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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막내아들-9화 (10/200)

9화

사릉문주는 낮에는 제자들과 식사를 하지만 저녁은 별채에서 따로 가족들과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 먼저 일어나 볼게요.”

“그래, 푹 쉬어라.”

먼저 방을 나서는 둘째 딸을 사릉문주는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후우.”

사릉문주는 목이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후우, 오늘 아니면 내일인가.”

한숨이 연달아 나왔다.

이런 상황에 두 발 뻗고 잠잘 수 없었다. 어제부터 옆에 검을 두고 밤새 신경을 곤두세웠다. 종일 밤을 새우고 낮에 쪽잠을 자는 것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 탓인지 사릉문주의 눈은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다.

“오늘 밤도 무사히 넘겨야 할 텐데.”

사릉문주는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 * *

하늘에 뜬 그믐달은 구름에 가려 그 빛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좋은 밤이다.”

전각의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백음마. 어김없이 백색 무복을 입은 깔끔한 차림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백음마는 몸을 날렸다.

경공이 제법 수준에 오른 것을 보여주듯 땅에 착지하는 백음마는 일체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사릉문을 지키는 것은 담장 곳곳에 밝혀진 횃불뿐이었다.

백음마는 이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쉽군.”

몸을 낮춘 채로 백음마는 곧장 별채로 나아갔다. 잠자고 있는 차녀의 몸을 탐닉할 생각을 하니 절로 흥분이 되었다.

방으로 향하는 백음마의 걸음이 살짝 빨라졌다. 별채의 정원을 가로질러 정원 쪽으로 난 방문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드륵

천천히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워낙 작은 소리였기에 잠을 곤히 자는 차녀가 깰 리는 없었다.

일곱 걸음.

백음마와 차녀의 거리였다.

백음마가 침으로 입술을 핥았다. 이제 이 여인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일만 남았다.

백음마는 검지를 들었다. 아혈을 짚어 소리를 못 내게 할 생각이었다.

서걱

무언가 잘리는 소리.

방금 문을 열 때보다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백음마에게는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방금까지 붙어있던 검지가 툭 떨어졌다.

크게 떠진 눈에 핏줄이 솟았다.

‘크아악!’

백음마는 피가 쏟아지는 손을 움켜쥐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억눌렀다.

‘어느 틈에?’

만약 손가락이 아니라 바로 목을 베었다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통에 몸부림치던 백음마의 머리가 빠르게 식어갔다.

백음마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이럴 수가.’

방구석에는 한 사내가 거짓말같이 서 있었다. 사내가 들고 있는 도는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음마는 저 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른 것을 직감했다.

‘저렇게 덩치 큰 놈이 서 있는데 몰랐다고?’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만약 손가락이 잘리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것이다. 백음마는 등이 어느새 축축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크읍.’

백음마는 소리를 지를 수 없으니 이를 악물고 있었다.

놈은 그저 도를 들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 하나 보는 듯이.

백음마는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자신과 사내의 거리를 가늠했다.

일곱 보.

이제 은밀함은 필요 없었다.

백음마가 밟고 있는 바닥이 푹 들어갔다.

전력으로 내공을 끌어내며 몸을 날렸다. 사릉문주의 차녀를 노리고 있었다.

‘이년을 잡아야 산다.’

백음마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저 거구를 따돌리고 사릉문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인질이었다.

푸른 빛이 어른거리는 손이 차녀에게 뻗어갔다. 백음마의 귓속에 팽무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같은 놈들이 생각하는 게 뻔하지.”

작게 속삭였으나 백음마는 명확하게 들었다. 팽무성의 소매가 흔들렸다.

장심에서 뿜어진 장력이 백음마를 방 밖으로 밀어냈다. 힘을 절제했기에 별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다.

차녀는 곤히 잠든 상태였다. 팽무성은 차녀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밖으로 나섰다.

백음마는 한쪽 무릎을 꿇고는 몸을 떨고 있었다. 자신을 밀어냈던 사내의 장법.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럽게 밀어내는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마주한 자신은 철판으로 짓누르는 듯한 무거움을 느꼈다.

그 충격에 전신의 뼈가 흔들렸고 고통이 올라왔다. 백음마가 바로 도망을 안 치고 정원에서 빌빌거리는 이유였다.

드륵

정원과 이어진 문을 닫고 나서야 팽무성은 입을 열었다.

“청빙음마는 잘 있냐?”

“뭐?”

사내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이름이 튀어나왔다.

청빙음마,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사부.

백음마는 청빙음마를 떠올리자 안 그래도 구겨졌던 얼굴이 아예 일그러졌다.

“반응을 보니 맞는 것 같네.”

팽무성은 달라진 백음마의 태도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부터 도망칠 궁리만 하던 놈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게다가 오히려 팽무성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백음마는 결국 제 목소리를 드러냈다.

“이런 시골에 너 같은 고수가 있을 리가 없지. 그래, 사부가 보낸 거냐.”

백음마의 양손에 서린 푸른 한기.

주위의 공기가 빠르게 싸늘해졌다.

백음마는 팽무성을 청빙음마가 보낸 추적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백음마가 파문 제자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목숨의 위협을 느꼈으니까.

‘내가 순순히 내어줄 것 같으냐.’

청빙음마의 무공은 성교를 통해 여인의 음기를 흡수하는 흡음귀공(吸陰鬼功)과 흡수한 음기를 바탕으로 펼치는 빙공인 청빙음령공(靑氷陰嶺功)이다.

본래 청빙음마의 제자는 백음마가 유일했다. 하지만 청빙음마는 새로운 제자를 들였다.

백음마가 보기에도 사제는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하지만 백음마는 사제에게 질투나 열등감을 가질 새가 없었다.

청빙음령공의 특성상 음기를 쌓을수록 그 성취가 빨라졌다.

청빙음마는 굳이 제자를 둘이나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직전제자 한 명이면 충분했다.

청빙음마는 백음마의 음기를 빼앗아 둘째 제자에게 줄 생각이었다.

백음마에 대한 연민은 조금도 없었다.

그 의중을 알아차린 백음마는 바로 사도천을 빠져나와 무림을 떠돌았다.

청빙음마는 추적자를 보냈지만 백음마는 여태껏 잡히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처절하게 버텨온 덕이었다.

“갈 곳 없이 떠돌며 버틴 것이 삼 년이다. 네놈 따위에게 잡힐 것 같으냐.”

백음마는 팔을 교차하며 쌍장을 내질렀다.

냉기를 품은 장력이 뿜어지고 지나간 자리에 옅은 서리가 생겼다.

삼 년을 떠돌며 제법 많은 여인에게 음기를 흡수한 듯 냉기가 매서웠다.

하지만 팽무성의 도와 만나면 살을 에는 냉기도 움츠러들었다.

도의 날에만 옅게 띠고 있는 붉은 기운.

그것은 혼원벽력신공의 내공이었다.

팽무성은 적은 내공을 지녔기에 효율적으로 내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부족한 내공은 섬세한 운용으로 보완했다.

도가 호쾌하게 냉기를 갈랐다.

“얼려주마.”

청빙한령공과 짝을 이루는 청빙귀장.

사파의 무공답게 악랄한 구석이 있었다.

전신의 요혈과 급소를 노리는 살초.

양손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팽무성의 전신을 노렸다.

백음마의 경지는 일류의 끝자락.

그 증거로 백음마의 양손에는 불안정하지만, 수기(手氣)가 서려 있었다.

절정을 넘보고 있는 고수가 살기를 품고 달려드니 제법 매섭다.

하지만 팽무성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피하지도 막지도 않는다.

그저 베어내고 또 베어낼 뿐.

이것이 철혈맹호도의 근간이자 극의.

굳건한 두 다리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대호요목(大虎搖木).

커다란 호랑이가 나무를 흔든다.

대호요목을 펼치자 무게가 실린 묵직한 도격이 백음마의 장력을 갈라놓았다.

“크학.”

백음마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생각지도 못한 부상이었다.

도와 정면으로 충돌한 백음마의 오른손에 옅은 혈선이 그려졌다.

내공이 우월한 것은 분명 자신이다. 그런데 저 미약한 내공에 밀려서 손바닥이 베였다.

‘내공의 질이 나보다 한 수 위라고?’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백음마는 멈칫거렸다. 팽무성은 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도는 유려한 곡선을 그렸고 백음마의 어깨에는 핏물이 솟구쳤다.

백음마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백음마는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침착했다. 이 정도에 흔들렸다면 진작 청빙음마의 추적에 잡혀 죽었을 것이다.

한 번이면 충분하다.

백음마는 승기를 노리고 있었다.

손이 팽무성의 몸에 한 번만 닿는다면 그대로 얼려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팽무성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솨사솩

백음마가 호기롭게 선공을 펼쳤지만 몰아치는 것은 팽무성의 도였다.

쌍장이 현란하게 허공에 서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간결하게 베어오는 도에 밀려나고 있었다.

‘어째서냐.’

허공을 메우던 굵은 서리가 흩어졌다.

자신의 청빙귀장이 무력하게 분쇄되고 있었다.

도는 끊임 없이 베어내며 점점 가까워졌다. 간결하게 뻗으며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도격.

이를 본 백음마는 점점 위기를 느꼈다.

“크흑.”

백음마는 고개를 틀어 도를 피해냈다.

그래도 왼쪽 볼에 피가 튀었다.

팽무성을 얼리기는커녕 도를 막기에 급급했다.

쏴앙

팽무성의 오른발이 땅에 박히며 힘이 제대로 실렸다.

하단에서 사선으로 솟구치는 도.

백음마는 좌장을 내질러서 튕겨냈다.

하지만 힘에서 밀려 자세가 뒤틀렸다.

그대로 오른쪽으로 땅을 굴러야 했다.

백음마는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공을 둘러 손을 보호했음에도 손바닥이 깊게 베였다. 조금만 더 들어갔다면 그대로 손바닥이 잘렸을 것이다.

양손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길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저 덩치가 모든 점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나를 가지고 노는군.”

직접 손을 섞다 보니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상대가 마음만 먹었다면 금방 끝났을 것이다.

“훅.”

숨을 고르던 백음마는 좀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에 서린 붉은 기운.

극양의 내공, 그것도 제법 정순해 보였다.

청빙음마가 부리는 수하에 저런 극양의 내공을 다루는 이가 있었던가.

“너 설마.”

팽무성은 코웃음 쳤다.

“그걸 이제 알았냐. 그 눈치로 여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용하네.”

신력을 지닌 거구의 육체.

극양의 내공과 강맹한 도법.

이 모든 조건이 부합되는 한 곳이 있었다.

“하북팽가에서 왔구나.”

백음마는 입맛을 다셨다.

얼굴을 보아하니 팽가의 후기지수인 것 같았다. 또래의 성취를 보면 백음마의 성취는 그래도 뛰어난 편이었다.

그런데 자신보다 어린놈에게 무력하게 밀리니 자존심에 금이 가고 있었다.

팽무성은 백음마의 표정을 보며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게 남의 집 앞마당에서 왜 설치고 다녀.”

“후후. 하북에서 마음 놓고 활동하려면 언가의 앞마당보다는 팽가의 앞마당이 낫지 않겠냐.”

백음마는 진주언가에 밀려 예전 같은 성세를 보이지 못 하는 하북팽가의 현 상황을 꼬집어 말하고 있었다.

팽무성의 눈에 한기가 서렸다. 순간이지만 청빙음령공의 냉기보다 서늘했다.

“그래?”

팽무성은 도를 허공에 내리그었다.

이전과는 살짝 달랐다.

예리한 도풍이 정원을 갈랐다.

백음마는 도가 땅을 향할 때야 움직였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백음마는 오른쪽이 허전함을 느꼈다. 뒤늦게 오른팔이 잘린 것을 알았다.

“끄아아악!”

백음마는 이번에는 고통을 참을 수 없었다. 비어버린 오른쪽 어깨를 잡는 왼팔이 부르르 떨렸다. 팽무성은 어느새 백음마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아프냐? 나는 사파 놈들에게 자비를 베푼 적이 없어. 이건 너에게 겁탈당한 여인들에 대한 죗값.”

팽무성은 꿈틀거리는 백음마의 귀에 속삭이고는 다시 도를 들었다.

“그리고 이건 감히 하북팽가를 모욕한 죗값.”

한 번 더 허공을 가르는 도.

사릉문의 차녀가 손수 키운 정원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꽃 위에 떨어진 왼팔이 꿈틀거렸다.

“하북팽가의 영역에서 설치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 알겠나.”

“개자식이 내 팔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두 팔.

급격하게 밀려오는 무력감과 허무함.

고통을 참으며 겨우 뜬 백음마의 눈에 솥뚜껑처럼 커다란 팽무성의 손이 비쳤다.

“호랑이 굴에 들어왔으면 물릴 각오는 했어야지.”

* * *

별채의 뒤쪽에서 사릉문주와 철호는 팽무성과 백음마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밤중의 소음을 그 두 사람은 놓치지 않았다.

팽무성의 손아귀에 잡혀 축 늘어진 백음마. 눈도 깜짝하지 못하고 지켜본 격전이 순식간에 끝났다.

팽무성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

사릉문주가 감탄했지만, 철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쿵쿵

철호는 자신의 심장이 격하게 요동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흥분을 감추기 힘들었다.

첫 실전, 생사결을 훌륭하게 해낸 팽무성.

이를 보고 철호는 확신했다.

잠들었던 맹호가 숨긴 이빨을 드러냈다.

깨어난 맹호의 울음소리는 무림을 진동시킬 것이다.

* * *

백음마를 잡았으니 임무는 끝났다.

하지만 이곳에서 할 일이 남아있었다.

전생에 백음마가 팽소혁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었던 두 번째 변수.

그 변수를 차지할 차례였다.

이 임무를 자원한 것도 그 두 번째 변수를 얻기 위함이었으니 팽무성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쌍귀산의 백음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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