 대류성까지. 몸이 열 개라도 시간이 부족한 소우자였다.
“주군.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예. 풍수(風手) 선사와 운영자(雲影子) 선사가….”
풍수, 열여섯 번째로 태어난 바람을 다루는 마선.
운영자. 서든 일곱 번째로 태어난 구름을 부린다는 마선.
“그들 역시 내게 귀속되고 싶다 하던가?”
“예. 다른 분들처럼 주군께 귀속되어 이젠 수행을 반복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셨습니다.”
준혁이 천신라와 마규보를 흡수해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소문은 마선들 사이에서만 퍼졌다.
그 후에 선계 곳곳에 숨어 살던 마선들이 직접 찾아왔다.
몇몇은 그저 주변에 머물며 자유를 보장받길 원했고, 어떤 이들은 영원한 귀속으로 반복적인 삶에서 영원히 벗어나길 바랐다.
준혁은 그들이 요구하는 걸 쉽게 허락했다.
식아를 통해 귀속되길 원하면 그렇게 해줬고, 반대로 완벽한 자유를 원하면 또 그렇게 해줬다.
어차피 그에겐 이제 의미 없는 구분.
마선경과 괴조, 그리고 마선기록방의 권능이 융합되자 모든 마선들의 위치나 행동거지가 낱낱이 파악되고 있었다.
예전과 달리 어떤 방법으로도 숨을 수 없었다. 준혁의 전매특허인 무영기를 사용하더라도 말이다.
“불러오게. 그들은 어떤 성향을 지닌 이들인지 궁금하군.”
“예,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