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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막내아들-13화 (14/200)

13화

하늘의 색이 점점 변하는 이른 아침.

닫혀있던 팽가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웬일인지 대문에 가솔들이 모여있었다.

오늘은 팽무성이 협호행을 떠나는 날이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팽무성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이 중 절반은 공자들의 세력에 속하지 않는 중립이었고 나머지는 팽중혁에게 속해있었다. 아마 팽중혁이 배웅에 나섰기에 따라온 것으로 보였다.

“받아라.”

팽중혁은 팽무성에게 손바닥 크기의 납작한 상자를 쥐여주었다.

“외가의 금창약이다. 어지간한 금창약보다 효과가 좋으니 필요할 때 써라.”

팽무성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소매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둘째 형님.”

팽중혁은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내를 드러냈다.

“막내가 강호에 나서는데 형님과 소혁이는 나와보지도 않는군. 나중에 내가 한소리 할 것이다.”

이에 팽무성도 실소를 터트렸다.

그나마 형제 같은 모습을 보이는 유일한 이가 팽중혁이었다.

“괜찮습니다,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습니다.”

“그래, 강해져서 돌아와라. 형제 중 유일하게 너에게 기대를 하고 있으니. 이 년 뒤에 시원하게 겨루어보자.”

과연 무공에 미친 팽중혁스러운 인사였다.

팽중혁을 시작으로 가솔들이 저마다 덕담과 조언을 해주었다. 그나마 짧게 끝나서 다행이었다.

선두에 서 있던 팽무성이 제일 먼저 문간을 넘어 밖으로 나섰다.

팽무성은 평소와 달리 제대로 의복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팽가의 무인들이 입는 호랑이가 수놓아진 붉은 무복. 그 위로 흑색의 장포를 걸쳤다.

팽무성의 얼굴은 미남의 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특유의 굵은 선을 가져 남성적인 매력을 한껏 보였다. 거기에 멋들어진 의복이 받쳐주니 제법 빛이 났다.

“이리 보니 봐줄 만한 하구나. 강호를 돌아다니면서도 꾸준히 신경 쓰거라. 보는 눈이 많다.”

팽연후는 팽무성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협호행에 나서니 외견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이제 강호는 팽무성에게서 지금의 팽가가 어떤 모습인지 엿보게 될 것이다.

팽무성은 손에 들고 있는 행낭을 어깨에 들쳐멨다. 가월이 준비해준 것인데 원래는 행낭이 세 개나 되던 것을 팽무성이 간추려서 하나로 줄인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팽무성은 가솔들에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미리 갈 곳을 정해 두었는지 팽무성의 발은 거침없이 앞으로 향했다.

“일단 그것부터 챙겨야겠지.”

* * *

팽무성은 하북을 벗어나 산서로 향했다.

그것도 산서 북쪽의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서성 대동(大同).

현재 팽무성이 지나고 있는 위치였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주변은 황량해지고 보이는 사람은 드물어졌다.

팽무성은 쭉 이어지는 적막한 풍경을 보며 잠시 전생의 추억에 빠져들었다.

짓궂은 웃음을 짓는 한 땡중.

정마대전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광승(狂僧). 검제와 더불어 자신과 제일 잘 맞았던 친우였다.

“빌어먹을, 아미타불.”

“욕을 하던지, 불호를 외든지 하나만 해라.”

지적에도 광승은 술을 들이켜기만 했다. 중이 술을 마시는 광경이지만 팽지혁은 여러 번 봐서 아무렇지 않았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무슨 소문?”

“철무련, 그놈이 젊은 적 얻은 기연이 천살불이 남기신 영약과 무공이라는 거 말이다.”

광승이 소리치듯 말하자 팽지혁도 놀라 되물었다. 천살불이 소림에 있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냐?”

“그래, 직접 손을 섞어보니 알겠더라. 천살불의 무공이 그런 놈의 손에 넘어가다니. 소림은 대체 그때 뭘 한 거야?”

광승은 쥐고 있던 술병을 그대로 깨트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알았다면 당장 달려갔을 거다. 그리고 바로 철무련 놈의 엉덩이를 걷어차야지.”

“미친놈.”

팽지혁은 광승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날카로운 북방의 칼바람이 팽무성을 추억에서 빼냈다.

“훗.”

광승과의 대화를 떠올리던 팽무성은 피식 웃었다. 전생에서도 광승 때문에 많이 웃었다.

“전생에 갚지 못한 빚, 이번에 갚아주마.”

천살불의 기연은 팽무성에게도 필요했지만 광승에게도 필요했다.

하나의 기연으로 두 사람이 성장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이곳이로군.”

팽무성이 도착한 곳은 무주천의 남서쪽 벼랑을 파서 만든 석굴사원, 운강석굴이었다.

전생에 철무련이 얻었다는 기연. 그 기연을 가로채기 위해 이곳까지 향한 것이다.

운강석굴은 벼랑을 사람의 손으로 직접 깎아 굴을 만들고 그 굴 안에 부처가 조각된 곳이다.

다만 그 굴의 수가 워낙 많고 길이 복잡해 일종의 미로와도 같은 곳이었다.

운강석굴에 기거하는 승려나 석공조차 운강석굴 전체의 길을 아는 이는 없었다.

작정하고 기연을 찾으려고 해도 힘든 조건이었다. 더구나 철무련은 아무것도 모르고 운강석굴에 온 것이니 정말 기연이었다.

-지장보살을 모신 굴에 사조께서 직접 깎으신 참회동이 있었다더라.

전생에서도 운강석굴의 기연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다. 기연을 얻은 철무련이 거의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림도 뒤늦게 운강석굴로 무승을 파견했지만 얻은 것은 없었다.

팽무성은 광승이 들려준 얘기를 토대로 수색 범위를 좁혀나가고 있었다.

“혹시 지장보살을 모신 굴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팽무성은 지나가는 노년의 석공에게 물었다.

“지장보살은 오화동 쪽으로 가보시오.”

운강석굴이 워낙 컸기에 구역을 나누고 이름을 정해 관리하고 있었다.

“혹시 오화동 안에 참회동이라는 동굴이 있습니까.”

참회동이라는 단어에 석공의 입술이 씰룩였다.

“내가 예전부터 이곳에 있었지만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소.”

“감사합니다.”

팽무성이 포권을 하자 석공은 고개를 까닥이고 등을 돌렸다. 팽무성은 노인의 표정 변화를 봤지만 일단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입구에 오화동(五華洞)이라 새겨진 동굴도 들어가자 지장보살이 팽무성을 반겼다.

전각 이 층 정도의 거대한 크기였다.

이만한 규모의 불상을 오로지 정과 망치로 깎아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장보살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팽무성은 지장보살의 등 뒤로 이어지는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서 작은 동굴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다행히 저마다 이름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를 덜었다.

벌써 여러 이름을 보았건만 참회동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가 없었다. 잘못 왔다기보다는 무언가 놓친 느낌을 받았다.

“직접 깎았다고 했었지.”

빠른 걸음으로 동굴의 입구에 새겨진 이름만 살피던 팽무성이다. 동굴 자체를 섬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벽과 바닥까지 살핀 지 어느새 한 시진이다. 멈출 줄 모르던 팽무성의 눈과 손이 한 동굴에서 멈추었다.

‘도구를 이용해서 깎은 게 아니네.’

세월이 지나 결이 많이 뭉개졌지만 팽무성은 알 수 있었다.

오화동의 다른 동굴들은 정과 망치 같은 도구를 이용해 바위가 깎였다.

하지만 이 동굴은 아니었다.

“손으로 벽을 파버렸어.”

운강석굴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무공의 흔적이었다.

팽무성은 동굴을 살피던 고개를 들었다.

일엽동(一葉洞).

그런데 왜 참회동이 아니라 일엽동일까.

팽무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동굴의 이름이 양각으로 새겨진 것에 비해 일엽동만 음각으로 새겨졌다.

마치 본래 있었던 이름을 지우고 새로 새긴 것처럼 보였다.

팽무성은 일엽동으로 들어갔다.

일엽동 안을 걸을수록 이 앞에 기연이 있다는 생각은 확신이 되고 있었다.

벽면 곳곳에서 권법, 조법, 장법 등 여러 가지 무공의 흔적이 보였다.

마치 벽을 상대로 무공을 펼친 것처럼.

팽무성의 발걸음이 멈췄다.

동굴의 끝에서 팽무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막다른 벽이었다.

팽무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을 뻗어 한참 동안 벽을 쓰다듬더니 갑자기 도병을 잡았다.

그대로 펼쳐진 발도술. 도갑에서 그대로 빛살이 뿜어져 나와 석벽을 후려쳤다.

우웅

도가 석벽을 베었다 하기에는 어색한 소리가 울렸다. 금이 가거나 깨지는 소리가 아닌 무언가 울리는 소리였다.

자신의 발도술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석벽을 보고 팽무성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도신에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불꽃처럼 솟구치던 내공은 도신을 따라 뒤덮었다.

조금 무리를 한 덕에 희미하게나마 도기를 씌울 수 있었다.

다만 내공의 총량이 부족하니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웠다.

백음마와 싸울 때와 달리 내공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팽무성이었다.

맹호비산(猛虎飛山).

직선형의 도기가 그대로 도극에서 튀어나와 석벽을 꿰뚫었다.

현재 내공으로 펼칠 수 있는 철혈맹호도의 초식 중 위력이 으뜸이었다.

콰앙

우우웅

좁은 통로에서 펼친 것이라 주변의 동굴이 지진이 난 듯 울렸다.

폭음이 울리고 비산맹호가 직격한 석벽은 크게 떨리더니 서서히 투명해지며 사라졌다. 석벽이 사라지자 숨겨진 통로가 드러났다.

보통 사람이 보면 놀랄 일이나 팽무성은 차분하게 그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이 정도의 진법을 보네.”

강호에는 진법이라 하여 자연의 이치를 사람의 힘으로 비트는 공부가 있었다.

환영이 동굴의 길을 막고 있었던 것도 진법의 힘이었다.

다만 방금처럼 단순한 환영이 아닌 어느 정도 물리력까지 지닌 환영은 고등의 진법으로만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팽무성은 힘을 잃은 진법을 넘어 계속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제법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반 각 정도를 더 걷고 나서야 동굴의 끝이 보였다.

끝에는 둥글게 깎인 작은 공동이 있었다.

누군가 실제 생활했는지 공동의 입구 쪽에는 땅을 파서 만든 작은 연못이 있었다.

팽무성은 연못을 한 번 보고 공동 안으로 걸어갔다.

공동에는 가부좌한 목내이(木乃伊 : 미라)가 있었다.

목내이가 걸친 낡은 승복과 공동에 굴러다니는 염주알이 생전의 신분이 승려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팽무성은 그 목내이를 잠시 바라보더니 의복을 정돈하고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말학 후배가 소림의 천살불을 뵙습니다.”

천살불(千殺佛). 헌연.

헌연은 타고난 살기가 짙고 성정이 불과 같았다. 스스로 다스리기 위해 불도(佛道)를 걷는 무승이 되었다.

수십여 년을 이어온 불심(佛心)은 사파와의 전쟁에서 덧없이 스러진 소림 제자들의 죽음으로 무너져 내렸다.

마음의 빈 자리는 솟구치는 살심(殺心)이 대신했다.

헌연은 곧바로 소림사를 뛰쳐나왔다.

핏빛 길을 걸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천살불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이를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파문당하고 무림 곳곳을 떠돌았다.

그런 헌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운강석굴이었다.

사파와 인연이 좋지 않은 천살불이다.

그런 천살불이 남긴 기연을 사도천의 후계자가 얻었으니 광승이 날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번에 그럴 일은 없다.

철무련 대신에 팽무성이 이 자리에 있으니 말이다.

팽무성은 천살불의 목내이 앞에 놓인 목함을 보았다. 이 공동 안에서 이 목함 만이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아 보였다.

목함 자체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꾸준히 관리해온 것으로 보였다.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당신이오?”

팽무성은 목함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맞네.”

팽무성의 말에 숨어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팽무성에게 길을 알려준 석공이었다.

“당신은 누구요.”

팽무성의 질문에 석공은 천살불의 목내이를 흘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천살불의 기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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