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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막내아들-45화 (46/200)

45화

달빛은 드러나지 않고 작은 불빛조차 없으니 그야말로 갑갑한 어둠이었다.

퉁퉁퉁

채챙

하지만 살수들은 물 만난 고기들처럼 자유롭게 칠흑 속을 활보하며 어둠에 붉은빛을 뿌려내고 있었다.

건물의 창문에서는 짙은 독무가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곳곳에 설치된 기관이 모습을 드러내며 강침과 화살을 뱉어냈다.

팽무성은 기관이 보일 때마다 도를 휘둘러 아예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카캉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혈루문과 천살택문의 살수들은 서로가 덮치고 덮쳐지는 형국이 이어졌다.

전각을 향해 난 길을 걷던 팽무성은 천살택문의 살수들이 위험한 상황이면 슬쩍 도움을 주었다.

반면 혈루문의 살수가 간혹 팽무성을 노리려 할 때면 천살택문의 살수가 되려 그 뒤를 덮쳤다.

마지막 저지선이라 혈루문은 임무를 나간 살수를 제외한 모든 정예가 모여있어 전세는 치열했다.

이에 천살택문도 멈칫거렸지만, 꾸준히 길을 뚫어내는 상황이었다.

한편 분지의 마을에서 제일 높은 전각.

혈루문의 살수들은 이 전각을 혈각(血各)이라 불렀다.

혈각의 꼭대기 층에서 혈루문주는 조금씩 밀고 좁혀오는 천살택문의 포위망을 보며 물었다.

“팽무성과 천살택문은 대체 무슨 관계야.”

“드러난 바로는 아무것도 없소.”

혈루문주는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팽무성의 무공은 명성으로 전해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무신총에서 마인의 수장을 홀로 베어낸 팽무성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만약 팽무성이 홀로 쳐들어 왔다 해도 혈루문은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천살택문이라니.

“충분히 힘을 키워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혈루문주는 삼십여 년 전 자신이 십혈(十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때를 떠올렸다.

호북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히던 천살택문이 하북에까지 진출했을 때였다.

그 과정에서 천살택문과 충돌이 벌어졌다.

살문도 의뢰를 많이 받을수록 이름값이 높아지고 돈을 벌 수 있으니 경쟁이 벌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혈루문은 중원삼대살문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내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적극적이었다.

오히려 혈루문은 이번에 명성을 떨치려는 기회로 삼았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천살택문의 살법은 다른 차원이었고 그 살법을 익힌 살수들은 혈루문과 다른 경지를 보여내고 있었다.

천살택문과의 충돌이 끝났을 때 십혈(十血)이었던 자신의 이름이 오혈(五血)로 바뀌었으니.

그때 혈루문의 피해는 말로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혈루문은 피해의 정도를 넘어서 멸문 위기에 처해있었다.

“문주. 몸을 뺍시다. 퇴로가 막혔지만 뚫으면 되는 거 아니겠소.”

이혈(二血)이 열심히 설득했지만 혈루문주는 고개를 저었다.

“천살택문이 나섰네. 무슨 의미인지 잊었나. 저들은 사람을 가려서 죽이지만, 죽이고자 마음을 먹으면 대륙 끝까지 쫓아가서 죽이는 놈들일세.”

혈루문주의 말에 이혈도 결국 입을 닫았다.

이미 도망치기도 늦은 듯 아래층 쪽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혈각에 들어선 팽무성은 금빛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 장식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살수에는 어울리지 않는 곳 같은데.”

팽무성은 뒤따라온 산영과 살수 몇을 보고 지시를 내렸다.

“혈루문주는 내가 처리할 테니 산영은 바깥을 마무리해. 그리고 마을 전역을 샅샅이 뒤지고.”

“알겠습니다. 소왕.”

바깥은 혈루문의 살수가 가득했지만, 혈각 내부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 누구의 피를 볼 일도 없이 순탄하게 오 층까지 오를 수 있었다.

오 층에 오른 팽무성은 한가운데에 자리한 커다란 불상을 보고 눈이 가늘어졌다.

‘살수들의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불상이라.’

무언가 어울리지 않은 광경이었다.

불상 앞의 향로에는 무수한 수의 향이 꽂혀있었다.

“문도들이 죽을 때마다 하나씩 꽂는데 오늘은 아무리 꽂아도 부족하더군.”

팽무성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문주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수가 많네.”

혈각의 오 층에서는 여섯의 인물이 팽무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혈루문의 십이혈(十二血) 중 둘은 살행을 나갔고 넷은 저지선에서 죽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십이혈은 모두 모인 셈이었다.

팽무성의 눈이 좌에서 우로 이동하며 인물들을 한 명씩 살폈다.

순하게 생긴 중년의 미부도 있었고 지극히 평범한 사내도 있었다.

제각기 특징이 있었으나, 겉모습만 본다면 살수로 보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팽무성은 눈에 한가득 살기를 머금은 중년인을 보며 물었다.

“네가 문주라고 티라도 내는 건가?”

“후후, 이해하게. 손에 피를 하도 묻히면 이렇게 된다네. 일단 앉는 게 어떠한가.”

혈루문주가 앉자 다른 이들도 그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팽무성은 그대로 서 있으며 팔짱을 꼈다.

“원하는 게 뭔가.”

“멸문.”

주저 없이 혈루문의 멸문을 언급하자 앉아있던 살수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반면 혈루문주의 눈은 되려 차분했다.

“이유는?”

“팽가의 가솔에게 두 번이나 손을 댔다. 아무리 하북제일살문이라도 겁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혈루문주는 팽무성을 빤히 보더니 입가를 비틀었다.

“그 방구석의 둔재가 직접 복수하러 왔군. 그때 구혈이 아니라 더 윗줄을 보냈어야 했어. 그 업보가 이렇게 돌아오는군.”

의뢰를 받을 때 사공자의 호위들이 실력이 뛰어난 편이라 들었기에 당시의 구혈(九血)을 보냈었다.

그런데 그 구혈조차 사공자에게 간신히 독침을 박아넣고 죽음을 맞이했으니 혈루문주의 판단은 완전히 틀렸었다.

"팽지혁이라 했었던가. 그놈만 아니었다면 너도 진작에 죽었을 것을."

혈루문주의 말을 듣던 팽무성은 어금니를 드러냈다.

따로 추궁하지 않아도 이렇게 알아서 인정해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제안하지. 여기서 끝낸다면 자네와 삼공자의 암살을 의뢰한 이를 알려주지.”

의뢰인을 알리지 않는 것은 살문의 불문율이었으나 혈루문주는 상관없었다.

일단 살고 봐야 그 불문율이라는 것도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더구나 복수를 위해 이곳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라면 반드시 자신을 죽이려 한 흉수를 알려고 할 것이다.

혈루문주가 굳이 도망을 치지 않고 자신 있게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팽무성이 팔짱을 풀자 혈루문주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려온 팔은 어느새 허리춤의 도병을 잡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한다.”

발도와 동시에 뿜어진 빛살이 여섯의 살수를 제각기 스치고 지나갔다.

반응이 늦었던 미부와 사내는 앉은 자세 그대로 목이 달아났다.

“큽.”

팽무성의 도를 피해낸 넷 중 두 명도 완전히 피해내지 못해 피로 얼룩져 있었다.

혈루문주와 이혈만이 상처 없이 무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하북제일살문이라더니. 미적지근하네.”

눈 깜짝할 새에 거리를 좁힌 팽무성은 잘린 팔을 부여잡던 칠혈의 허리를 베었다.

이에 바로 옆에 있던 사혈은 자신의 허벅지에 난 상처를 움켜쥐었다.

손에 흥건한 피를 팽무성의 눈에 뿌리면서 입을 벌려 혀 밑에 숨겨놓은 세침을 쐈다.

그러나 팽무성은 고개를 뒤로 빼면서 손가락을 튕겨 세침을 다시 칠혈에게 날렸다.

세침이 칠혈의 미간에 박힘과 동시에 이혈의 철조(鐵爪)가 등을 할퀴었고 혈루문주의 단도가 팽무성의 심장을 찔렀다.

카캉

순간의 기막힌 합공이었지만, 어느 하나 팽무성에게 통한 것이 없었다.

단도는 팽무성의 손에 잡혔고 철조는 등에 펼쳐진 철호피공을 뚫어내지 못했다.

마치 철을 두드린 듯한 느낌에 이혈이 잠시 멈칫했을 때 팽무성은 돌아보지도 않고 팔꿈치를 휘둘러 이혈의 명치에 꽂아 넣었다.

콰작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이혈은 가슴 한가운데가 푹 꺼진 채로 일어나지 못했다.

혈루문주는 무언가 해보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팽무성의 내공이 들어와 혈맥을 휩쓰는 탓에 온몸을 떨기만 할뿐이었다.

팽무성이 혈루문주에게 주먹을 날릴 때, 바닥을 뚫고 쇠꼬챙이가 튀어나왔다.

쇠꼬챙이는 팽무성의 낭심을 노리고 치솟았으나 팽무성은 왼발로 원을 그리며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쇠꼬챙이와 함께 튀어나온 일혈(一血)은 쇠꼬챙이를 바로잡고 연달아 팽무성의 전신 급소를 노렸다.

하지만 팽무성은 한 손으로 혈루문주의 부러진 손목을 잡은 채로 일혈의 쇠꼬챙이를 받아치고 있었다.

‘글렀군.’

팽무성의 힘에 크게 떨리며 튕겨가는 쇠꼬챙이를 보며 일혈이 미간을 구겼다.

살수는 첫 공격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다.

검을 맞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살행의 성공확률은 떨어졌다.

혈루문주도 같은 생각인 듯 얼굴에 그늘이 졌다.

‘멸문인가.’

일혈은 혈루문 제일의 실력자이면서 다음 대의 혈루문주였다.

그렇기에 혈루문주는 일혈에게 걸었고 팽무성과 맞선 살수들은 일혈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십여 초도 지나지 않아 일혈은 수세에 몰렸다.

‘예전의 그놈보다 강해.’

초절정고수의 살행도 성공한 경험이 있었기에 일혈은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직접 팽무성을 상대하니 그 생각이 오판임을 직감했다.

감이 예리했고 나이에 비해 대처도 침착했다.

그리고 강했다.

카앙

마침내 쇠꼬챙이가 부러지며 일혈의 가슴도 갈라졌다.

“혈루문주. 나름 숨겨둔 한 수가 있었네. 다음 수는?”

말을 건넸지만, 빗자루인 마냥 바닥을 쓸고 다닌 혈루문주는 입을 열지 못했다.

팽무성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노도와 같은 극양의 내공이 혈루문주의 혈맥을 다시 한번 뒤덮자 혈루문주는 곧바로 각혈했다.

몸 안쪽이 불로 태워지는 고통에 혈루문주는 핏발 선 눈으로 팽무성을 노려봤다.

“두 명의 빚을 갚아야 하는데 편히 가면 안 되지.”

혈루문주는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전신의 혈맥이 터진 채로 절명했다.

“흐음.”

팽무성은 불상으로 걸어가 향로에 두 개의 향을 꽂았다. 팽무성의 손길이 닿자 향은 짧게 작열하다가 바로 연기를 피어냈다.

“늦게나마 빚을 청산했으니 편히들 가라.”

팽무성은 그 자리에 앉아 향이 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팽무성이 피어 올린 향에서 나오는 연기는 까마득한 밤하늘까지 떠오른 뒤에야 흩어졌다.

* * *

팽무성이 정리를 하고 내려오자 혈각의 일 층에서 산영과 천살택문의 살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고생했다. 고맙다.”

“아닙니다. 소왕.”

산영이 손짓을 하자 살수들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가져오기 시작했다.

“혈루문의 장부와 정보, 그리고 전표입니다.”

혈루문도 나름 비밀스러운 곳에 숨겨놨을테지만, 산영은 모조리 털어내어 혈루문의 재산을 싹쓸이했다.

“장부라면 암살 의뢰자가 다 기록되어 있겠네.”

“맞습니다. 다만 암어로 되어있어 푸는 데 시간이 소요됩니다. 해독이 완료되면 바로 가월에게 넘기겠습니다.”

“정보와 전표의 절반은 천살택문이 가져가.”

전표의 절반이라도 꽤 큰 금액이었다.

이제 팽무성도 슬슬 챙길 식구가 늘었으니 신경 쓸 것이 많아졌다.

그러던 차 돈을 생각하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금적상단은 얼마나 컸으려나.’

팽무성이 잠시 생각에 빠졌을 때 산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소왕, 결정해주실 일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팽무성과 산영이 혈각의 밖으로 나가자 오십은 넘어 보이는 수의 아이들이 서 있었다.

팽무성은 왜 이런 곳에 아이들이 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아이들은 주변에 피와 시체가 가득함에도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익숙하다는 뜻이었다.

“살수 훈련을 받던 아이들이네.”

“예. 보아하니 최소 일 년은 지난 듯합니다.”

팽무성은 잠시 고민했다.

천살택문에 맡기면 편하겠지만 결국 살수가 되는 것은 똑같았다.

그냥 환경만 바뀔 뿐이었다.

저 아이 중에 자의로 살수가 되려는 녀석은 없을 터.

팔려왔거나, 끌려왔거나 둘 중 하나였다.

팽무성은 무릎을 굽혀 시야를 맞추고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 중에 살수가 되고 싶은 녀석이 있나?”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팽무성은 질문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너희는 뭘 하고 싶으냐.”

재차 묻는 팽무성의 목소리는 한결 온화해졌다.

“밥 먹고 싶어요.”

“나는 엄마 보고 싶은데.”

“나도.”

“하루종일 잠만 자고 싶다. 너무 힘들어.”

한 아이가 입을 열자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서로를 보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팽무성은 피식 웃었다.

아직 아이다운 모습이 남아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래. 함께 가자.”

팽가로 돌아가는 길에는 듣기 좋은 시끄러움이 있을 듯 싶었다.

팽호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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