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하북팽가 일주각.
일주각 연무장은 사주각 연무장의 최소 네 배는 넓어 보였다. 그 연무장을 밝히기 위해 수십의 횃불이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넓은 연무장에는 한밤중임에도 수많은 무인이 도열하고 있었다. 팽대혁이 끌어모을 수 있는 세력을 모두 모아낸 것이었다.
개중에는 통일되지 않은 제각기 다른 복장을 한 이들도 있었는데 팽가호가 걱정을 하게 만들었던 언가와 관련된 빈객들이었다.
팽대혁의 호위들이 일주각의 문을 열자 팽대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의 화려한 옷차림이 아닌 팽가의 무복 하나만 걸치고 있는 팽대혁이었다.
이를 본 무인들은 팽대혁의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며 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팽대혁은 연무장의 단상으로 올라가더니 그 앞에 모인 병력을 쓱 훑어보았다.
“팽가는 유례없는 위기를 맞게 되었소.”
위기라는 말에 무인들은 팽대혁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가주 대리인 팽연후를 중심으로 무후각주, 삼공자, 사공자가 반란을 모의 중이라는 첩보가 확인되었소.”
이에 이미 사전에 알고 있었던 지휘부와 달리 일반 무인들은 크게 동요했다.
“다들 그럴 분들이 아닌데.”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예상대로 무인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나자 팽대혁은 단상 아래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감찰각주가 단상 위로 올라가 입을 열었다.
“감찰각에서 이미 확인한 사항이오. 이미 증거들이 있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씩 공개하면서 증명할 수 없는 노릇이란 걸 모두 잘 아실 거요.”
감찰각주의 영향력은 확실히 컸다.
팽가의 비리와 부패를 찾아서 척결하는 곳이 감찰각이 아니던가.
감찰각주가 직접 나서서 이야기하자 무인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은 들어보자는 분위기였다.
그때 팽대혁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팽대혁이 꺼내든 물건은 횃불에 비쳐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붉은빛을 띠는 철패에는 정교한 양각이 되어 무언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비교적 앞쪽에 있던 무인들은 팽대혁이 무엇을 들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가주패?”
하북팽가의 가주만이 지닐 수 있다는 가주패.
소림의 녹옥불장과 같이 팽가의 신물이었으며 팽가의 가솔들은 가주패를 지닌 이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위엄을 상징하는 가주패를 팽대혁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무인들은 의아해했다.
“칩거 중인 가주께서도 상황의 심각함을 아시고 내게 가주패를 맡기셨소. 오늘 이 가주패로 팽가의 질서와 권위를 바로 세울 것이오.”
팽대혁의 말에 맞추어 대열의 앞에 서 있던 대주들과 중진 고수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반란에 대한 말이 나왔고 감찰단주가 힘을 실어주었다. 거기다 가주패까지 튀어나온 상황이니 일말의 의구심이 있다고는 하나 일단은 흐름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뒤에 서 있던 무인들도 저마다 무릎을 꿇기 시작했고 이내 연무장에 있던 병력 전원이 팽대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보기 좋은 광경이군.’
팽대혁은 잠시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다시 근엄한 얼굴을 하고 호통을 치듯 외쳤다.
“각 조직으로 이미 임무는 편성되었소. 임무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여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색출해내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무인들은 대주들의 명령을 받으며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에 무인들이 일거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팽가의 무인들이 사라지자 연무장 구석에 저들끼리 서 있던 빈객들이 다가왔다.
오늘을 위해 이들을 팽가로 집어넣느라 큰 노력이 필요했었다.
팽대혁은 포권을 취하며 빈객들을 반겼다.
“이렇게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이러기 위해 모인 이들이 아니오. 자, 어디부터 장악할 셈이오.”
빈객의 물음에 팽대혁은 주저 없이 답했다.
“무후각입니다. 일단 저희와 관계되지 않은 무인들은 죄다 발을 묶어놓을 생각입니다.”
무후각은 팽가의 타격대를 관리하고 움직이는 곳. 본래는 가주의 명령을 받고 무후각주가 집행했지만, 자칫 무후각주가 무언가 낌새를 감지하고 단독으로 움직인다면 곤란했다.
“옳으신 판단이오. 갑시다.”
* * *
“이러한 이유로 북호대의 출입은 엄금하겠소.”
“허어,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북호대주가 항의하자 감찰각주는 미간을 구겼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그저 기다리면 될 뿐, 혹여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오? 가주패가 찍힌 종이를 보고도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하는군.”
감찰각주는 외당에 있는 무력대의 전각을 돌고 있었다.
하나같이 중립세력이거나 대공자의 세력에 가담하지 않은 곳들이었다.
가주패는 그 자체가 인장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감찰각주는 가주패의 인장이 찍힌 종이를 들고 다니며 무력대를 하나씩 봉쇄하고 있었다.
“들어가시오, 북호대주. 방문에 봉지를 붙일 것이니 봉지가 찢어진 것이 확인되면 북호대도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간주하겠소.”
“크윽.”
북호대주는 감찰각주의 압박에 이를 갈았다. 난데없이 야간에 벌어지는 일이라 정보를 얻을 방도도 없었다.
‘각주,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입니까.’
상관인 무후각주가 떠올랐으나 반란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지목받고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북호대주는 감찰각주와 그 뒤에 대기하고 있는 감찰각의 무인들을 보더니 등을 돌려 북호각으로 들어갔다.
무언가 석연찮음을 느꼈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도가 없었다. 괜히 저항했다가 북호대 전체가 반란분자로 몰아간다면 그야말로 곤란했다.
북호각주가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감찰각의 무인들은 봉(封)이라는 글자가 써진 종이를 전각의 문마다 바르기 시작했다.
“이곳도 세 명이 경계해. 일단 문이 열리기만 하면 바로 신호탄을 터트려라.”
“알겠습니다, 각주.”
“우리는 다음 곳으로 가자.”
감찰각주는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 일만 끝난다면 자신은 큰 공을 세운 것이나 다름없으니 앞으로의 인생은 탄탄대로일 것이 분명했다.
반면, 감찰각주가 웃고 있을 때 팽대혁은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텅 비어버린 무후각을 보던 팽대혁은 뒤에 있던 언지환에게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언지환의 표정은 팽대혁과 비슷했다. 거기에 더해 미약한 살기마저 보였다.
언지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 가월이라는 년이 알아차린 듯싶습니다.”
“가월은 자네가 직접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팽무성이 떠난 이후로 사주각에 나온 적도 없다면서.”
팽대혁의 말이 맞았다.
수하들을 보내 온종일 감시를 하고 있었지만 가월이 움직이는 낌새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송구합니다.”
“허 참.”
팽대혁이 뭐라 말을 꺼내려는 사이에 빈객들이 끼어들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새가 아닌 듯하오.”
“이런 일은 간발의 차로 성패가 뒤바뀌는 법. 신속하게 움직입시다.”
빈객들의 말에 화를 추스른 팽대혁은 언지환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나.”
“가주전으로 가시지요. 무후각주가 자리를 비웠다면 팽연후와 삼공자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습니다.”
본래는 팽가의 중추를 마비시키고 제일 마지막에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 가주전이었다.
팽대혁이 가지고 있는 것은 오늘을 위한 가짜 가주패에 불과했다. 팽가를 마음대로 주무르려면 진짜 가주패가 필요했다.
“생각보다 가주전에 빨리 가겠어. 아버님이 계속 잠들어 계셨으면 좋겠군. 그래야 일이 수월할 것인데.”
“보아하니 반란 사실을 사전에 알지는 못하여 간신히 몸만 뺀 듯합니다. 다른 타격대는 봉쇄되었고 저희의 세력이 우세합니다. 순서만 달라졌을 뿐, 아직 변한 것은 없습니다.”
“계획이 상당히 당겨지는데 유령대는 시간에 맞춰서 도착하는 건가?”
팽대혁은 변수가 일어나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유령대를 찾았다.
유령대가 곁에 있다면 또 다른 변수가 더 생긴다 해도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팽대혁의 질문에 언지환은 잠시 거리를 계산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늦지는 않게 도착할 것입니다. 전투 도중에 합류될 것으로 보입니다.”
팽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정말 벌레 같은 것들이 너무 귀찮게 하는군. 일이 끝나면 다 터트려 죽여야겠어.”
팽대혁은 팽무성과 가월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어느샌가 눈에 거슬리더니 이제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팽대혁은 이 둘을 곱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마음껏 분풀이하고 죽일 셈이었다.
“우리도 서두르지. 팽가를 장악하는 것도 얼마 안 남았으니.”
팽대혁의 뒤를 따르는 언지환의 눈이 싸늘한 빛을 보였다.
‘그래, 팽대혁. 팽가를 장악해야 한다. 그게 우리 둘이 살 수 있는 길이다.’
* * *
팽대혁이 반란을 일으키기 일 각 전.
팽연후는 집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막 침상에 들어서려고 했다.
‘음!’
팽연후는 갑자기 등을 타고 올라오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의 도를 뽑아내며 몸을 회전시켜 후방을 베어냈다.
날렵한 공격이었으나 팽연후의 도는 허공을 훑고 지나갔다.
팽연후의 등을 점했던 이가 목을 뒤로 젖혀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탓이었다.
다시 도를 휘두르려 했던 팽연후는 야밤에 자신의 거처에 침입한 자의 얼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가월 아니냐.”
“야밤에 이리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한 일입니다.”
“무슨 일이더냐.”
팽연후는 팽가 내에서 팽무성을 제외하고 가월의 신분을 알고 있는 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렇기에 쓸데없는 질문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가월의 입이 조곤조곤 움직일수록 팽연후의 얼굴은 싸늘해지고 있었다.
“요즘 형님께서 정신을 못 차리시니 이 틈을 이용하려는 건가.”
“지금 대공자의 반란을 진압하기에는 늦었습니다.”
팽연후도 가월의 말에 동의했다.
가월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시점에서 반란을 시작했을 터, 타격대를 부르고 집결하기 전에 팽대혁의 세력에 각개격파 당할 확률이 높았다.
잠시 고민하던 팽연후는 중얼거렸다.
“가주전을 지키며 농성해야 하는가.”
가월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공자와 이공자가 지금 급히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버티면 됩니다.”
팽연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월은 창문을 열며 말했다.
“저는 삼주각에 가서 알리겠습니다. 무후각주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았다. 가주전에서 보자꾸나.”
가월이 열고 간 창문에서 찬 바람이 들어왔다. 팽연후는 그 바람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일단 대응은 하고 있지만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팽가의 대공자가 반란이라니?
대체 무엇이 부족하여 이런 일을 벌였단 말인가.
순간 팽대혁의 외가인 진주언가가 떠올랐지만 팽연후는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팽 씨 성을 물려받은 장손이었다.
팽대혁이 그럴 리가 없었다. 팽연후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팽연후는 팽대혁을 어여삐 여겨 아끼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첫 조카이기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대혁이, 이놈아. 네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팽연후는 읊조리듯 중얼거리더니 바로 무후각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그 시각 팽무성 일행은 전원 말에 탑승하여 빠른 속도로 팽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전원이 말을 탈 줄 아는 것은 아니었기에 말 한 마리에 두 명이 타고 있기도 했었다.
두두두두두
“곧 있으면 본가입니다.”
거센 말발굽 소리 안에서 팽무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던 팽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팽무성에게 받은 서신을 자신도 읽었지만,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형님이 음흉한 구석이 있다지만, 정말 반란까지 일으켰을까.’
팽중혁은 형제들의 맏형인 팽대혁이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리라 생각하기 싫었다.
팽가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팽중혁의 가슴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진실을 확인할 시간이 다가오는 탓이었다. 팽중혁은 내심 그 시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선두에서 말의 고삐를 쥐고 있던 팽무성의 시선이 좌측으로 틀어졌다.
그러자 좌측의 갈림길로 일단의 무리들이 경공을 펼치며 나아가는 게 눈에 띄었다.
죄다 흰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다들 권장법을 다루는 듯 몸에 찬 병장기가 없었다.
머지않아 상대방도 이쪽의 기척을 감지했는지 서서히 경공의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에 팽무성은 말머리를 돌려 이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팽무성뿐만 아니라 후미의 팽가 무인들도 이상함을 느낀 듯 무인들을 노려보았다.
왜냐하면, 이 길은 팽가로 가는 지름길로써, 길의 끝에는 하북팽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야밤에 이 많은 수의 무인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니 수상쩍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들은 어디를 향하는 것이오, 이 길의 끝에는 하북팽가뿐인데.”
팽무성의 물음에도 검은 무인들은 답하지 않았다. 팽무성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무인들의 수준을 살폈다.
‘보통 놈들이 아니다.’
무인 하나하나가 일반 타격대의 무인 수준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팽무성 일행에 비해 숫자는 적었으나 흘려내는 기세만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팽무성은 이놈들에게서 언가의 냄새가 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놈들은 전생에서도 본 적이 없다.’
“히힝!”
무인들이 흘려내는 살벌한 기의 충돌을 느낀 말들이 불안해하며 투레질을 했다.
서로가 아무 말 없이 눈싸움만 벌이고 있을 때 무인 사이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때가 안 좋았군. 하필 흥륭에서 복귀하는 팽가 타격대와 마주칠 줄이야.”
이에 팽무성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저들은 팽가의 사정에 대해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네놈들, 누구냐. 혹시 언가에서 온 것인가.”
팽무성의 물음에 무인들 틈 속에 섞인 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냈다.
노인의 사악한 웃음에 팽무성은 대답을 들은 느낌을 받았다.
'이놈들, 언가다.'
“빠르게 처리해라. 바로 팽가로 향한다.”
노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무인들은 대답도 없이 팽무성 일행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팽가풍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