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막내아들-32화 (33/200)

32화

먼저 발을 뗀 것은 언태균이었다.

추사영보(追死影步)를 펼치는 언태균의 움직임은 흐릿한 그림자를 연달아 그려냈다.

정파의 무공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음험한 부분이 있었다.

‘애초에 정사지간의 문파였으니 상관없나.’

진주언가는 태생부터 정파가 아니었다.

원래는 정사지간의 문파였고 그 탓에 무공에 기괴하고 악랄한 면이 있었다.

콰앙

산왕군림보의 첫걸음.

거친 기파가 쓸고 지나가자 추사영보의 그림자가 크게 일렁이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드러난 언태균을 향해 팽무성의 손이 뻗어갔다.

권장법도 아니고 조법도 아니었다. 무슨 수법을 펼칠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손 모양.

이에 언태균이 눈을 찌푸리다 먼저 공세를 펼쳐냈다.

점점 늘어나는 주먹.

언태균의 손에 수많은 권영이 그려지며 팽무성의 앞을 뒤엎었다. 급소를 노리는 언태균의 주먹에는 악의가 깃들었다.

이 때 팽무성의 다섯 손가락이 일제히 굽혀지며 전방을 사정없이 그어냈다.

손가락 끝에 내공이 머물러 허공에 다섯 줄기의 붉은 잔흔이 보이니 마치 호랑이의 발톱 자국과 같았다.

호왕투법 적호조(赤虎爪).

이를 노린 듯 적호조에 의해 갈라진 권영 사이로 언태균이 쇄도했다. 초식을 펼친 그 찰나의 빈틈을 노릴 셈이었다.

허나 팽무성은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언태균을 향해 커다란 붉은 덩어리가 쏘아졌다.

진각을 밟으며 솟구친 팽무성은 어깨와 옆등으로 언태균을 밀어냈다.

호왕투법의 배호고(排虎?)라는 초식이었다.

콰앙

언태균은 돌진하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뒤로 튕겨졌다.

“커흑.”

낙법을 펼칠 틈도 없이 바닥을 다섯 번이나 구르고 나서야 언태균은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순간 거인이 던진 바위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덮쳐왔다.

‘무슨 몸이 저리 단단한 거냐.’

위력을 확인하던 팽무성은 제법 만족스러워했다.

배호고를 펼칠 때 어깨와 옆등에 철호피공을 펼쳤다. 신체의 강도가 오르니 자연스레 위력이 증가 되었다.

철호피공의 성취가 오르며 숙달되니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에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쓸모가 많은 무공이었다.

“권룡, 황보 소협을 상대하느라 힘이 빠진 건가.”

뒷짐을 지고 내려다보는 팽무성에 언태균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방진.”

언태균은 분노로 몸이 달궈졌지만, 상황판단은 제대로 하고 있었다. 적당히 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들었던 얘기와는 전혀 달랐다.

'팽대혁, 한심한 놈이 제 동생의 무공 수준도 제대로 몰라.'

언태균은 다리 너비를 벌리고 주먹도 살짝 아래로 향했다. 언태균은 언가권이 아닌 귀류음영권(鬼流蔭影拳)의 기수식을 취했다.

언가 내에서도 재능있는 소수만 익힐 수 있는 언가의 정수가 그대로 들어있는 권법이었다.

언태균은 위아래로 솟구치는 기이한 움직임을 보였다. 곧바로 거리를 좁히지 않고 팽무성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어느 순간 언태균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순식간에 팽무성의 좌측에서 나타난 언태균. 불끈 쥔 언태균의 주먹은 기괴했다. 투로가 이상하여 옆구리를 노리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어깨에 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팽무성의 반응이 더 빨랐다.

좌장으로 언태균의 주먹을 쳐냄과 동시에 팽무성의 우권이 쇄도하고 있었다.

언태균은 손등으로 주먹을 빗겨내려 했다가 대경하여 급히 땅을 굴렀다.

‘감은 좋군.’

만약 언태균이 그대로 빗겨내려 했다면 권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쓸려나갔을 것이다.

언태균의 실력으로 받아낼 수 있는 주먹이 아니었다.

“나려타곤...”

“권룡이 어찌.”

언태균도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알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땅을 구르는 행동을 뜻하는 나려타곤은 무림인들이 멸시하는 행동이었다. 더구나 정파라면 경멸하는 시선이 더욱 강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쓸 때냐.”

어느새 거리를 좁힌 팽무성.

채찍처럼 휘어진 팽무성의 발이 언태균의 얼굴을 걷어찼다. 간신히 팔을 들어서 막았지만, 다시 한번 땅을 굴러야 했다.

비무대에 등장할 때만 해도 고운 빛깔을 내던 푸른 장삼은 먼지에 덮여 그 빛을 잃은지 오래였다.

“크악.”

팔에서 욱신 올라오는 고통을 느낄 새가 없었다. 연달아 창피를 당하자 결국 언태균은 이성의 끈을 놓고야 말았다.

언태균은 발악을 하듯 막무가내로 주먹을 쏟아냈다.

위협적인 절초를 아낌없이 펼쳐내며 팽무성을 몰아넣으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팽무성은 무심한 손짓으로 초식을 파훼했다.

수십이 넘는 권영은 팽무성의 주먹질 한 번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눈을 현혹하는 귀신같은 움직임도 팽무성에게는 뻔했다.

언태균의 흐름을 팽무성은 완벽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팽무성의 호쾌한 주먹질 한 번이면 그 어떤 초식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흐름을 정확히 읽고 벽력 같은 위력을 지닌 주먹으로 맥을 끊어냈다.

한편, 비무를 지켜보던 황보세운은 팽무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와는 천지차이구나.”

팽무성이 펼치는 움직임에서 마치 자신의 지향점을 본 느낌이었다.

황보세운이 팽무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때 팽대혁은 언태균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리 자신만만하더니 대체 뭐 하는 거요, 형님.’

어젯밤까지만 해도 제대로 손을 봐주고 많은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겠다고 단언한 언태균이었다.

그런데 언태균은 자신이 말한 그대로 똑같이 당하고 있었다.

팽대혁은 답답하지만 풀 곳이 없어 애꿎은 자신의 소매만 찢어질 듯 부여잡고 있었다.

‘흐음, 이 정도면 대충 본 것 같은데.’

팽무성은 단번에 제압할 수 있었지만 일일이 받아내며 귀류음영권의 초식을 눈에 담고 있었다.

비무 자체가 흥미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수확이 있었다. 팽무성이 주먹에 권기를 두르자 붉은 빛살이 쏟아졌다.

쓸데없이 눈만 어지럽히던 언태균의 주먹질이 단번에 스러졌다. 바로 거리를 좁힌 팽무성은 언태균의 왼발을 짓밟았다.

“끅.”

마치 발에 못이 박힌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감당하지 못할 힘이었다.

그런 언태균의 얼굴로 팽무성의 주먹이 꽂혔다.

후욱

바로 코앞에서 멈춘 주먹.

주먹이 일으킨 바람에 쓰고 있던 영웅건이 날아가며 언태균은 산발이 되었다.

“아.”

언태균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코를 만졌다.

손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팽무성의 주먹에 쌍코피가 터진 탓이었다.

“이익.”

언태균의 손이 잘게 떨렸다.

무공을 익힌 이후로 타인의 코피는 많이 터트려봤지만, 막상 당하기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엇, 코피.”

“권풍에 코피가 터져버렸군.”

코를 급히 가리는 언태균을 보고 후기지수들은 저들끼리 속닥거리고 있었다.

이 일은 일파만파로 소문이 퍼지리라.

이 짧은 비무에 당한 수모가 대체 몇 번인지.

언태균은 지금 이 순간은 진주언가도, 권룡도 모두 잊었다.

오로지 머릿속을 지배하는 부끄러움과 분노에 충실했다.

“팽무성.”

팽무성의 이름을 한 자씩 힘주어 말하는 언태균의 몸에서 결국 살기가 흘러나왔다.

이성을 잃은 언태균이 팽무성에게 달려들려고 할 때.

“추하다, 언태균. 이게 정파의 후기지수를 대표하는 오룡이 보일 자세더냐.”

내공이 섞인 웅혼한 목소리.

잔잔한 꾸짖음에 언태균도 정신이 번쩍 들어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았다.

대연무장의 담벼락에 걸터앉은 남궁혁.

대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에 후기지수들의 깜짝 놀랐지만, 남궁혁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찰나의 부끄러움에 비무 도중에 이리 쉽게 살기를 흘리다니, 이런 행동이 제일 부끄러운 법이다.”

그 기세 높은 권룡도 창천검호 앞에서는 빛이 바랬다.

무공, 배경, 명성, 그 어느 것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언태균은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뵈었는데 이리 모자란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남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똑같은 실수를 안 하면 된다. 고개를 들어라, 태균아.”

“명심하겠습니다.”

언태균은 팽무성을 보더니 포권을 했다.

“팽 소협, 졌네.”

일단 잘못을 뉘우치는 것처럼 보였으나 언태균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그저 위기를 넘기기 위한 진심 없는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팽무성도 이를 보고 피식 웃었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던 일이었다.

‘이놈이 왼팔을 주로 썼었지.’

만약 남궁혁이 중간에 나서지 않았다면 팽무성은 살기를 흘린 대가로 왼팔을 부러뜨릴 생각이었다.

언태균이 비무대를 내려가고 팽무성은 후기지수들을 둘러보았다.

“올라올 사람이 있습니까.”

팽무성이 물었으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권룡을 그냥 가지고 놀아버린 팽무성이다. 올라가 봐야 영약은 못 얻고 망신만 당할 뿐이었다.

비무를 지켜보던 풍룡 모용준도 자신의 철선(鐵扇)을 슬며시 내렸다.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거참, 오룡이라는 별호가 부끄러운 적은 처음이군.’

여기 있는 후기지수들은 내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룡을 뛰어넘는 초신성이 등장했음을.

* * *

팽무성은 상품으로 얻은 소성단을 그 자리에서 바로 복용했다.

신의가 만든 영단은 약에 담긴 기운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팽무성의 단전에는 온전히 이십 년의 내공이 더해졌다.

비무대회가 벌어진 저녁에는 역시나 연회가 열렸다.

첫날과 다른 점이라면 영약을 얻은 팽무성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보통은 후기지수의 정상에 군림하는 오룡이나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이 주인공이 되고는 했는데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언태균과 팽대혁의 무리는 참석하지 않고 사라졌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의 신경은 팽무성, 그리고 옆자리에 쏠려있었다.

“오랜만에 이런 자리에 오니 어색하군, 허나 팽 아우가 영약을 얻었는데 축하를 안 할 수가 없지.”

연회에 참여하지 않던 남궁혁도 참석해서 팽무성을 빛내주었기에 후기지수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하하, 화련아, 육 년만인가? 그 땅딸막했던 꼬마가 여인이 다 되었구나.”

남궁혁의 말에 주변에 앉아있던 후기지수들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고 당화련은 사정없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남궁 오라버니, 땅딸막이요? 제가 언제요?”

“하하, 팽 아우, 그거 아는가? 화련이가 어렸을 적에 살수 놀이를 한다고 나한테 암기를...”

흥이 난 남궁혁은 옛날이야기를 풀어내려 했고 당화련은 필사적으로 남궁혁의 입을 막으려 했다.

팽무성이 웃으면서 술병을 잡으려 할 때 먼저 잡아 따라주는 이가 있었다. 황보세운이었다.

“팽 소협, 오후의 비무는 정말 인상 깊었소.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오.”

배분도 비슷하고 나이는 황보세운이 더 많았기에 말을 놓아도 상관없지만 황보세운은 정중했다.

“힘을 이용하는 수련을 하거나 권법을 좀 더 세밀하게 펼쳐보면 도움이 될 겁니다.”

팽무성도 황보세운의 비무를 보며 안타까운 점이 많기에 조언을 해주었다.

“그래, 세운아, 너는 힘에 너무 의지하는 게 움직임에서 보인다. 장점이 단점으로 변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그 후 황보세운이 여러 질문을 던졌으나 팽무성은 친절하게 답했다.

이에 용기를 낸 다른 후기지수들이 한 명씩 팽무성에게 찾아왔다.

“팽 소협, 혹시 내가 했던 비무를 기억하시는지요.”

“산 소협 아닙니까, 창을 쓰셨지요. 창의 거리변환에 능숙하시더군요.”

“오, 기억하셨군요.”

산수백은 팽무성이 자신을 기억했다는 것에 살짝 감격했다.

팽무성에게 찾아온 후기지수들은 무공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었고 팽무성은 진지하게 답해주었다.

질문이 워낙 많았지만 팽무성은 정성을 다했다.

강해지고 싶으나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방황하던 시절이 팽무성에게도 있었다.

궁금한 것을 스승이나 어른에게 물어 답을 들어도 다음 날 새로운 의문이 두 개나 생기는 게 지금의 후기지수들이다.

그 어려움을 알기에 팽무성은 진지하게 답했다.

옆에서 함께 듣던 남궁혁도 후기지수의 시선에서 조언을 해주니 질문을 한 후기지수에게는 큰 도움이었다.

후기지수들은 팽무성의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연회는 무공 강론을 하는 진지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팽무성과 남궁혁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난 것이 있으면 누구든지 묻고 답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분위기는 제법 열성적이었는데 팽무성의 무공에 감명을 받거나, 자극을 받은 이들이 많은 탓이었다.

말을 하다 입이 마르면 술로 달랬으나 정신이 흐려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인의 깨달음은 거창한 게 아니라 쏟아지는 말 한마디가 누구에게는 기연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이한 분위기의 연회는 밤늦게 이어져갔다.

* * *

팽연후는 마지막 회의에 참여할 채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방에 나가니 팽무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예. 가시죠.”

팽무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팽연후의 뒤를 따랐다.

백가회. (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