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막내아들-28화 (29/200)

28화

“무슨 일이십니까.”

무진은 팽무성에게 반장을 하더니 얘기를 꺼냈다.

“예의 없이 갑자기 이렇게 몰려와서 죄송합니다. 혹시 저희와도 비무를 해주실 수 있을는지요.”

무각은 사형제 중에서 압도적인 무공을 자랑했다.

그런 무각이 팽무성을 한 번도 이기지 못했고 당화련은 살짝 부족하나 어느 정도 동수를 이루고 있었다.

소림 제자들로서는 놀랄 상황이었다.

무인으로서 호승심이 올라오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거기에 다른 문파의 무공을 견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비무를 안 할 이유가 없지요.”

팽무성과 당화련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팽무성은 모옥에서 살짝 떨어져서 기다리는 무각의 사형제들을 바라보았다.

‘이놈들 봐라.’

팽무성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비무 때문에 왔다고 하는데 사형제들의 시선은 팽무성이 아니라 모옥에 앉아있는 당화련에게 쏠려있었다.

불도를 걷는 소림의 제자들이지만 아직 혈기 넘치는 젊은 나이였다.

수양의 시간이 고승들에 비해 길지 않으니 자연스레 여인에게 눈길이 가는 게 당연했다.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더구나 당화련은 쉽게 볼 수 없는 미인이었다.

“흐흥.”

당화련도 자신을 보는 소림 제자들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아는지 우쭐거리는 코웃음을 흘렸다.

그 코웃음에 무각은 질색하며 입술을 구겼다.

“화련, 바로 할 수 있지.”

“물론이죠.”

앉아있던 당화련은 벌떡 일어났다.

소매에 손을 넣은 당화련의 분위기는 날카로웠다.

미모에 혹했다가 크게 당할 수 있었다.

이에 소림 제자들의 눈도 진지해졌다.

방금의 물렁거리는 분위기는 바로 사라지고 무인들의 열기가 주변을 뒤덮었다.

“바로 시작하시죠.”

팽무성의 말에 소림 제자들이 앞다투어 모옥 쪽으로 들어왔다.

공간을 나누어 팽무성과 당화련은 동시에 비무를 벌였다.

무각은 이 모습을 홀로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비무 할 시간이 더 줄어든 탓이었다.

“에잇, 아미타불.”

무각의 불호를 욀 때 비무는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팽무성과 무진이 먼저 무공을 겨루었다.

역시나 소림.

경시 못 할 무거운 주먹이 쏟아졌다.

무자 배의 대사형인 무진.

대사형답게 지닌 무공이 출중했다.

무각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으나 무진 또한 무림에 나가면 후기지수 중에 손에 꼽힐 인재였다.

팽무성은 호왕투법으로 상대했다. 소림 제자와의 박투를 통해 호왕투법을 한층 더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기격(技擊)을 중시하는 소림의 제자답게 전신을 사용하는 다채로운 무공을 선보였다.

무진이 힘찬 기합과 함께 앞으로 쏘아졌다.

“하압!”

팽무성과 무진은 한 덩어리가 되어 손과 발을 부딪쳤다.

팔꿈치로 팽무성의 주먹을 튕겨낸 무진의 손에서 우윳빛 권기가 솟구쳤다.

무진은 나한권(羅漢拳)으로 권풍을 쏘아내더니 두 손을 휘날리듯 뻗어 팽무성의 손바닥을 감쌌다.

소금강산수(小金剛散手)로 쌍호장법을 받아내자 팽무성의 우권이 무진의 명치로 꽂혀 들었다.

주먹을 하단으로 흘려내면서 무진은 공중제비를 하며 껑충 뛰어올랐다.

‘가슴이 비었다.’

무진은 허공에서 수맥질을 하듯이 발을 걷어냈다.

지지대가 없는 허공에서 각법을 펼쳤지만 다리에는 무시 못 할 힘이 실려있었다.

항마연환신퇴(降魔連環神腿).

순식간에 열세 번의 발길질이 팽무성의 가슴을 후려쳤다.

무진은 지금의 틈을 놓친다면 못 이긴다는 예감이 들어 전력을 다했다.

터터터터터어엉

마치 종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무진은 발끝의 감각에 얼굴이 굳어졌다.

마치 철을 후려친 느낌.

언뜻 무복 사이로 보이는 팽무성의 가슴은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나쁘지 않다.’

팽무성의 눈은 호선을 그렸다.

현재 철호피공의 성취는 사성.

완전히 충격을 흡수한 것은 아니지만 별다른 부상은 없었다. 철호피공 없이 저대로 무진의 각법을 맞았다면 늑골 몇 군데는 부러졌을 터였다.

“아.”

무진은 이것이 팽무성이 요즘 수련 중이라는 철호피공이라는 무공임을 알아차렸다.

‘일부러 틈을 보인 거였구나.’

무진은 동요하지 않고 다시 주먹을 들었다.

소림의 주먹은 정직하고 무거웠다.

그 이후로 비무는 연달아 벌어졌다.

* * *

철호피공이 칠성의 성취를 보이자 약물에 들어갈 때 느껴지던 고통은 바늘로 살을 찌르는 정도에 불과했다.

어느 정도 철호피공의 성취를 보고 비무를 통해서 그 효용성을 직접 확인했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수련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공이었다.

팽무성은 철호피공의 성취가 더뎌디자 잠시 수련을 멈췄다.

대신 그동안 익힌 자신의 무공을 다시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꽈릉

작은 뇌성이 울렸다.

그런데 평소와 도의 움직임이 달랐다.

사방으로 갈라지는 도기는 마치 붉은 우레와 같았다.

팽무성은 혼원벽력도를 펼치고 있었다.

전생에서 식(式)과 형(形)을 알고 있는 정도에 머물던 혼원벽력도를 본격적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팽가의 도법에는 중(重)과 강(强)의 묘리가 담겼다.

도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전심전력을 담아내는 것.

팽가 도법을 관통하는 의(意)이기도 했다.

그런데 혼원벽력도는 다른 팽가의 도법과 다른 면이 있었다. 도법에 환(幻)의 묘리가 더해졌다.

묘리가 더해진다고 무공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공에 담긴 묘리가 균형을 이루고 서로를 끌어 올려야 상승무공이라 불렸다.

분명 혼원벽력도는 상승무공, 절세의 도법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콰지직

팽무성의 도가 다시 크게 떨었다.

위맹한 도격에 환의 묘리가 더해져 수많은 변화를 보여주니 그 모습이 번개와 같았다.

“흐음.”

그 위력에 대기가 떨렸으나 팽무성의 눈은 가라앉았다. 겉보기에는 화려했으나 어긋남을 느낄 수 있었다.

속 빈 강정에 불과했다.

식(式)과 형(形)이 온전치 않은 탓도 있으나 제일 중요한 의(意)가 빠져버린 상황. 그저 이름뿐인 혼원벽력도였다.

한참 혼원벽력도를 펼쳐내던 팽무성은 결국 도를 내려놓았다.

“답답하네.”

이 정도라면 무공을 복구하는 게 아니라 새로 창안하는 수준과 비슷했다.

‘역시 비동이 답인가.’

하북팽가에도 숨겨진 비동이 하나 있었다.

가주와 소가주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비동은 초대 가주가 혼원벽력도를 창안한 장소이며 말년의 심득을 남겨놓은 곳이기도 했다.

팽무성도 그저 들은 얘기이지만 비동에는 혼원벽력도의 도흔과 이름 없는 도법의 도흔이 남겨져 있다고 들었다.

‘비동에만 기댈 수 없는 노릇이지.’

밤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머리를 식힌 팽무성은 다시 도를 들었다.

이번에는 철혈맹호도를 펼쳐내기 시작했다.

다만 그 속도가 매우 느렸다.

허공을 유영하는 도 위에는 날아다니던 벌레가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팽무성의 눈에는 오로지 도의 움직임 하나만이 확대되어 들어오고 있었다.

팽무성은 도법을 하나하나 분해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철혈맹호도를 반복해서 펼쳐내던 팽무성의 도는 어느새 맹호도결을 펼쳐내고 있었다.

조금씩 기울어지는 보름달만이 팽무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나 도를 휘둘렀을까.

팽무성의 굵은 턱선을 타고 땀이 떨어졌다.

흘리는 땀이 달빛에 비쳐 반짝거렸다.

팽무성의 눈빛은 어느새 흐릿해졌다.

팽무성은 도에 온정신을 쏟아부은 상황.

어느새 도를 휘두르고 있는 팽무성이라는 자신을 잊고 있었다.

무아지경(無我之境).

팽무성은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암흑의 공간.

팽무성은 왜 자신이 이런 공간에 있는지 인지 하지 못했다.

그저 이 공간에 존재했다.

칠흑의 공간에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선이 그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거칠고 직선적이며 간결했다.

팽무성은 그 선을 알고 있었다.

철혈맹호도.

다른 방향에서 또 새로운 선이 그어졌다.

뿌리와 가지처럼 사방으로 뻗는 선.

끝없는 변화에 수많은 선이 파생했다.

그 선의 끝이 어디일지 종잡을 수 없었다.

혼원벽력도.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선과 점이 생기고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철호가 펼쳤던 섬호도법이 그려지기도 했고 전생에서 눈대중으로 보았던 팽가의 다른 도법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만 이런 경우에는 선과 점이 완전히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 끊어졌다.

수많은 점과 선이 반복되며 합쳐지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팽무성은 하염없이 그 변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얼마나 바라봤을까.

어느 순간 팽무성은 깨달았다.

환생 이후에 팽무성은 장서각에서 산왕군림보와 쌍호장법의 비급만 살폈을 뿐이었다.

전생에 창안한 무공들에 대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다짐대로 팽가의 무인으로서 완성되고자 했다면, 혼원벽력도를 복원하고자 했다면, 전생보다 더 강해지고자 했다면 그랬으면 안 될 일이었다.

‘자만했구나.’

도왕의 경험과 심득.

분명 팽무성의 성장을 빠르게 하는 요인이었지만 그만큼 얽매였고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전생은 이정표로 삼는 것에 그쳐야지 그저 그 뒤를 그대로 따라가기만 한다면 전생의 도왕과 다를 바가 없었다.

팽무성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다른 방향으로 옮긴 한 걸음.

원래 걷던 길의 방향과 살짝 틀어졌다.

미세한 차이였으나 이로 인해 걷게 될 새로운 길의 끝은 전혀 다르리라.

* * *

방장실.

이른 새벽에 일어난 현진은 여느 때처럼 불경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불경을 넘기던 현진의 손이 멈칫거렸다.

현진의 눈이 불경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을 향했다.

그 방향의 끝은 무각의 모옥이 있었다.

우우우우웅

소림사 전역으로 뻗치는 기세.

다만 이 기세는 같은 경지에 오른 이들만이 느낄 수 있었다.

소림에도 몇 안 되는 이들만이 느꼈을 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는 기세.

중후하면서 깊이가 있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도도함이 느껴졌다.

“정녕 그 아해인가.”

현진은 몇 달 전에 만난 팽무성을 떠올렸다.

이전의 팽무성이 산봉우리에 속박된 용암과 같았다면 지금은 천하를 굽어보는 태산 그 자체였다.

전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느낌의 기세.

“스스로 틀을 부수고 나왔구나.”

현진의 웃음이 짙어졌다.

팽무성이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 느껴지는 기세로 능히 짐작되었다.

“좋구나, 좋아. 뜻을 가진 아이가 껍질을 깨트렸으니 강호의 홍복이로다.”

현진은 방장실을 나와 기세가 퍼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소림 전역을 뒤덮던 기세는 어느새 점점 갈무리되고 있었다.

저 멀리 절벽에 붉은빛이 걸쳐있었다.

현진은 그 빛이 사그라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아미타불.”

* * *

무수한 실낱처럼 하늘 높이 흩날리는 붉은 기운.

그 기운이 팽무성의 정수리로 집약하며 세 송이의 커다란 붉은 꽃을 피워냈다.

강호에서는 이를 흔히 삼화취정(三花聚頂)의 경지라고 불렀다.

붉은 꽃이 스러지며 팽무성에게 스며들자 팽무성은 눈을 떴다.

‘벽을 넘었다.’

그릇을 채워서 인간의 극에 도달한 경지.

흔히 강호에서 초절정이라 부르는 경지에 올랐다.

전생에도 한 번 넘었던 벽이었다.

다만 전생과 다른 깨달음으로 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전생의 도왕이 이루었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직 몇 개의 벽이 남았다.

앞으로 겪을 사건과 상대할 적들을 생각하자면 부족했다.

허나 팽무성은 이제 조급해하지 않았다.

자신은 또 성장하고 나아갈 지어니.

“후우우.”

팽무성은 눈을 떴다.

소실봉 너머로 하늘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여명이 보였다.

분명 마지막 기억은 밤에 도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지금은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어이, 팽 시주. 설마 넘은 거냐.”

“팽 오라버니.”

밤새 호법을 서던 두 사람은 팽무성의 변화를 바로 알아차렸다. 제법 긴 시간을 붙어있었던 덕분이었다.

팽무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각은 팔짱을 끼며 만족했고 당화련은 손뼉을 쳤다.

“훗.”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두 사람을 보며 팽무성도 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기쁜 날에는 숨겨놓은 곡차를 마셔야지.”

“엇, 정말요?”

어디론가 뛰어가는 두 사람을 팽무성은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무각과 당화련도 처음 만날 때에 비하면 놀라운 성취를 보이며 성장했다.

이들의 만남은 서로에 자극이 되었고 그 중심에는 팽무성이 있었다.

팽무성은 두 사람의 약점과 나쁜 버릇을 줄이고 장점을 극화시키는 비무를 유도했다.

전생의 사패는 함께 전장을 돌며 서로의 무공을 보완하고 발전시키는데, 노력을 다했다.

그 경험 덕분에 팽무성은 타 문파의 무공이지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줄 수 있었다.

노력의 결실인지 두 사람은 전생에 비해 빠른 성장을 보이었다.

팽무성은 고개를 들어 소림의 전경을 살폈다. 몇 달을 봤더니 어느새 눈에 익었다.

슬슬 소림사를 내려갈 때가 가까워졌다.

며칠 뒤에 소림사에 두 편의 서신이 날아왔다.

팽가와 당가에서 보낸 것인데 서신의 내용이 같았다.

백가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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