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막내아들-0화 (서장) (1/200)

서장.

서장

낙호곡(落虎谷)

호랑이가 떨어지는 골짜기.

누가 지었는지 참 잘 지은 지명이다.

팽가의 호랑이 수십 명이 이곳에 뼈를 묻었으니 말이다.

“도왕, 이제 네가 마지막인가.”

마교주는 눈앞의 참극을 마치 명화를 보듯 흥미로운 눈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하북팽가 최강의 타격대. 팽호대.

용맹했던 팽호대 전원은 전신이 찢겨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척박한 대지를 적시는 무수한 핏물.

그 핏물 위에 마교주는 고고히 서 있었다.

마교주의 상징인 구룡암포.

입고 있는 구룡암포에는 단 한 방울의 피도 묻히지 않았다.

“빌어먹을 새끼, 전보다 더 강해졌군.”

도왕, 팽지혁은 피를 토해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를 본 마교주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왼팔을 잃었고 가슴에는 구멍이 뚫렸다.

보통이라면 벌써 죽었을 중상이다.

그런데 팽지혁은 다시 일어나 반쯤 부러진 도를 자신에게 겨눈다.

팽지혁이 내뿜는 거대한 살기와 투기.

털이 솟고 피부가 따갑다.

사람이 아닌 거대한 불꽃을 상대하는 듯하다.

“직접 키운 놈들이 죽어도 개의치 않나.”

그럴 리가 있겠냐.

제 살이 찢겨나가는 기분이다.

팽지혁은 반문하고 싶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모든 신경을 마교주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 괴물 앞에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미세한 흔들림도 없는 철혈의 눈빛.

마교주가 직접 이곳까지 찾아오게 한 이유. 마교주는 침으로 입술을 적셨다.

어찌하면 저 눈빛을 사그라트릴 수 있을까.

마교주는 팽지혁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는 대신 입을 열었다.

“팽가주가 본교에 항복 서신을 보낸 것은 알고 있나?”

마교주를 겨누던 도가 잘게 흔들렸다.

“뭐?”

“본좌는 너와 팽호대를 요구했다. 팽가주가 수락하더군. 이게 그 결과다.”

팽지혁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부여잡고 있던 정신이 흩날리는 느낌.

가주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팽호대를 이끌고 낙호곡으로 가라. 본가의 운명이 너희에게 달려있다.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지 않고 그저 재촉하기만 했다. 하북팽가 가주의 명령이다.

팽지혁의 눈이 머금던 빛이 흐려졌다.

이를 본 마교주의 입이 살짝 비틀어졌다.

“이런 꼴을 보자고 싸워온 것이 아닌데.”

팽가를 위해 평생을 살아왔지만 결국 팽가에게 버려졌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지금쯤이면 팽가는 깔끔하게 지워졌을 테니.”

마교주의 한 마디에 팽지혁의 눈빛이 다시 힘을 되찾는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강렬한 안광이 쏘아졌다.

그 눈빛의 의미를 읽은 마교주가 입을 비틀었다.

“본좌가 항복을 받아들일 줄 알았나. 네가 죽으면 이제 무림에 팽 씨를 가진 이는 존재하지 않겠지.”

격노한 팽지혁은 고함을 지르며 도를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목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팔은 힘이 빠져 오히려 도를 땅에 떨구었다.

팽지혁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검게 물든 손이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팽지혁은 가슴에서 뿜어지는 피 분수를 보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텅 빈 눈동자에 지난 인생이 스쳤다.

이름도 없이 떠돌던 고아.

전대 가주에 의해 거두어진 고아는 팽지혁이라는 과분한 이름을 받았다.

누군가의 양자가 아닌, 그저 성만 받고 가문에 소속된 것 뿐이지만 만족했다.

처음으로 온기를 느낄 수 있었으니.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안식처.

하북팽가.

피도 섞이지 않은 고아 출신이라는 멸시.

현 가주를 비롯한 직계의 질투와 경계.

이 모진 환경에서도 팽지혁은 몰락해가는 팽가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싸워나갔다.

하북팽가는 자신의 삶, 그 자체였다.

‘다 부질없구나.’

몰락하는 팽가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다.

하지만 지탱하기만 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저 버티기만 하면 잘 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

틀렸다.

팽가 그 자체가 되어야 했다.

썩어가는 팽가를 바꿀 수 있는 권위와 힘.

‘만약 내가 가주가 될 수 있었다면 지금과 달랐을까.’

불꽃처럼 살아왔지만 남은 것은 재처럼 남은 후회뿐이다.

아득한 어둠이 자신을 덮치는 것을 느끼며 팽지혁은 눈을 감았다.

기지개를 펴는 호랑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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