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팽무성은 백음마의 힘줄을 베어내고 점혈을 통해 내공을 봉했다.
거침없는 조치에 옆에서 보던 철호도 혀를 내둘렀다. 정말 이럴 때면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고수를 보는 듯했다.
팽무성은 혹여나 백음마가 도망칠 가능성을 없애버리고 철호에게 맡겼다.
그러고는 홀로 쌍귀산으로 향했다.
오성봉
쌍귀산의 봉우리 중 하나의 이름.
이 봉우리는 쌍귀산의 산세 중에서도 음기가 매우 짙었다.
낮에도 귀곡성이 울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서늘하네.”
나무가 울창해 햇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러니 대낮이지만 마치 해가 진 듯 어두웠다.
거기에 음기가 충만하니 극양의 내공을 지닌 팽무성도 가끔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이곳은 전생에 백음마가 도망쳤던 봉우리이기도 했다.
임무 보고서만 보면 왜 굳이 산을 올라서 도망쳤나 싶었는데 직접 와보니 알겠다.
나무가 울창한 것은 물론이고 산세가 험했다. 이런 곳에서 한 번 발자취를 놓치면 추적은 힘들 것으로 보였다.
지형을 직접 보니 백음마를 놓치지 않고 봉우리 끝까지 몰아넣은 전생의 팽소혁이 제법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팽무성은 경사진 산길을 묵묵히 올랐다.
오르면 오를수록 음기가 강해졌다.
이제야 겨우 녹음이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시기다.
그런데 팽무성의 입에서는 허연 입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면 기이할 정도였다.
“정상 쪽에 동굴이 있었다 했지.”
팽무성은 오성봉의 정상 부근을 샅샅이 뒤졌으나 동굴을 찾지 못했다.
어딘가 놓치는 게 있는지, 다시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높게 솟은 절벽과 절벽을 타고 길에 늘여진 넝쿨뿐이었다.
“절벽 위를 올라가 봐야 하나.”
팽무성은 고개를 들어 넝쿨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넝쿨을 만지작거리던 팽무성의 손짓이 멈칫거렸다.
넝쿨이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게다가 넝쿨 사이로 한기가 흘러나왔다. 팽무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절벽에서 한기가 흘러나올 리가 없을 터.
도가 뽑혀 나와 빛을 발산했다.
꼬이고 꼬여 하나의 벽을 이루던 넝쿨을 베어내자 안쪽에서 불어온 한풍이 팽무성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백음마는 이곳을 용케 발견했군.”
쫓기는 틈에 어떻게 이 동굴을 발견한 것인지. 어쩌면 살길을 찾던 간절함이 이 동굴을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장정도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입구. 팽무성은 허리를 살짝 접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동굴의 길은 아래로 향했는데 다행히 가면 갈수록 동굴이 넓어지는 구조였다.
동굴 안은 어지간한 겨울보다 추웠다.
크고 작은 고드름이 내려왔고 간간이 안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설원의 칼바람 같았다.
“후우.”
짙은 입김이 흘러나왔다. 팽무성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내공이 전신 혈맥을 빠르게 돌자 추위가 빠르게 가셨다. 하지만 추위를 온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한참을 내려가고 나서야 끝이 보였다.
동굴의 끝을 보는 팽무성의 눈이 커졌다.
영약 하나를 먹고 백음마의 무위가 폭증했다길래 평범하지 않을 것은 예상했다.
“백음마가 이걸 먹었을 줄이야. 엄청난 기연을 얻었었군.”
영약 자체도 귀하지만 음기와 양기, 한쪽으로 쏠린 영약은 더욱 희귀했다.
팽무성은 조심스레 동굴 끝에 있는 조그마한 풀밭으로 다가갔다.
풀밭은 특이하게도 연한 푸른빛을 냈다. 마치 얼음으로 조각된 풀잎 같았다.
하지만 그 신기한 광경도 팽무성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얼음 풀밭의 유일한 한 떨기 꽃.
달빛을 머금은 순백의 꽃잎에는 다섯 개의 푸른 열매가 맺혀있었다.
팽무성은 이 꽃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오월빙화(五月氷花).
영약에 담긴 기운은 빙정이나 만년설삼에 비해 약간의 손색은 있다.
하지만 오월빙화의 장점은 그 기운이 유순한 데 있다.
빙정이나 만년설삼은 먹는 이가 고수이거나 운기를 도와줄 고수가 없다면 오히려 영약의 기운에 압도당해 생명이 위험하다.
하지만 오월빙화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가 먹어도 아무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기운이 유순한 만큼 흡수도 더 수월했을 터. 백음마는 오월빙화를 먹고 그 무위가 단숨에 몇 계단을 뛰어올랐을 것이다.
“이런 기연을 얻고도 결국은 잡히다니.”
전생의 백음마는 팽소혁의 추적을 따돌린 후 일 년 뒤에 결국 잡혀서 끌려갔다.
백음마를 잡은 이는 자신을 도망자 신세로 만든 사제였다.
오월빙화를 살피던 팽무성은 소매에서 미리 준비해둔 보합을 꺼냈다.
음기가 가득하다고 유명한 쌍귀산에서 발견된 영약. 정체는 몰랐지만, 음기를 머금은 영약인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극양의 내공을 다루는 팽무성에게는 그다지 효과가 없는 영약이다.
하지만 팽무성에게 꼭 필요한 영약이기도 했다.
“오 년 이내에 빙궁에 들러서 빙정을 가져오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사라졌네.”
팽무성은 마치 자신이 먹을 영약을 챙기듯 세심한 손길로 흙을 파냈다.
마치 눈을 만지는 듯 손이 시렸다.
흙을 보합에 먼저 채워 넣고 오월빙화로 손을 뻗었다.
오월빙화의 효능이 있는 것은 꽃잎과 열매.
줄기에서 조심스레 꽃잎을 따내서 보합 안에 넣었다.
오월빙화는 보관만 잘한다면 효능이 그대로 지속하는 종류였다.
팽무성은 어느새 차가워진 보합의 뚜껑을 닫아서 소매 안에 집어넣었다.
팽무성은 무복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백음마의 두 번째 변수는 팽무성의 계획에 새로운 변수가 되었다.
“좀 더 빨리 찾아가도 되겠어.”
* * *
“이제 떠나려는 것이오?”
“예, 이곳에서 할 일은 다 끝났으니 말입니다.”
쌍귀산에서 내려온 팽무성은 바로 사릉문주를 찾아갔다. 이제 본가로 돌아가야 하기 위함이었다.
사릉문주는 팽무성이 백음마의 팔을 베는 광경을 또렷이 기억했다. 조만간 팽무성의 명성이 무림을 울릴 것을 직감했다.
“사공자, 정말 고맙소.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사릉문주는 자신보다 어린 팽무성에게 포권을 하며 고개 숙이는 것을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차녀도 함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팽 소협, 정말 감사합니다.”
사릉문의 차녀는 물기 섞인 눈으로 팽무성을 바라봤다. 아버지에게 뒤늦게 얘기를 들었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음마라는 색마에게 노려지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부녀가 비슷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원래라면 피눈물을 흘렸을 두 사람이 웃는 모습에 팽무성도 입에 호선을 그렸다.
“두 분, 고생하셨습니다.”
* * *
하북성 천진.
하북팽가가 자리를 잡은 곳이다.
천진의 대로에는 수많은 양민이 지나고 있는데 그 시선이 한데 모이고 있었다.
먼지와 흙으로 더럽혀진 백색 무복은 원래의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백음마는 허리에 묶인 포승줄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비어있는 양쪽 소매는 처량하게 펄럭였다.
행인이나 상인들은 백음마를 바로 알아보고 욕을 하거나 침을 뱉고 있었다.
“저놈이 백색마인가 백음마인가 하는 놈이로군.”
“천인공노할 놈일세. 찢어 죽여야 하는데.”
하북팽가의 사공자가 하북의 여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백음마를 잡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럼 뒤에서 걷는 커다란 이가 팽가의 사공자이신가 보군. 처음 보네그려.”
“그래, 덩치만 봐도 알겠어. 듬직하구만.”
“요새 팽가가 조용했는데 오랜만에 이름을 날리니 뿌듯하군.”
백음마의 포승줄을 잡은 철호의 입꼬리는 미세하고 들뜨고 있었다.
백음마를 욕하는 이도 많지만 이를 잡은 사공자에 대한 칭찬이 더 많았다.
당연히 자랑스러울 수밖에.
“철호.”
“예, 사공자.”
뒤에서 뒷짐을 지고 따라가던 팽무성은 걷는 방향을 틀었다.
“들를 곳이 있어. 먼저 본가에 가도록. 오래 걸리지는 않아.”
철호는 따라가고 싶으나 팽무성이 홀로 가는 연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알겠습니다.”
팽무성은 대로에서 점점 멀어졌다.
나무의 뿌리처럼 끊임없이 갈라지는 골목.
팽무성은 거침없이 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팽무성의 뒤를 몰래 쫓는 이가 있었다. 일전에 팽무성을 쫓던 흑의인이었다.
팽무성의 걸음이 빠르고 골목은 길이 복잡했다. 자칫하면 놓칠 수가 있었다.
다급함에 속도를 높이고 꺾인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흑의인은 자신의 복부를 향해 솟구치는 발을 발견했다.
하지만 흑의인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유연한 움직임. 흑의인의 몸은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그 덕에 간신히 각법을 피해냈다.
“피해?”
팽무성은 헛발질을 한 발을 그대로 땅에 내려찍었다.
쿵
진각에 땅이 울렸다. 흑의인은 그에 맞춰 몸을 띄워 그 여파에 벗어났다.
예상한 대로 흑의인의 상황판단은 빨랐다.
거기에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팽무성은 그 앞을 읽고 있었다.
팽무성의 양쪽 소매가 거칠게 펄럭였다.
양손에 호기로운 기세가 실렸다.
손바닥에 강맹함도 더해지니 팽무성의 양손은 두 마리 호랑이와 같았다.
후웅
펼쳐진 쌍호장법. 양손이 합을 이루어 흑의인을 좌우에서 압박했다.
쌍방을 선점한 팽무성은 흑의인을 골목의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었다.
별다른 반격은 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던 흑의인은 결국 벽에 등을 마주해야 했다.
쾅
팽무성의 좌장이 흑의인의 얼굴 바로 옆에 꽂혔다.
마치 호랑이가 앞발로 후려친 듯했다.
벽에 꽂힌 손바닥을 뽑자 그대로 벽이 허물어졌다.
팽무성은 가면 아래로 비친 두 눈을 마주했다.
“정말 익숙한 눈매네.”
팽무성은 흑의인의 가면을 벗겼다.
“그렇지? 가월.”
가면 아래 드러난 것은 본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을 가월의 얼굴이었다.
“공자님.”
굳게 다물었던 가월의 입이 열렸다.
“가월, 너는 누구냐.”
팽무성의 물음에 가월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그 붉은 입술을 질끈 물고 있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때 평소의 온화함과 천진함은 더는 없었다.
“공자님.”
가월의 눈에는 이전에 볼 수 없던 칼날 같은 예기가 서려 있었다.
주목받는 호랑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