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백가회는 후기지수에게는 축제였지만 동행한 가주와 명숙에게는 회의와 일의 연속이었다.
마지막 날인 오늘은 굵직한 안건들만 남은 상황이었다.
회의장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이십 명.
백가회에 속한 무림 세가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 가문의 가주, 혹은 가주 대리로 온 명숙들이었다.
자리가 하나둘 채워졌고 마지막으로 남궁세가 가주 남궁진이 제일 상석에 앉았다. 백가회가 열린 것은 진주언가였으나 백가회의 회주는 남궁진인 탓이었다.
이를 진주언가 가주 언사인은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그 자리에 내가 앉을 것이다.’
“오늘 회의는 한 명의 참석자가 추가되었소. 안건에 관련된 인물이라 데려왔소.”
남궁진의 말과 동시에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림의 내로라하는 가주들의 눈빛이 집중되었으나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냈다.
“하북팽가의 팽무성이라 합니다.”
팽무성의 등장에 언사인의 눈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저런 낯짝이었군.’
팽무성이 하나뿐인 아들의 코피를 터트리고 소성단을 꿀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언사인은 주먹으로 바로 앞의 다탁을 부숴버렸다.
“호오. 협호행의 그 패호도인가.”
“팽 대협, 훌륭한 인재를 배출한 팽가가 부럽소이다.”
거듭되는 칭찬에 팽연후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웃음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근래에 패호도라는 별호로 명성을 떨쳤고 어제의 비무에서는 권룡을 손쉽게 꺾어냈다.
이 소식을 들은 가주들은 놀라워했다.
이에 팽무성에게 관심을 가지는 가주들이 많았다.
특히 슬하에 딸을 가진 이들은 아주 매서운 눈으로 팽무성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뜨거운 눈빛이 있었으니 바로 사천당가 가주인 당백이었다.
[반갑네, 화련이 애비일세.]
당백의 전음에 팽무성은 눈인사를 건넸다.
‘왜 눈을 못 마주치겠지.’
팽무성은 당백과 눈을 한 번 마주치고 바로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전생에 삼천(三天)을 만났을 때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앉게, 회의를 시작하지.”
남궁진의 손짓에 팽무성은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이 안건은 당가와 팽가가 함께 올린 것이오. 마교에 대한 내용이오.”
남궁진이 숨길 것 없이 바로 마교를 언급하자 회의장 내에 모인 이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궁진이 흑상의 습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 가주들은 중간중간 팽무성을 훔쳐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마교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라...”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은밀하게 행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도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니.”
언사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보시오들, 이제 약관이 된 후기지수의 말을 그렇게 맹신하는 것이오? 만약 사파의 무공을 착각한 것이라면 백가회는 전 무림에 창피를 당할 것이외다.”
언사인은 팽무성의 눈썰미를 믿어도 되냐는 의문을 던졌다. 이에 일부 가주들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당백의 눈이 매서워졌다.
뭐라 반박하려 하던 팽연후의 팔을 당백이 살짝 잡았다.
자신이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언 가주, 패호도가 어디 보통 후기지수인가? 직접 들어보지도 않고 넘겨짚는 것은 가벼운 행동으로 보이는군.”
당백과 언사인의 신경전에 팽무성이 끼어들었다.
“보통 내공 심법은 순천(順天)의 이치를 따릅니다. 거기에 조화를 이루면 정파, 한쪽으로 극히 치우쳐 조화가 무너지면 사파의 심법이 되지요.”
갑작스레 입을 연 팽무성에게 가주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교는 역천(逆天)을 추구합니다. 이치를 비틀고 역행하는 것이 마기. 제가 느낀 검은 기운은 마기가 분명합니다.”
이어서 상대했던 독마종의 마인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해내자 가주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경험이 적은 후기지수가 이리 식견이 높으니 다들 감탄하고 있었다. 당백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언사인에게 물었다.
“아직도 의심이 되는가, 언 가주?”
괜히 트집을 잡으려다 실패한 언사인은 팽무성에게 사과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런 어린애 같은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궁진의 눈썹이 살짝 오므라졌다.
‘나이를 먹어도 한심한 행동을 벌이는 게 똑같군.’
“무림맹도 은밀하지만, 활동을 시작했소. 그쪽도 무언가 포착한 것이겠지, 정보를 교환하고 함께 대책을 마련할 테니 그전까지는 방비와 경계에 힘써주시오.”
남궁진의 말에 팽무성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행히 흘려듣지 않으셨구나.’
팽무성이 천살택문을 통해 마교의 정보를 보낸 곳은 무림맹, 정확히는 무림맹주의 직속기관인 맹주부(盟主府)였다.
맹주부로 통하는 서신은 곧바로 맹주에게 직속으로 전달되었다.
‘맹주님이라면 잘 준비하시겠지.’
전생에서도 정파를 규합하여 끝까지 마교에 맞섰던 인물이었다.
지금쯤이면 무림맹의 주축을 이루는 구파일방에도 소식이 갔을 터.
팽무성이 따로 정보를 보내는 것보다 무림맹주의 이름으로 내려오는 맹주령에 구파일방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무림이 평화로울 때는 산에서 박혀 수양에 힘쓰나 마교나 사파가 발호하면 선두에서 막아서는 게 이들이었다.
“각 가문은 지역의 경계와 정보 취합, 민심에 더욱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제갈세가 가주인 제갈명을 필두로 백가회의 정보망과 연락망을 재구축, 각 가문의 전력과 보급을 다시 확인하며 언제라도 싸울 수 있는 채비를 갖춰 갔다.
“마교가 이리 쥐새끼처럼 움직이는 것은 전쟁을 벌이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뜻. 긴장하되 과도한 심력을 낭비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오.”
초반의 잡음을 제외하고는 회의는 순탄하게 흘렀다.
“이번 백가회의 마지막 안건이오.”
“마교 뒤에 나오는 안건이라니 보통 일은 아니겠군.”
남궁진은 표정 변화 없이 회의를 이어갔다.
“아마 소문을 들으신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되오, 무신총 말이오.”
남궁진의 말이 맞았다.
무신총에 대한 소문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정보에 밝은 이들은 이미 들은 상황이었다.
“본가에서 얻은 정보로는 무신총의 위치가 좁혀지고 있다 들었소. 본가가 있는 산동성, 아니면 강소성으로 말이오.”
황보세가 가주 황보헌의 말에 가주들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다.
“무신총 같은 것들이 나타날 때마다 혈겁이 일어나곤 했지요.”
“게다가 무신이라는 명성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모일 것이오.”
“갑자기 무신총의 등장이라, 이것도 마교의 수작이 아닐까 의심이 됩니다.”
가주들은 저마다의 견해를 내놓았다.
그에 팽무성은 묵묵히 회의 내용을 듣고 있었다.
확실히 전생에서도 마교는 무신총을 이용했었다. 그만한 기회도 드물었으니 말이다.
허나 전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직도 무신총의 입구를 발견한 이가 없단 것이었다.
전생에서는 백가회가 열린 시점에 입구가 발견되어 백가회도 조사단을 급파했었다.
‘아마 내가 이것을 빼돌린 덕분이겠지.’
팽무성은 그저 듣기만 하려고 이 회의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팽무성은 품속에서 비단에 곱게 감싼 무언가를 꺼냈다.
“제가 가져온 물건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갈 가주님께서 봐주시겠습니까.”
제 손에 넘겨진 비단을 펼쳐 제갈명은 내용물을 확인했다.
고개를 가까이해 조심스레 살피길 반 각, 그제야 제갈명의 고개가 들렸다.
“팽 소협, 이건 설마 무신총의 장보도 조각인가.”
제갈명의 말에 가주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팽무성을 쳐다보았다.
“맞습니다, 흑상의 경매에서 얻었습니다.”
경매장을 떠나기 전, 팽무성은 장보도 조각을 구매한 이를 찾아가 웃돈을 주어 다시 사들였다.
전생에서도 마교가 무신총에 얽혔으니 이 장보도 조각도 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흑상에서 말하기를, 이 장보도 조각은 무신총의 입구 쪽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내 생각도 그러하네. 안쪽 구조가 그려진 부분이 찢긴 게 아쉽지만, 이 정도만 해도 어디인가.”
“입구가 그려진 조각이 여기에 있으니 마교가 무신총에 수작을 부리려고 해도 준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자네가 큰 일을 해낸 것일지도 모르겠어.”
제갈명은 동의하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상황을 확정하기는 어려우나 만약 계획을 세웠다면 차질이 일어났을 게 분명했다.
“마교의 유무에 상관없이 무신총 하나만으로 무림은 요동칠 겁니다, 이런 때에는 사람들의 목적을 빠르게 없애는 게 제격이지요.”
명성이 드높은 오대세가, 구파일방.
혹여 무림맹이라도 무작정 무신총의 출입을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신속하게 무신총을 돌파하여 보물을 얻어 무림인이 무신총에 들어갈 이유를 없애버려야 했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무림맹과 대문파는 이런 식으로 처리했었다.
제갈명이 돌려서 말했지만 가주들은 말뜻을 알아들었다.
“무신총에 파견할 인원을 구성해야겠군.”
당백의 의견에 바로 인원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무신총에는 무림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몰려올 터.
어중간한 무위는 도리어 방해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가문의 고수를 넣으려는 가주들 사이에서 사소한 언쟁이 벌어졌다.
혹여나 보물을 얻을 확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남궁진이 가주들을 보며 말했다.
“백가회의 이번 파견은 보물을 얻는 것이 주가 아니오, 무림의 혼란과 혈겁을 최소로 줄이며 혹시 모를 마교의 음모를 저지하는 것이오.”
남궁진이 다시 한번 상기시키자 가주들은 마음 한쪽에 숨어 있던 욕심을 내려놓았다.
상황을 정리하자 남궁진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제안이 흘러나왔다.
“팽 소협, 자네가 장보도 조각을 가져왔으니 자네도 들어가 보겠나.”
가주들은 놀라서 남궁진을 쳐다보았다. 일순 의문이 드는 가주도 몇 있었지만, 입 밖으로 성급하게 내뱉지는 않았다.
남궁진은 백가회주로서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해왔다. 그걸 가주들도 인정하기에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남궁진은 가주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팽 소협의 무위는 이 자리에 있는 몇몇 가주를 뛰어넘었소. 본인의 말을 못 믿겠다면 비무로 직접 확인하시오.”
남궁진과 지닌 무위가 비슷한 당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들은 남궁진의 말을 믿기가 힘들었다. 후기지수가 자신들보다 강하다니?
허나 남궁진의 말대로 정말 나서는 이는 없었다.
이겨야 본전이고 만약 진다면 엄청난 손해였다.
“필수적으로 데려가고 싶은 자들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창천검호와 독화입니다.”
무각도 같이하면 좋겠지만 폐관 수련에 들었기에 무신총으로 올지는 미지수였다.
언사인이 딴지를 걸려고 했지만 당백이 선수를 쳤다.
“검호는 말할 것도 없네, 그런데 화련이는?”
“무신총의 함정과 독, 기관을 맡길 생각입니다. 당 소저의 성취는 후기지수의 수준을 뛰어넘었습니다, 게다가 같이 지낸 시간이 있기에 손발을 맞추기도 쉽습니다.”
팽무성은 이번에는 가주들을 봤다.
“게다가 당 가주님은 최소한의 호위만 데리고 오셨다 들었습니다. 사천은 거리가 멀어 당가의 가솔들이 합류할 수가 없으니 당 소저가 최적이라 생각됩니다.”
팽무성의 말을 들은 가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신총도 기관과 함정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독과 기관에 능한 당가의 조력은 필수적이었다.
“팽 소협이 말한 인원에 사람을 더해서 서른 명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갈명의 말에 다른 가주들이 딱히 반대의 의견을 보이지 않자 남궁진은 결정을 내렸다.
“무신총의 내부에 보낼 인원은 이렇게 정하도록 하겠소.”
회의도 점점 마무리되어가는 분위기였다.
“장소가 점점 좁혀진다는 것은 장보도의 조각들이 누군가의 손에 있다는 뜻. 위치가 확정되면 바로 조사단을 파견하겠소.”
무신총의 위치로 거론되는 곳은 산동과 강소.
백가회는 산동의 황보세가를 집결지로 정하고 집결 날짜를 정했다.
조사단은 황보세가에서 대기하다가 무신총의 위치가 드러나면 바로 무신총으로 향할 것이다.
* * *
울적한 산속.
나무의 가느다란 가지 위에 서서 어둠에 잠긴 산을 바라보는 사내가 있었다.
어린아이의 팔뚝만 한 굵기임에도 가지는 휘지도 않고 사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느냐.”
“입구로 추정되는 몇 곳을 발견해서 조사 중에 있습니다.”
수하의 대답에 보고를 듣던 젊은 사내, 암마군(暗魔君)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미 미끼를 뿌린 지 오래다. 무림이 냄새를 맡고 달려오고 있거늘, 아직도 입구를 못 찾으면 어쩐단 말이냐.”
“송구합니다.”
“빌어먹을, 독마종 놈들. 그깟 상인 놈들을 상대로 일을 이렇게 만들다니.”
마교가 흑상을 습격한 이유는 흑상을 위협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무신의 장보도 조각을 손에 넣기 위함도 있었다.
흑상의 경매에 나온 장보도 조각이 마지막 조각이었다.
본래 계획대로였다면 무신총 전체의 함정을 보수하면서 새로운 함정과 진법을 깔아놓았을 것이다.
‘팽무성이라 했던가.’
흑상의 계획이 실패했으니 장보도 조각이라도 회수하려고 했건만, 그걸 가지고 소림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니 암마군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무신총을 작은 지옥으로 만들려고 했던 암마군의 계획은 팽무성에 의해 초장부터 꼬이고 있었다.
“움직여라, 빨리 찾지 못하면 마도천하를 보기 전에 내 손에 죽을 거다.”
광기의 무신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