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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막내아들-48화 (49/200)

48화

흥륭 북쪽의 숲속.

일단의 무리가 숲을 가로지르는 길을 지나고 있었다.

앞쪽에는 붉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자리했고 그 뒤쪽에는 황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었다.

그 대형의 중간에는 세 사람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적랑대주. 이 숲만 지나면 끝이오?”

“예, 소문주.”

“흑랑대주는 일을 잘 처리해 놨겠지.”

적호문의 중얼거림에 황랑대주가 말을 받았다.

“팽가는 저번처럼 꼬리를 말고 물러났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훗. 당연히 그래야지.”

지금이라면 팽가의 영역을 쉽게 먹을 수 있다는 부문주의 꼬드김에 넘어간 적호문이었다.

적호문은 흥륭의 영역을 빼앗아서 아버지에게 보고할 생각에 기분이 들떠있었다.

흥륭의 소식을 들으면 아버지의 차가운 시선도 어느 정도 줄어들 것이라 믿었다.

적호문이 즐거운 상상에 빠져있을 그때, 전방에서 나아가던 적랑대의 걸음이 멈추었다.

이에 적랑대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전방에 길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습니다. 팽가의 무인들로 추측됩니다.”

수하의 보고를 들은 적랑대주와 적호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째서 팽가가 길목을 막고 있단 말이오.”

“아무래도 흑랑대의 일이 틀어진 것 같습니다.”

“크흠.”

적호문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내뱉자 적랑대주는 고개를 숙였다.

“처리하겠습니다.”

적랑대주가 적랑대를 지휘하기 위해 몸을 트는 그 순간.

채앵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더니 적랑대의 진형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적랑대주의 눈이 커졌다.

“뭐야.”

* * *

팽무성이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 다행히 마랑문 측은 당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풍도대와 흑호대는 숲속으로 기척을 감추었고 팽무성과 팽중혁의 병력은 숲에 난 길에 모습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대기하고 반 각 정도 지났을 때 나무 사이로 붉은색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적랑대가 입고 있는 붉은 무복이었다.

“옵니다.”

누군가의 말에 팽호대와 분타 무인들은 저마다 도병에 손을 가져갔다.

“형님. 팽호대가 길을 뚫어보게 하려고 합니다. 분타 무인들을 이끌고 뒤를 받쳐주시겠습니까.”

“그래. 기대하마.”

두 사람이 하는 말을 팽호대의 무인들도 명확하게 듣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나 움츠러드는 팽호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저마다 투기를 흘려내며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 걸어오는 적랑대도 자신들을 확인했는지 눈빛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스무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고 적랑대는 걸음을 멈추었다. 뒤쪽의 지휘자들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에 철호가 팽무성을 쳐다보았고 팽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호는 적랑대를 한 번 노려보더니 도를 뽑아 들며 소리쳤다.

“팽호대. 출진이다!”

철호를 필두로 팽호대가 진형을 갖춘 채 적랑대에게 달려들었다. 뒤이어 분타 무인들이 팽호대를 뒤따랐다.

먼저 덤빌 줄은 몰랐던 적랑대는 급히 검을 뽑아 대응했다.

카캉

채챙

선두에 있던 철호를 세 명의 적랑대원이 막아섰다. 하지만 철호는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앞으로 쏘아져 나가 도를 휘둘렀다.

서걱

맨 처음에 달려들던 적랑대원의 목이 너무나 손쉽게 떨어졌다.

나머지 적랑대원도 거침없이 쏟아지는 도격에 당황하여 막기에 급급했다.

철호는 사선으로 도를 휘둘러 앞을 막아서는 적랑대원을 검째로 베어버렸다.

“크학.”

적랑대원은 부러진 검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무기째 베어버리는 철호의 철혈맹호도는 어느새 팽무성이 펼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설치지 마라!”

철호가 세 명을 연달아 쓰러트리자 적랑대가 철호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적랑대를 베어내는 철호의 뒤쪽에서 검이 솟구쳤다.

쉬익

“어딜!”

철호의 옆구리를 노리려는 검을 옆에서 튀어 나온 덕삼이 하단으로 쳐냈다. 곧바로 도를 올려쳐서 적랑대원의 가슴을 베어냈다.

“형님, 아니 대주. 혼자 너무 깊게 들어간 거 아니요.”

“내가 길을 열 것이다.”

“같이 갑시다.”

철호와 덕삼은 서로 등을 맞대며 앞에 보이는 적랑대원들을 베어냈다.

철호와 덕삼이 중앙에서 적랑대를 쓸어내자 점점 벌어지는 틈 사이를 팽호대가 비집고 들어갔다. 저마다 무위를 뽐내며 시원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냐. 기세에서 밀리지 마라!”

적랑대주의 고함에도 거칠게 몰아치는 팽호대의 연격에 적랑대는 점점 양쪽으로 흐트러졌다.

팽호대는 숫자에서 밀렸지만 맹렬한 공세를 쏟아 내며 적랑대를 두들기고 있었다.

누구 하나 뒤처지는 이 없이 전진했고 팽호대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물결은 적랑대를 크게 흔들었다. 적랑대는 크게 위축되어 조금씩 대열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팽무성은 일부러 나서지 않고 팽호대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완전하게 제련된 것은 아니었지만 팽호대의 전력을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나쁘지 않다.’

“팽호대의 뒤를 따라!”

팽호대의 뒤를 팽중혁이 이끄는 분타 무인들이 받쳐주자 적랑대는 속수무책이었다.

팽무성은 전황을 살피며 큰 무리가 없다고 판단되자 모습을 감추었다.

적랑대가 크게 밀리는 모습에 황랑대주는 급히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지원을 해야겠군.”

황랑대주가 명령을 내리려 하자 숨어있던 풍도대와 흑호대가 양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

“저놈들에게 팽가의 무서움을 각인시켜라!”

좌우에서 쏟아지는 적들의 모습에 황랑대주는 물론이고 소풍을 온 기분이던 적호문마저 크게 당황했다.

“팽가가 이렇게 많은 병력을 보냈다고?”

“부문주의 말이랑 다르잖아!”

황랑대는 적호문을 지키기 위해 양쪽으로 갈라져서 싸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흑호대와 풍도대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놈들, 드디어 맞붙게 되는구나.”

카카캉

흑호대와 풍도대도 팽호대 못지않은 살벌한 기세를 흘려내고 있었다.

팽가의 소극적인 태도를 이용한 마랑문이 그동안 어떤 이득을 취해왔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

타격대 입장에서 시원하게 싸워보지도 못하게 되니 상당한 불만으로 쌓여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랑문과 맞붙을 기회가 생겼으니 흑호대와 풍도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특히 풍도대는 일 년 전 적성에서 황랑대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본가에서 떨어진 명령에 철수했던 한을 지금 풀어내고 있었다.

“이럴 수가. 팽가가 이리 강했었나.”

적호문의 얼굴은 점점 시퍼레졌다.

자신의 양옆을 지키던 두 대주는 자신의 부하들과 검을 휘두르며 적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적호문은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구겨진 인상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 방향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나 어디 어느 한쪽도 승기를 잡는 곳이 없었다.

흥륭을 먹기는커녕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채 돌아가야 할 판국이었다.

지금의 적호문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부추긴 부문주를 욕하는 것뿐이었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기회라는 거냐고.”

“기회일 리가 없지. 너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적호문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도가 살짝 목을 파고들자 적호문은 따끔함을 느꼈다.

이에 적호문의 눈이 잘게 떨렸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지.'

적랑대와 황랑대의 벽이 가로막고 있는데 팽무성이 어찌 이곳에 도달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신출귀몰한 팽무성의 등장에 적호문은 머릿속이 하얘지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테냐. 아니면 살아서 공을 세울 기회를 얻을 테냐.”

“공을 세울 기회라고?”

적호문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팽무성을 쳐다보았다.

팽무성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적호문은 방금 팽무성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이용당했다는 건 무슨 뜻이지?”

“너는 부문주의 말을 듣고 이곳까지 내려온 게 아닌가.”

팽무성의 말에 적호문의 눈이 커졌다.

대체 이놈이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맞는 것 같네.’

반면 팽무성은 흥륭에 도착하기 전에 받은 가월의 정보로 언지환이 마랑문의 부문주와 선이 닿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마랑문의 소문주를 보고 짐작으로 맞춰낸 것이었다.

팽무성은 적호문이 직접 움직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공을 세우고 싶다면 여기서는 무리다. 공은커녕, 너의 목숨이나 걱정해야 할 판국이니.”

팽무성의 말에 적호문은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을 비롯한 마랑문의 타격대는 전멸을 각오해야 했다.

“그럼 너는 나에게 어떻게 기회를 줄 셈이지?”

적호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팽무성을 쳐다보았다.

“너를 꼬드긴 부문주는 언가에서 보내는 재물에 넘어간 상황이다.”

“언가라고?”

적호문은 갑자기 튀어나온 언가라는 이름에 혼란스러웠지만 팽무성은 친절하게 일일이 다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팽무성은 가월이 부문주에 대해 보낸 정보를 적호문에게 건네주었다.

“마랑문의 부문주가 진주언가와 선이 닿아있다. 이 사실을 알리기만 해도 너는 큰 공을 세운 것이나 다름없다.”

팽무성이 준 정보를 살피던 적호문은 깜짝 놀라면서도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 정도라면 오늘의 피해는 아버지가 어느 정도 눈감아 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 기회. 잡아보도록 하지.”

“그럼 타격대를 멈춰.”

적호문은 급히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적랑대주, 황랑대주. 싸움을 멈추시오!”

뒤이어 팽무성도 외쳤다.

“팽가의 병력은 뒤로 물러나라!”

두 사람의 외침에 치열했던 전투가 잠시 중단되고 소강상태로 빠져들었다.

칼부림이 멈추자 적호문은 팽무성을 보고 물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있었으면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소. 그랬다면 양측의 피해도 없었을 텐데.”

어느새 팽무성을 대하는 적호문의 태도는 살짝 공손해졌다.

팽무성은 적호문의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쉽사리 포기한 것은 우리 전력이 강한 것을 확인한 탓이지. 만약 처음부터 말로 해결하려 했다면 네가 받아들였겠나.”

정곡을 찌른 팽무성의 말에 적호문은 입을 다물었다.

팽무성의 말이 맞았다. 팽무성이 처음부터 협상을 제안했어도 적호문은 오히려 정보를 빼앗고 흥륭을 먹으려 했을 것이다.

갑자기 팽무성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세가 적호문을 감싸기 시작했다.

“흡.”

적호문이 감당해내기에는 너무나 거세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팽무성의 기세를 맞이하는 순간 적호문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함부로 팽가의 영역을 넘지 마라. 마랑문의 소문주이니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겠지.”

적호문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팽무성의 기세가 사라지자 적호문은 급히 숨을 토해냈다.

“헉헉.”

“소문주. 괜찮으십니까.”

적랑대주가 부축하자 적호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철수합시다.”

“알겠습니다.”

적랑대주는 적호문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틀었다. 사방에서 노려보는 팽가 무인들의 살벌한 눈빛에 적랑대주는 슬쩍 눈을 깔아야 했다.

전투는 중간에 멈췄으나 승패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마랑문의 뒷모습은 축 처져 있었다.

‘당분간은 마랑문도 움직일 생각을 못 하겠지.’

팽무성이 흑랑대를 전멸시켰고 뒤따라온 적랑대와 황랑대도 이번 전투에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타격대 세 개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 마랑문이 격분해서 날뛰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문주와 언가가 연결되었음을 마랑문주가 알게 된다면 당분간 마랑문은 피의 숙청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당분간 마랑문은 외부에 시선을 보낼 여유가 없을 것이다.

이것으로 북쪽의 후환은 잠재웠다.

“이겼다!”

풍도대의 누군가가 소리치자 팽가의 무인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와아아!”

그동안 제대로 된 싸움조차 벌이지 못했던 팽가의 무인 입장에서 오늘의 승리는 정말 시원하고 값진 것이었다.

특히 팽호대는 적랑대가 부딪치며 자신들의 전력을 직접 확인했다.

거기에 철호와 덕삼의 지휘에 유기적으로 움직인 팽호대는 자잘한 부상자만 있을 뿐이었다.

팽호대는 자신들이 하나의 타격대로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 * *

마랑문의 병력을 몰아내고 흥륭 분타로 돌아온 팽무성과 팽중혁은 본가로 돌아갈 복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팽무성은 가월이 보낸 서신을 받자 왠지 모를 불안한 느낌에 휩싸였다.

조심스레 서신을 펴서 내용을 읽던 팽무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막내야, 무슨 일이냐.”

옆에 있던 팽중혁은 팽무성의 손등에 힘줄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물었다.

“형님. 빠르게 본가로 향해야겠습니다.”

팽중혁은 팽무성이 건네준 서신을 읽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게 정말이냐?”

“확실합니다. 어서 가시죠.”

팽무성은 급히 방 밖을 나갔고 팽중혁도 벌떡 일어났다.

지금 팽가에서는 팽가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팽가풍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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