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단전에는 하북팽가의 기본 심법인 소호심법(小虎心法)의 내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말 모자랐나 보군.’
다른 형제들은 가주의 직계인 만큼 혼원벽력신공을 수련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팽무성은 그 많은 구결을 외우지 못해 소호심법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놀란 이유는 소호심법 때문이 아니었다. 팽무성의 온 신경은 비정상적인 전신 혈맥을 향해 있었다.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그야말로 탄탄대로.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근골이 다르다.
몸 내부의 혈맥도 마찬가지.
혈맥의 크기와 강도가 다르고 선천적으로 쌓인 탁기의 정도가 다르다.
이 때문에 똑같은 심법과 시간으로 운기를 해도 몸에 쌓이는 내공의 양이 사람마다 다르다.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를 바꾸는 것은 불가했다.
그렇기에 무림인들은 뛰어난 심법과 영약으로 내공을 쌓아 막혀있는 다른 혈맥을 뚫고 탁기를 배출하려고 온갖 노력을 쏟는다.
내공이 움직이는 길을 늘리고 혈맥을 보다 정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팽무성의 혈맥은 놀라울 정도다.
혈맥이 넓고 튼튼했고 탁기가 거의 없어 정순했다.
마치 오랫동안 수련한 고수의 혈맥을 보는 듯했다. 무언가 특이한 체질인 것은 아니지만 선천적인 무골(武骨)인 것은 분명했다.
이 몸은 무공을 위해 존재했다.
마치 전설 속의 천무지체가 실제로 있다면 이 몸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라면 조금 욕심을 부려볼까.’
팽무성은 한 가지 심법을 떠올렸다.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
특유의 패도적인 기운은 단순히 위력만 비교하자면 무림의 심법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괜히 이름에 신공(神功)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팽무성은 구결을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 도왕이라는 별호를 얻었을 때 혼원벽력신공과 혼원벽력도를 얻을 수 있었다.
혼원벽력신공은 그 내공의 성질 때문에 다른 심법으로 먼저 혈맥을 키우고 단련시킨 다음 익히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팽무성의 혈맥은 어지간한 고수의 혈맥에 못지않았다.
팽무성은 소호심법이 아니라 혼원벽력신공의 구결로 운기를 시작했다.
우웅
혼원벽력신공도 결국은 소호심법에 뿌리를 두고 있어 무리가 없었다.
구결에 따라 잠들어 있던 내공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내공이 천천히 혈맥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무색이었던 소호심법의 내공이 점차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혼원벽력신공의 내공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호쾌하게 질주하는 혼원벽력신공의 내공.
넓고 깨끗한 혈맥은 내공이 막힘 없이 뻗어 나가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정말 아깝네, 이런 몸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오성이 받쳐주질 못했다니. 이를 두고 하늘의 장난이라고 하는 건가.’
팽무성은 살짝 흥분된 마음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이 몸은 무공이라는 이름의 물을 담기에 최적인 그릇이다. 이전에는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면 지금은 팽무성이 그 구멍을 완전히 메꾸었다.
남은 일은 그릇을 채우는 것이다.
‘이 정도 육체라면 천무지체, 극무지체 같은 특이체질도 전혀 부럽지 않다.’
무인으로서 열정과 호기심이 솟는다.
이대로라면 예상보다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과연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 * *
팽무성은 무공 수련을 시작했지만 바로 도를 잡지 않았다. 도를 잡기 전에 제대로 몸을 만들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팽무성은 잘 알고 있었다.
기본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팽무성은 빼어난 근골을 타고났다. 그렇다 해도 단련되지 않은 몸은 그저 일반인에 비해 뛰어난 것에 불과했다.
지금은 제대로 된 무인의 몸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담금질이 우선이었다.
팽무성은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는 무릎을 굽히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마치 말을 타는 자세.
모든 무림인이 거쳐 갔을 자세. 마보였다.
처음에는 한 시진이 지나면 슬슬 허벅지가 저리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지금은 온종일 해도 땀이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게다가 수족에는 수련용 무쇠팔찌를 차고 있었다. 모래주머니는 무게가 가벼워 수련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말 달라지셨어.”
팽무성이 수련하는 것을 철호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체력 단련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열등감에 무공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를 터.
솔직히 철호는 사공자가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 도움을 요청할 줄 알았다.
하지만 사공자는 묵묵히 해냈다.
마치 한 번 해본 것처럼 혼자서 계획을 짜서 체계적으로 체력 단련을 해내었다.
철호가 보기에도 효과적인 단련으로 느꼈다.
이전의 사공자는 단순히 덩치가 큰 속 빈 강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된 체력 단련으로 만들어진 근육이 그 안을 채우고 있었다.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무복.
그 위로 탄탄하게 갈라진 사공자의 몸이 엿보였다.
‘정말 가능성이 있을지도.’
지금의 사공자가 방구석의 둔재라고 불렸다고 누가 믿을까. 사공자는 사소하지만, 확실히 변화를 보여주었다.
팽무성이 수련을 끝내자 철호는 팽무성에게 뛰어갔다.
“고생하셨습니다, 사공자.”
“고맙다.”
철호는 미리 준비해둔 수건과 물을 팽무성에게 건네주었다.
팽무성은 물을 받아서 목을 축였다. 그러면서 수건으로 흘린 땀을 훔쳤다.
“몸은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제 내일부터 도를 잡아야겠어.”
“본가의 장로들께 청해서 가르침을 받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기꺼이 도움을 주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팽무성은 사공자의 오성에 혀를 찼다던 팽가의 어른들을 떠올렸다. 이 육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니 그때 장로들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얼마나 답답하고 아까웠을까.
“글쎄다.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를걸.”
팽무성이 어렸을 때야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팽무성의 근골에 오성만 받쳐주었다면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걸출한 무인을 배출했을 테니 말이다.
가주의 직계자손이 다 장성한 지금은 다르다. 본가는 소가주 경합이 가까워지는 시기이다. 잘못하면 사공자의 편을 든다는 정치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대공자와 이공자가 제일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 장로들이 있는 원로원이었다.
“가르침은 필요 없다.”
팽무성의 단호한 대답에 철호는 따로 부연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크게 혼나기만 했던 기억 때문에 내켜 하지 않는 듯했다.
‘직접 경험해보면 아시겠지. 사공자께서 수련하실만한 도법을 골라놔야겠어.’
거처에 돌아온 팽무성은 가월과 철호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공용식당이 있었지만 가월은 사주각에 딸린 작은 주방에서 직접 매 끼니를 요리해 팽무성과 철호를 먹이고 있었다.
“가월아. 혹시 내가 예전에 쓰던 도가 아직 있나?”
팽무성은 방금 요리해서 김이 나는 오리고기를 젓가락을 가르며 말했다.
크게 기대를 하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과거의 팽무성도 무공을 수련한 적이 있기에 혹시나 하고 물어본 것이다.
“아, 내일부터 도법을 수련하신다고 들었어요.”
어느새 철호가 가월에게 말했나보다.
“그래.”
“제가 예전에 쓰시던 도를 창고에서 미리 꺼내놨어요.”
“잘했어. 지금 한번 보자.”
식사 중이었지만 아무래도 무인인지라 자신이 쓸 도의 상태를 보는 것에 더 흥미가 갔다.
가월은 밖에 나가서 도 한 자루를 품에 안고 뒤뚱거리며 들어왔다.
원래 팽무성이 쓰던 도라 했지만 그리 손길이 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도병을 잡고 천천히 도를 뽑자 매끈한 도신이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보고 팽무성은 살짝 놀랐다.
“녹이 전혀 슬지 않았군.”
팽무성이 무공을 포기하고 도를 놓은 지 오래되었다. 가월의 말을 들어보면 긴 시간을 창고에 처박힌 듯한데 놀라울 따름이었다.
“예전부터 철 호위께서 주기적으로 도를 살폈어요.”
“가월.”
철호는 그만하라는 듯 제지했지만 이미 말을 다 해버린 가월이다.
팽무성이 말없이 쳐다보자 철호는 부끄러운 듯 살짝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별생각은 없었습니다. 사공자께서 언제든 도를 사용하실 수 있게 하려고 했습니다.”
철호는 홀로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주인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날 때를.
팽무성은 가월과 철호를 번갈아 보더니 이빨이 보이게 웃었다.
“정말 고맙다.”
철호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가월은 말없이 오리 다리를 뜯어 팽무성과 철호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팽무성은 이 두 사람을 보며 든든함을 느꼈다.
철호.
다른 곳으로 가면 마음껏 날개를 펼 수 있는 실력자다. 철호는 나이에 비해 무공이 뛰어나고 충심이 강해 공자들이 다 자신의 호위로 점찍은 사내였다.
가주의 명령으로 사공자의 호위가 되었지만 다른 곳에 눈을 팔지 않고 사공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진정한 호위무인이었다.
‘전생에서는 안타까웠지.’
전생에서 팽무성이 죽은 뒤 대공자가 철호를 거두려고 했지만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밉보여 한직으로 밀려나 전쟁 중에 생을 마감했다.
팽무성은 어느 정도 힘을 되찾으면 철호를 직접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럴 가치가 있는 무공과 재능을 소유하고 있다.
팽무성은 언젠가 다시 팽호대를 창단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팽호대의 대주는 철호가 맡게 될 것이다.
팽무성은 철호에게서 고개를 틀어 가월을 잠시 바라보았다. 언제나 한결같은 눈으로 자신을 챙기는 헌신적인 가월.
‘무공을 어느 정도 되찾으면 그때 얘기를 해봐야겠네.’
팽무성은 솔직히 가월을 잘 알지 못했다.
전생에서 가월은 평탄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가월은 평범한 시비가 아니었다. 정체가 무엇이든 지금은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들을 보니 빨리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을 이루는 것도, 지키는 것도 힘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자연스레 도갑을 쥔 팽무성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 * *
하북팽가 장서각.
하북팽가의 무공 비급이 모여있는 곳이다.
여느 문파가 그러듯이 하북팽가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다.
장서각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은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며 살짝 놀랐다.
장서각에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이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공자.”
“고생한다.”
무인들의 인사에 사공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갔다.
팽무성과 철호가 장서각으로 모습을 감추자 입을 다물던 무인들은 입을 열었다.
“사공자가 웬일이지? 거처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던 분이 아닌가.”
“어허, 소식이 늦네. 사공자가 요즘 몸을 단련하고 계시는 것을 모르는가. 다시 무공을 익히려는 것이겠지.”
“허어, 이제야? 몇 달 후면 생일 아니신가?”
올해로 스무 번째 생일을 맞는 팽무성.
벌써 약관이다.
다섯 살부터 무공을 익힌 다른 공자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늦기는 했다.
거기다 둔재여서 무공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와 무공을 배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이대로 방구석에서 평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이지.”
“이제 약관인데 무공을 수련해서 무얼 하겠나. 다 굳은 몸과 머리로 절정은 밟을 수나 있을까.”
발동이 걸린 무인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절정에 오른다 해도 문제네. 마음이 약해 상대에게 도를 겨누지도 못하는데, 무공을 펼칠 수는 있겠나?”
“그만하게. 크흠.”
신이 나서 떠들고 있던 무인은 동료의 손짓에 고개를 돌렸다.
장서각에 들어간 줄 알았던 철호가 살벌한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 듣고 있던 것이다.
“이번은 사공자를 모시고 있으니 그냥 넘어가겠네. 입조심 하시게.”
“흠흠.”
무인들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장서각 경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장서각에 들어온 팽무성과 철호의 시선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흐음.”
팽무성과 철호는 네 권의 비급을 보고 있었다. 모두 철호가 가져온 것이었다.
팽무성은 비급을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사공자. 다 배우지 않겠다니요?”
“말 그대로다. 네가 가져온 것 중에 익힐 게 하나도 없다.”
“음.”
철호는 턱 밑까지 올라오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도대체 왜?
기지개를 펴는 호랑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