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백가회가 시작되기 전날 밤.
팽무성은 팽연후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팽연후는 팽진연을 대신해서 백가회에 참석한 상황이었다.
“일단 당가와 함께 안건에 넣어 놓기는 했다만, 정말이더냐?”
“확실한 마기였습니다. 이미 마교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허어.”
팽연후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마교가 등장했다는 말은 빠르든 늦든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과 같았다.
“마인을 상대하고 무사해서 다행이다. 고생했다. 이번 기회에 쉬어간다고 생각하거라.”
팽연후의 말에 팽무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백가회는 마냥 쉽게 지나갈 것 같지 않았다.
“예, 그리고 이걸.”
팽무성은 비급 하나를 팽연후에게 건네주었다. 비급에는 철호피공(鐵虎皮功)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있었다.
소림에서 받아온 필사본이었다.
원래의 비급에 팽무성이 직접 수련하면서 얻은 경험과 주석이 더해졌다.
“무후각주에게 전해주십시오, 팽가의 무인들에게 큰 전력이 될 무공입니다.”
“이것 때문에 소림에서 머물었던 거구나.”
“그리고 장서각에 비급을 비치할 때 일 층에 놓아주셨으면 합니다.”
팽연후는 팽무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무공을 익힘에 있어서 차별을 두지 말라는 의미였다.
팽연후는 비급을 만지작거리며 팽무성이 한 말을 곱씹었다.
“그래, 그런 거군.”
팽연후는 팽무성이 그려내는 하북팽가가 어떤 모습인지 대충이나마 알 것 같았다.
'확실한 뜻을 품고 있었나.'
팽연후는 아무런 조언도, 응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충분할 듯 싶었다.
* * *
백가회를 위해 가문에서 준비해온 의복이 있었지만 팽무성은 입지 않았다.
평소에 입던 대로 붉은 무복에 검은 장포를 걸쳤다.
백가회가 열리는 동안 진주언가의 여러 곳에선 연회가 벌어졌다.
각 연회는 주로 나이에 맞추어 후기지수와 중견 고수로 나누어진 듯했다.
그에 팽무성도 후기지수들의 연회가 벌어진다는 전각으로 향했다. 막 연회장에 도착하니 대낮임에도 벌써 술잔이 오가고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팽무성은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누군가를 찾다가 금세 포기했다.
혹시나 해서 살폈지만 이런 곳에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쯤 어디에 계시려나.’
팽무성은 사람 찾는 것은 포기하고 그냥 즐기기로 했다.
수많은 후기지수가 바쁘게 돌아다니며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팽무성은 그러거나 말거나 홀로 돌아다니며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다.
‘흐음. 검 좀 휘두르겠는데.’
말이 사람 구경이지 주로 후기지수들의 무공 수준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제법 재미가 쏠쏠했다.
“혹시, 저 사람.”
“패호도?”
팽무성의 커다란 덩치 때문일까, 연회장을 홀로 배회하는 팽무성에게 서서히 남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혹시 팽무성 소협입니까?”
“맞습니다.”
“아, 저는 석무검가의 석잔호라고 합니다.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석잔호는 환한 얼굴로 팽무성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석잔호의 용기로 팽무성임을 확인하자 주위로 후기지수들이 몰려왔다.
“저는 일련창가의 산수백이라 합니다.”
“패호도를 이렇게 처음 보게 되는군요. 쌍일진가의 진호문이라 합니다.”
후기지수들이 앞다투어 자신을 소개하자 팽무성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팽무성은 몰랐지만 오룡 다음으로 제일 유명한 후기지수가 바로 패호도였다.
사파의 악랄한 고수들을 꺾고 핍박받는 상단을 위해 홀로 적륜문에 맞선 일화는 후기지수들의 가슴에 불을 피워냈다.
후기지수들도 강호출도를 하며 협의를 실현하는 비슷한 상상을 하지만 이루기 힘든 허상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팽무성을 보는 후기지수들의 눈에는 선망이 가득했다.
“쳇.”
“뭐가 좋다고 저리 꼬리를 흔드는지.”
멀리서 팽무성을 질시하는 눈빛도 있었으나 극히 소수였다.
“음.”
이런 경험은 전생, 현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팽무성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순간 돌이 되었다.
“죄송해요, 잠시 지나갈게요.”
그러던 그때, 팽무성의 주위로 인파가 갈라졌다. 길을 비켜준 사내들은 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비켜서게 하는 미모.
평소에 묶던 긴 머리는 등까지 내려와 윤기를 내며 찰랑거렸다. 거기에 녹빛의 화려한 궁장에 옅은 화장을 하니 가히 사천제일미라 할만했다.
위기의 팽무성을 구한 이는 바로 당화련이었다. 살짝 굳은 팽무성의 표정을 보고 당화련이 상큼한 미소를 흘렸다.
당화련은 팽무성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싶었다. 이제야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후기지수 같았다.
“가요.”
당화련은 팽무성의 소매를 살짝 잡고 이끌었다. 다른 후기지수들은 그저 구경만 했다. 당가의 독화(毒花)가 데리고 가겠다는데 누가 감히 막겠는가.
“당 소저랑 패호도가 친분이 있었나요?”
“어머, 소림에서 함께 수련했다는 얘기를 못 들으셨나 보네.”
당화련은 저 멀리서 팽무성을 훔쳐보고 있는 여인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연회장에서 멀어지고 사람이 적어지자 당화련은 잡고 있던 소매를 놓았다.
“숙소에만 박혀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나를 뭐로 보고.”
팽무성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당화련은 입을 가렸다.
“후훗.”
당화련은 소매를 흔들며 앞으로 걸어갔다.
“좀 걸어요. 보니까 잘 꾸며놓은 정원이 있던데요. 연못에 가산(假山)에. 화려해요.”
당장 연회장에 돌아가도 인파에 휩쓸릴 듯싶었다. 결국 팽무성은 당화련이 칭찬한 그 정원의 경치를 보기로 했다.
이런 것도 가끔씩은 나쁘지 않았다.
* * *
아직 해가 뜨기는 이른 시간.
하늘이 밤과 새벽의 중간에 걸쳐있는 때였다.
팽무성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방금까지 잠자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한치의 흐림도 없었다.
“이 기운은...”
팽무성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언가를 뒤덮은 미세한 기파.
이 기파를 느낄 수 있는 이는 경지에 오른 아주 소수일 것이다.
마치 느꼈다면 찾아오란 듯 기파는 도발적인 울림을 계속 내보이고 있었다.
팽무성은 누가 이런 일을 벌이는지 예상이 갔다.
잠시 고민하던 팽무성은 창밖을 나서며 전각 위로 올라섰다. 그러곤 가벼운 움직임으로 전각 사이를 넘어 다니기 시작했다.
야밤에도 경계를 서는 언가의 무인들이 있었지만 팽무성의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는 무인은 없었다.
팽무성은 중앙을 가로질러 언가의 가주전보다 안쪽으로 들어갔다.
팽무성이 멈춘 곳에는 이름 없는 작은 전각이 자리했다.
전각의 앞에는 백발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노인답지 않은 전신의 탄탄한 근육의 팽무성의 시선을 끌었다.
노인은 그저 앉아있을 뿐인데 더는 앞으로 나아가기가 꺼려졌다. 감각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노인은 팽무성을 보더니 반쯤 감겨있던 눈을 크게 떴다.
“음? 기다리던 아이가 아니라 다른 아이가 온 듯하군.”
노인은 가주들이 근처의 청암산으로 일출을 보러 떠났음을 알고 있었다.
이 틈에 가문에 모인 후기지수들을 상대로 장난 삼아 기파를 쏘아냈는데 예상과 다른 인물이 나타난 것이었다.
노인은 팽무성을 몰랐으나 팽무성은 노인을 알고 있었다.
십대고수의 일인, 권왕(拳王). 언가후.
아들인 언사인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여전히 실권을 놓지 않고 음지에서 언가를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진주언가를 하북제일문파로 만들고 나아가서 오대세가의 수좌를 차지하겠다는 야망을 지닌 인물이었다.
사사롭게는 팽대혁의 외조부 되는 인물이었다. 팽가의 가주가 된 팽대혁은 언가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한참 팽무성을 살피던 언가후의 눈이 인자한 호선을 그렸다.
“팽가의 아이로군. 그래, 네가 대혁이의 동생이구나. 팽무성이라 했던가. 얘기는 들었다.”
“권왕을 뵙습니다, 하북팽가의 팽무성입니다.”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무공이 훨씬 뛰어나군, 솔직히 놀랄 정도야. 왕년의 나보다 낫구나,”
언가후가 연달아 칭찬하자, 팽무성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팽무성을 살피는 언가후의 눈빛은 미묘했다.
“대혁이에게 이리 뛰어난 동생이 있어서 다행이다. 네가 뒤에서 대혁이를 잘 보필해다오.”
하지만 팽무성은 언가후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제가 큰형님을 보필할 일은 없습니다.”
팽무성은 언가후의 눈을 똑바로 보며 명확하게 말했다.
“가주가 되는 사람은 저입니다.”
언가후의 인자한 미소가 증발했다. 대신 스산한 웃음이 얼굴을 채웠다.
“허허, 이거 팽가에 재밌는 놈이 튀어나왔군.”
쿠웅
권왕의 흉포한 기세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 기세에는 아주 미약했지만, 살기가 섞여 있었다.
팽무성도 내공을 끌어올려 저항했지만 밀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팽무성의 어깨와 무릎이 잘게 떨렸고 전신에서는 핏줄이 솟았다.
“아이야, 다시 얘기해보아라. 나이를 먹으니 잘 들리지 않아.”
조금씩이지만 자신의 기세를 밀어내는 팽무성을 보며 언가후는 손을 꿈틀거렸다.
확실히 알겠다. 저 아이는 팽대혁의 밑에서 절대 만족할 수 없으리라.
전신을 뒤흔드는 기세에도 고개를 빳빳이 들며 노려보는 저 아이의 눈빛과 기세.
버티는 와중에도 자신의 기세를 뚫으려는 날카로움을 보였다.
마치 수천 번의 담금질을 견디고 완성된 명도를 보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손주 중에는 저런 그릇이 없었다.
‘저런 놈이 내 핏줄이어야 하는데.’
권왕의 얼굴에 아쉬움이 드러났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팽무성이 굴복할 생각을 안 하자 권왕의 기세가 더욱 요동쳤다.
이때 푸른 하늘처럼 청아하면서도 고고한 기세가 두 사람의 틈으로 끼어들었다.
“후배가 걸음이 느려 늦었는데, 이리 분위기가 격정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팽무성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언가후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눈만 살짝 비틀뿐이었다.
갑자기 난입한 사내가 입은 푸른 무복의 소매에는 흰 구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창천의(蒼天衣).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입는 무복이었다.
언가후와 팽무성의 기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내였다.
사내를 본 팽무성의 눈에 반가움이 담겼다. 낮에 팽무성이 찾던 이가 바로 이 사내였다.
‘형님.’
사패의 맏형.
남궁세가의 협의를 몸소 실천하는 사내.
훗날 검제라고 불리는 천재. 남궁혁.
“검호, 너를 불렀는데 문득 이 아이가 튀어나오더구나. 그래서 이 아이의 실력이 궁금해졌다.”
“저 후배가 힘겨워하는 듯합니다. 이렇게 서 있는 것으로 실력을 증명한 것이지요. 누가 권왕의 기세에 이리 맞서겠습니까.”
남궁혁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부탁하자 언가후는 손을 거두었다.
“그런가.”
언가후는 팽무성을 짓누르던 기세를 거두었다. 보는 눈이 있는데 계속 팽무성을 핍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 눈이 남궁세가의 소가주이며 검존의 손자라면 더더욱.
이 상황을 길게 끈다면 자신과 언가의 명성에 먹칠을 할 뿐이었다.
“오랜만에 힘을 쓰니 지치는군, 나는 들어가 보지.”
언가후는 냉랭한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언가후의 등을 보며 팽무성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언가후의 걸음이 잠시 멈췄으나 대꾸하지 않고 전각으로 들어갔다.
“휴우.”
남궁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팽무성을 바라보았다.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땀이 뚝뚝 떨어졌지만 팽무성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부동의 눈빛으로 남궁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에 남궁혁이 감탄했다.
보통 후기지수라면 바로 기절했거나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후배는 버티는 거에 모자라서 미약하지만, 권왕의 기세를 밀어냈으니.
참으로 흥미로웠다.
“괜찮으면 같이 하겠는가.”
남궁혁은 허리춤에 매달린 호리병을 보여주며 물었다.
이에 팽무성도 피식 웃었다.
“좋습니다.”
전생의 사패를 모두 만난 순간이었다.
백가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