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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막내아들-6화 (7/200)

6화

가주의 부름.

팽영대주의 말에 뒤에서 듣고 있던 철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가주는 가주전에 칩거한 지 오래다. 동생이자 가주 대리인 팽연후를 제외하면 얼굴을 본 이가 극히 드물었다.

당연하게도 가주전으로 따로 사람을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바로 가도록 하지.”

팽무성은 의복을 갖춰 입고 팽영대주와 함께 바로 가주전으로 향했다.

어느새 가주전의 앞에 도착하자 팽무성은 괜히 멈춰 서서 의복을 정돈했다.

가주를 만날 생각을 하니 벅차올랐다.

이 솟구치는 감정을 가라앉혀야 했다.

전생의 팽지혁에게 팽진연은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팽진연은 가주라는 직책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팽지혁을 신경 썼다.

오죽하면 가주의 숨겨진 자식이 아니냐는 헛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그 덕에 공자들이 질투했지만 팽무성은 엇나가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

팽무성이 눈짓하자 팽영대주는 보고했다.

“가주, 사공자를 데려왔습니다.”

“들여보내라.”

가주의 명령에 입구를 지키고 있던 팽영대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팽무성이 집무실로 들어오자 다시 문이 닫혔다.

“가주를 뵙습니다.”

예를 표하고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다탁에 앉아있는 수척한 중년인이었다.

현 하북팽가의 가주 팽진연.

살이 빠져 본래의 체형보다 왜소했고 눈 밑에 짙은 그늘이 졌다. 병자의 행색을 한 팽진연을 담는 팽무성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서렸다.

‘역시 이번에도 무리를 하신 겁니까.’

병마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니었다. 팽진연을 괴롭히는 것은 주화입마였다.

어느 순간부터 하북팽가의 가주에게 주어진 하나의 숙명.

반쪽짜리 혼원벽력도의 복원.

팽진연처럼 혼원벽력도에 파고든 가주는 드물었다. 복원에 성공하면 팽가가 비상하고 다시 오대세가에 속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연구에서 깨달음을 얻고 성과도 보였다. 하지만 과도한 집착 탓일까, 팽진연은 결국 주화입마에 빠지고 말았다.

전생에서도 팽진연은 죽는 순간까지 혼원벽력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 마지막 모습을 상기하는 팽무성의 표정이 살짝 착잡해졌다.

반면 팽진연은 의아해했다.

“막내야, 뭔가 많이 변했구나.”

팽진연은 막내의 변한 인상을 한눈에 알아보고 있었다.

팽무성을 위아래로 훑는 눈은 매서웠다. 주화입마로 인해 고생하지만, 그 눈빛만은 여전히 무시 못 할 힘이 녹아있었다.

“요즘 몸은 어떠신지요.”

팽무성이 안부를 물었지만 팽진연은 별일 아닌 듯 가볍게 답했다.

“여전하다, 그나저나.”

팽진연의 날카로운 눈이 팽무성을 겨냥했다.

“셋째가 너에게 맞았다고 들었다.”

비무가 끝나고 반 시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소식을 이미 팽진연이 알고 있었다. 병석에 있지만, 팽진연의 존재는 여전히 팽가의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절대적 위치였다.

팽진연의 직설적인 말에 팽무성은 웃었다.

“맞습니다. 제대로 두들겨 팼지요.”

팽무성의 어이없는 대답에 팽진연은 눈매를 좁혔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허허.”

힘없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형을 팼다고 하는 당당한 모습에 팽진연은 결국 웃고 말았다. 그저 분위기가 변했나 싶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막내는 많이 변한 모양이다.

“원래 형제는 언제나 투닥거리는 법이지. 그렇지만 네가 이겼다는 것은 믿기가 힘들구나.”

팽진연은 팽소혁을 어떻게 이긴 것인지 묻고 있었다.

최근에 막내가 무공을 다시 익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예전에 둔재로 판명 난 막내다. 스스로 무공을 포기하고 방구석에 처박힌 시간은 제법 길었다.

나이를 먹은 이후에 무공을 익힌다고 달라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셋째를 꺾을 줄이야.

셋째의 무공이 뛰어난 것은 아니나 놀라운 일이다.

“앞으로도 놀라실 일이 더 많을 겁니다.”

팽무성은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강해서 이겼으니까.

팽진연은 달라진 막내의 얼굴을 지긋이 보더니 물었다.

“흠. 다시 무공을 익힌다니. 무슨 바람이 든 것이냐. 소가주 경합에라도 참여하려는 것이냐.”

“맞습니다. 곧 있을 월간회의에 직접 선언할 생각입니다.”

단호한 대답.

팽진연은 그냥 해본 소리였다. 그런데 막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팽무성이 경합에 참여한다는 의중을 보이자 팽진연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자신이 알던 막내아들은 없었다.

팽진연은 팽무성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살수 때문에 사선을 넘을 뻔한 막내.

죽다 살아난 팽무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죽을 뻔한 경험이 변화시킨 건가, 아니면.’

팽진연은 뒷말을 삼켰다.

언제나 고개를 숙여 땅만 보던 막내는 어느새 꼿꼿이 고개를 들고 굳건한 눈빛을 내보이고 있었다.

소심하고 유약한 모습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당당한 포부와 패기가 차지했다.

-가주님. 팽가를 지키는 최강의 도가 되겠습니다.

팽무성을 보는 팽진연의 눈이 살짝 아련해졌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팽진연은 할 말을 망설이는 듯 입술을 꿈틀거리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지혁이에게 인사는 했느냐.”

팽무성은 살짝 놀란 눈으로 가주를 쳐다보았다. 먼저 팽지혁에 대한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내가 아끼는 아이였다. 재능도 넘쳤고 본가의 자손들보다 팽가를 사랑하는 아이였지.”

팽무성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입이 쉬이 열리지 않았다.

팽진연은 잠시 망설이더니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너에게는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너를 보면 이미 죽은 지혁이가 떠오르는구나.”

팽무성의 눈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속내와 달리 담담히 대답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를 맴도는 공기는 무겁지 않았다.

팽진연은 달라진 아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정확한 계기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막내가 확실하게 뜻을 세웠다는 것이 보였다.

“최선을 다해라.”

그 이후로 대화를 더 나누고 팽무성은 가주전을 나갔다.

“후우.”

홀로 남은 팽진연은 이미 죽은 팽지혁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팽지혁은 다른 가솔들이 느낄 정도로 대놓고 아끼던 아이였다.

그랬기에 가솔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팽씨 성을 내리기도 했었다. 계속 팽지혁이 팽가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내심 다섯 번째 아들이라 여길 정도.

그런 팽지혁을 굳이 팽무성의 호위로 보낸 이유. 모든 것을 포기한 막내가 팽지혁을 보고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팽지혁은 이를 훌륭히 해낸 듯 보였다.

“고맙다, 편히 쉬어라. 아들아.”

팽진연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말을 홀로 내뱉었다.

* * *

팽무성과 철호는 팽가 안에 있는 대로를 걷고 있었다.

“사공자, 안녕하십니까.”

“그래.”

중간중간 만나는 가솔들은 인사를 하면서도 팽무성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의 끝에는 허리춤의 도갑에 향했다.

팽무성이 갑자기 무공 수련을 시작했다는 소문은 팽가에서 다 아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삼공자를 비무에서 두들겨 팼다는 소식은 하루 만에 모든 가솔들이 알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팽무성은 그 호기심이 섞인 시선을 가볍게 넘기고 있었다.

“가솔들이 신기하게 바라보는군.”

“아무래도 예전의 공자님과 다르니까요.”

“그래, 많이 달라질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

팽무성의 자신감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철호의 입도 자연스레 호선을 그렸다.

팽무성의 발걸음이 멈췄다.

오늘의 목적지는 이 거대한 전각이었다.

창호전.

하북팽가의 대소사가 정해지는 곳이다.

월말마다 팽가의 방향에 대한 회의가 열리는 곳이다.

이 회의에는 본가의 요직을 맡은 중진이나 앞으로 본가를 이끌어나갈 공자들만 참석할 수 있는 자리였다.

철호는 창호전을 바라보는 팽무성의 등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사공자는 아무런 힘도, 배경도 없었다. 회의에서 괜히 다른 공자들의 악의에 물릴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철호는 도중에 걸음을 멈추었다.

“사공자, 저는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미루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철호는 팽무성이 조금이라도 때를 늦춰 충분히 힘을 키우기를 바랐다.

팽무성의 나이는 이제 약관이니 시간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정작 팽무성은 생각이 달랐다.

“지금도 많이 늦었다.”

대공자와 이공자는 막내인 팽무성과 제법 나이 차가 있었다. 셋째인 팽소혁만 하더라도 팽무성과 다섯 살의 차이가 났다.

이들은 옛적에 협호행을 마치고 자신의 세력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력을 이끌고 팽가의 일을 하나씩 맡으며 실적을 쌓고 능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팽무성이 아직 협호행을 아직 완수하지 않았기에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경합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출발선이 다른 경쟁이.

팽무성이 확고히 뜻을 정한 듯 보이자 철호는 더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회의에서 나를 습격한 놈들을 조사한 내용도 나온다더군.”

팽무성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개소리를 할지 궁금할 따름이다.

“어서 오십시오, 사공자.”

팽무성이 창호전의 앞으로 향하자 회의장의 입구를 지키던 무인들이 예를 표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듯 무인들은 제지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음?”

“사공자가 아닌가.”

회의장으로 들어가자 거의 모든 좌석이 채워져 있었다.

본가를 이끄는 중진들.

소가주 자리를 두고 경쟁할 형제들.

팽무성을 쳐다보는 눈빛에 호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팽무성은 입꼬리를 올렸다.

여유로운 웃음을 비췄다.

“사공자가 본가의 어른들을 뵙습니다.”

당당하고 힘찬 목소리.

자연스레 포권을 하는 팽무성.

기억 속의 팽무성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

순간이지만 회의장의 모든 사람이 팽무성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선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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