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막내아들-22화 (23/200)

22화

팽무성은 산서에서 하남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급히 이동하지 않고 여유를 가졌다.

저 멀리 보이는 낙양을 보고 팽무성은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낙양이 눈앞에 보이니 소림사가 있는 숭산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당분간 산적은 볼 일이 없겠네.”

팽무성은 산서에서 오는 만큼 수많은 산을 넘어야 했고 도중에 산적을 여러 번 만났다. 산채를 네 곳이나 때려 부쉈으니 슬슬 귀찮아질 때였다.

그래도 중간에 숨겨진 맛집을 찾았으니 아예 손해는 아니었다.

팽무성은 낙양에서 하루 정도 머물고 바로 숭산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이 있었지.”

팽무성은 입맛을 다셨다.

낙양을 보니 머릿속을 스치는 장소가 있었다.

전생에서 가보겠다고 생각만 하고 결국 방문하지 못한 곳이었다.

“음, 가볼까.”

산보하듯 걸어가던 팽무성의 신형이 늘어지며 쭉쭉 뻗어 나갔다.

낙양은 여러 왕조가 도읍으로 정한 도시였던 만큼 문화, 경제 등의 여러 분야가 고루 발전한 곳이기도 했다.

그만큼 전통 있는 음식점도 많았는데 만두라는 요리 하나로 낙양에 자리 잡은 독보적인 음식점이 있었다.

“결국, 혼자 와버렸네.”

팽무성은 가게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더니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죄다 만두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팽무성이 들어서자 점소이가 허리를 굽히며 맞이했다.

“거의 막바지에 오셨네요. 운이 좋으십니다요. 하핫.”

이 가게는 만두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일정한 양만 만들어서 판매했다.

그래서 때를 잘못 맞추면 만두를 못 먹고 발길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다.

“만두 세 판을 먹고 싶은데.”

덩치가 커서 그런지 배 안에 들어가는 양도 남들과 달랐다. 팽무성의 말에 점소이는 곤란한 웃음을 보였다.

“어쩌지요, 이제 남은 것은 두 판뿐입니다.”

“두 판도 괜찮습니다.”

“예이, 감사합니다.”

점소이는 점심 장사의 끝을 알리기 위한 팻말을 들었다. 가게 문에 걸어 놓기 위함이었다.

값을 치르려고 전낭을 꺼낼 때 가게에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새로 들어온 손님 같았다.

“아, 설마 다 팔렸어요?”

“예, 방금 마지막 판까지 다 팔렸습니다.”

“에이, 저녁에 다시 와야 하나.”

점소이와 대화하며 한탄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낭을 꺼내던 팽무성의 손이 멈췄다.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팽무성은 덜컥 고개를 돌렸다.

한 여인을 본 팽무성의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옅은 녹빛의 경장.

움직이기 편하게 개량되어 무림의 여인들이 많이 입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경장이라 무공으로 균형 잡힌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 매혹적인 곡선은 팽무성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여우상의 앙큼한 인상을 지닌 미녀.

정리된 머리에는 옥잠 대신에 나비 모양의 암기인 비접(飛蝶)과 대침 두 개가 교차 되어 꽂혀있었다.

얼굴은 화려한 미모를 지녔는데 의복과 머리모양은 단아하니 상반된 매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팽무성이 아는 여인 중 머리에 보란 듯이 암기를 꽂고 다니는 여인은 단 한 명이었다.

‘화련.’

전생에서 사패라 불렸던 젊은 고수들.

검제, 도왕, 광승, 독희.

이들은 정마대전 당시에 뭉쳐다니며 마인들을 휩쓸었다.

사패가 앞에 서고 그 뒤를 팽호대가 받쳐주면 무서울 게 없었다.

독마종의 마인들 마저 떨게 했던 독공의 소유자.

이 여인이 훗날에는 독희(毒姬)라고 불렸다.

“응?”

당화련은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팽무성을 보자 휘어진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그늘이 진 당화련의 표정에 팽무성은 입을 열었다.

“두 판을 시켰는데 같이 드시겠습니까?”

커다란 사내의 갑작스러운 제안.

당화련은 부드럽게 거절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내의 무복을 보고 입술을 오므렸다.

잠시 고민하던 당화련은 화사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대신 값은 제가 치를게요.”

두 사람이 빈자리에 앉을 때 점소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가져왔다.

“와아.”

당화련은 만두를 보며 짧은 탄성을 지르더니 팽무성의 눈치를 보고 멋쩍게 웃었다. 팽무성은 웃으며 손짓했다.

“먹읍시다,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으니.”

“아, 넵.”

당화련의 젓가락질은 마치 토끼를 낚는 매와 같이 재빨랐다. 순식간에 만두 하나가 사라졌다.

“아, 으, 뜨거워.”

만두를 입에 바로 넣은 당화련은 호호거리며 먹고 있었다.

예를 중시하는 명가의 영애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너는 여전하구나.’

격식을 차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던 당화련.

전생에서도 많이 봐왔던 모습이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로웠다.

‘결국은 이렇게 같이 먹네.’

전생에 식도락 여행을 약속했던 사람도, 팽무성에게 이 가게를 알려준 이도 전부 독희 당화련이었다.

전생에서 이루지 못한 일을 지금에서야 해내니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었다.

팽무성의 시선이 느껴지자 당화련은 급히 입을 가렸다.

“읍, 못 볼 꼴을 보였네요.”

“훗, 아닙니다.”

팽무성도 만두를 입에 집어넣었다.

“후후.”

팽무성의 입에서도 김이 솟아올랐다.

팽무성이 자신과 똑같이 만두를 먹자 어색했던 당화련의 얼굴이 서서히 풀렸다.

“만두에 정신이 팔려서 통성명도 못 했네요. 저는 사천당가의 당화련이라 해요. 혹시 팽가의 사공자 되시나요?”

먼저 당화련이 자신을 알아보자 팽무성은 살짝 놀랐다.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저는 며칠 전에 호북에서 올라왔는데, 거기서도 유명해요. 패호도라는 별호도 생기셨던데요.”

당화련은 이미 소문을 다 들었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패호도(覇虎刀).

태원의 상인들에 의해 팽무성의 일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정파에 기개 넘치는 후기지수가 등장했다며 기뻐했다.

호사가들은 팽무성의 패도적인 행보를 보며 패호도라는 별호를 붙여주었다.

“원래는 팽 소협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하북팽가의 무복을 보고 혹시 소문의 팽 소협이 아닌가 싶었죠.”

팽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화련이 왜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당화련은 천생 무인이라 강자들에게 관심이 많았으니까.

당화련의 관심은 무공, 독, 맛있는 음식, 이 세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팽무성의 짐작대로 당화련은 만두를 오물거리며 팽무성을 살피고 있었다.

‘팽가라 그런지 몸은 좋네, 외공도 수련하나? 흠, 느껴지는 게 없어, 확실히 보통은 아니야. 한 판 붙어보고 싶긴 한데 초면에 예의는 아니지.’

당화련은 손이 근질거려서 괜히 소매 안의 암기를 만지작거렸다.

팽무성은 쏘아지는 뜨거운 눈빛을 느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당 소저는 지금 오가행 중이십니까.”

“네, 제갈세가에 들렀다 오는 길이에요.”

오가행(五家行).

오대세가 출신의 후기지수들이 다섯 가문을 돌면서 경험도 쌓고 교류를 하며 오대세가 간의 결속을 다지는 용도였다.

팽가도 한때는 오가행을 했으나 오대세가에서 방출되고 오가행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호위가 보이지 않는군요.”

명문의 후기지수가 강호에 나갈 때는 호위를 딸려 보내거나 그들을 인솔할 어른이 따라가기 마련이었다.

도산검림의 강호에 후기지수를 홀로 내보내는 곳은 무천궁이나 남궁세가, 하북팽가 정도로 극히 드물었다.

“일 년 전에 호위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냥 여행이나 다름없었죠.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혼자 나왔어요.”

팽무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솔들에 대한 애착이 제일 강한 곳이 사천당가다.

당화련은 쉽게 말했지만, 그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을 터였다. 더구나 당화련은 여인이 아닌가.

그만큼 당화련의 무공이 뛰어남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혼자 다니니까 편해요,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독을 연구하기도 좋고요. 이번에 낙양에 방문한 것도 독 때문이에요.”

팽무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낙양에 당 소저가 관심 가질 독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낙양은 독과는 거리가 많이 멀었다.

“이번에 낙양에서 흑상의 경매가 열려요, 거기에 희귀한 독이 나온다는 정보가 있어요.”

흑상은 비정기적이지만 경매를 열었다.

흑상이 여는 경매인만큼 그 물품은 하나같이 귀한 것들이었다.

다만 흑상을 자주 이용하는 손님 중에서도 일부만 초대하기 때문에 아무나 경매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잠깐.’

흑상의 경매를 떠올리던 팽무성의 젓가락이 멈췄다.

전생의 당화련은 커다란 흉터를 가지고 있었다.

흉터에 대해 물었을 때 후기지수 시절에 경매를 습격 했던 괴인들에게서 생긴 상처라고 들은 기억이 났다.

‘그 경매가 설마 흑상의 경매였나.’

그때 당화련이 자세하게 얘기를 하지 않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팽무성은 흑상의 경매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림인들이 다닐만한 경매는 극히 드문 탓이었다.

‘흑상의 경매를 습격이라.’

흑상은 드러난 정보가 없어 그 규모조차 알 수 없는 곳이다. 지닌 역사가 깊어 숨겨진 힘이 대단하다는 추측이 있을 뿐이었다.

오죽하면 사도천과 무림맹도 흑상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런 흑상을 감히 습격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전생에서는 흑상이 마교의 군자금을 지원했었지.’

이 사실에 무림은 흑상이 원래 마교의 하수인이었다는 측과 무력에 의해 흑상이 굴복한 것이라는 측으로 갈라지기도 했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결국 아무도 몰랐다.

‘흑상을 습격했다는 괴인들이 마인이라면?’

전생의 당화련은 생존자가 자신과 흑상의 경매자 둘 뿐이라 했었다.

그것도 전세가 불리해지자 천협검객이라는 협객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어서 가능했다고 들었다.

도망치는 과정도 험난했는지 당화련의 등에는 그때 입은 상처가 큰 흉터로 남아있었다.

‘흑상은 기대할 수 없다,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하나.’

습격 했던 괴인들이 정말 마인이라 할지라도 폐쇄적인 흑상이라면 정보가 밖으로 드러날 확률이 낮았고 외부에 도움을 청할 확률은 더더욱 낮았다.

흑상은 강호의 평화와 안정보다는 자신들의 손익을 맞추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전생에서도 당화련의 부상에 격분한 사천당가가 흑상에 괴인들의 정보를 요구했지만 흑상은 묵묵부답이었다.

고민하는 팽무성의 눈이 깊어졌다.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한 팽무성의 추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경매에 참여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겼다.

“저, 팽 소협?”

“아, 예.”

“만두를 죽일 듯이 노려보시길래요.”

당화련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팽무성이 집고 있는 만두를 봤다.

젓가락에 힘이 너무 들어가 만두소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저도 흑상의 경매에 참여해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아쉬워서 말입니다.”

“흐음.”

당화련은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쥐고 있던 젓가락이 계속 까딱거렸다.

이대로 식사만 하고 헤어지기에는 아쉬웠다.

사천당가는 흑상을 애용했기에 경매의 초대장 하나쯤은 더 구할 수 있을 듯 싶었다.

결정을 내린 당화련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팽 소협. 그럼 저랑 같이 갈래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도 흑상은 가봤지만, 경매 참여는 처음이거든요. 지인이랑 같이 가면 든든하고 좋죠.”

‘다행이네.’

미끼를 던졌는데 의외로 쉽게 물었다.

팽무성은 전생의 당화련을 떠올리며 먹힐 만한 수를 계산하고 있었는데 수고를 덜었다.

“감사합니다, 당 소저.”

팽무성은 당화련을 보며 웃더니 문득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교, 어쩌면 생각보다 일찍 만날지도 모르겠어.’

스산한 팽무성의 눈에는 미약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팽 소협.”

팽무성을 부르는 당화련의 목소리는 살짝 들떠있었다.

당화련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제가 초대장을 구해드리는 대신 저랑 비무 한 번 하시죠.”

마치 도발을 하듯이 당화련이 흘리는 기세가 팽무성을 감쌌다.

독공을 주로 다루는 당가의 특징 때문일까.

당화련이 내뿜는 음산한 기세는 무언가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화악

당화련의 기세가 단번에 흩어졌다.

오히려 쏟아지는 팽무성의 기세가 당화련을 삼키려 들었다.

이에 당화련은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눈을 반짝였다.

팽무성은 여유롭게 마지막 만두를 삼키며 말했다.

“내가 거친 편이라 비무를 하면 다칠 텐데.”

당화련이 붉은 입술이 올라갔다. 원래 머금고 있던 웃음이 짙어졌다.

“아무리 거칠어봐야 닿지 않으면 소용 없거든요.”

당화련은 팽무성의 허리에 매여진 도를 보며 말했다.

웃으며 서로를 노려 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가요.”

오랜만이네, 너도, 네놈도.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