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유령대원의 주먹질이 출렁이더니 이윽고 다섯 줄기로 나누어졌다.
동시에 권기는 제각기 철호의 요혈을 노려 쇄도해갔다.
그에 맞서 철호가 세 호흡으로 나누어 도를 휘둘러 권기를 갈라내자 그 뒤로 덕삼이 튀어나와 도풍으로 응수했다.
파파팍
원을 그리며 회피하는 유령대원의 발 뒤로 도풍이 아슬아슬하게 쏟아지며 애꿎은 땅을 때리고 있었다.
‘흥.’
반격을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던 유령대원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도망치려던 위치를 철호가 선점해서 도를 휘두르고 있던 탓이었다.
유령대원은 뒤늦게 두 주먹을 들었지만 이미 도가 반쯤 목을 가르고 있었다.
푸학
눈을 번쩍 뜬 유령대원의 목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일조장, 괜찮으냐.”
철호는 도를 거두며 덕삼의 왼쪽 어깨를 살폈다.
덕삼의 어깨는 크게 부어있었다. 방금 죽인 유령대원에게 일권을 허용한 탓이었다.
“괜찮소. 그냥 뻐근거릴 뿐이니 도를 잡는 데 지장은 없소.”
철호는 덕삼의 고집스런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다 싶으면 바로 말해라. 고집 때문에 동료의 짐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걱정마시오! 이 정도는 상처도 아니니.”
덕삼의 상태와 함께 전황을 살피던 철호는 그사이 밀리는 흑호대원을 돕기 위해 뛰쳐나갔다.
팽가 무인들은 수가 많았으나 상대의 무위에 막혀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게다가 유령대가 일부러 흑호대 틈바구니에 들어와 난전을 유도하니 그나마 있던 수적 우위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오로지 무공으로 부딪치는 양상으로 흘러갔고, 그 점은 팽가 무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훼손시키기에 이르렀다.
자신들도 엄연히 팽가 타격대의 일원이건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탓이었다.
땅에 쓰러진 무인도 팽가 무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철호!”
고립된 흑호대원을 철호와 덕삼이 구해내는 사이에 풍도대주가 풍도대원 둘을 데리고 다가왔다.
풍도대주도 한참 격전을 치르고 왔는지 도에는 선혈이 맺힌 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놈들, 너무 강하군. 언가에서 비밀리에 키운 정예인가.”
유령대는 소수로 다수를 상대하는 훈련을 여러 번 받아온 듯 숫자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단 세 명으로 작은 진법을 펼쳐 팽가 무인들을 농락하는 게 그 증거였다.
“나도 모르네. 일단 어떻게든 막아야지.”
동시에 풍도대주는 저 멀리 떨어져서 치열하게 격돌하고 있는 팽무성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쿠웅
쿠르르
폭음이 들려올 때마다 살을 에는 날카로운 기파가 연이어 사방으로 쏟아졌다.
몸을 타고 올라오는 기파만 봐도 노인이 강호에서 쉽게 보지 못할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런 노인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사공자라니.
사공자에 대한 소문을 여럿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풍도대주는 절로 감탄이 일었다.
“사공자께서 와주신다면 감사할 것인데.”
풍도대주의 중얼거림에 철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공자께서 적들의 수괴를 붙잡아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네. 우리끼리 맡아야 해.”
“철호의 말이 맞아. 우리는 대주들이 아닌가. 타격대주가 셋이나 있는데 이런 놈들 하나 못 막는다면 자리를 내려놔야지.”
철호의 의견에 동조하며 어느새 흑호대주는 그들 곁으로 걸어왔다.
“지휘는 어찌하고?”
철호가 묻자 흑호대주는 유령대가 뭉친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부대주에게 맡겼네. 지금은 내가 직접 발로 뛰는 게 더 중요할 듯싶어서 말이지.”
“흐흐, 새삼 나와 통하는 데가 있군.”
풍도대주는 철호의 옆에 나란히 서며 말했다.
“우리 애들은 뒤쪽에서 이공자가 신경 쓰고 계시네. 우리 셋은 저놈들을 끝장내자고.”
세 명의 타격대주는 일제히 한 곳을 응시했다.
“적호대에서 함께 임무를 치르던 옛날 생각이 나는군.”
철호와 흑호대주, 풍도대주는 유령대와 팽가 무인들이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 나란히 몸을 날렸다.
* * *
콰아아앙
서로가 펼쳐낸 절초가 만들어낸 폭발에 언자한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야 했다.
공중에서 초식을 펼쳐낸 팽무성도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공중제비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땅에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방금의 충돌로 내장이 약간 진탕되었는지 미량의 피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무명(武名)도 없는 노인이 어지간한 대문파의 장로보다 강하다니. 언가에서 제대로 힘을 쓴 모양이네.’
팽무성은 침을 뱉는 양 검은 피를 뱉어버리고는 언자한을 쳐다보았다.
흙먼지 사이로 드러나는 언자한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깔끔한 순백을 자랑했던 백색 무복은 곳곳이 찢어져 엉망이었다.
그중 찢겨진 오른쪽 소매로 드러난 언자한의 우람한 팔근육이 눈에 띄었다.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나이를 먹은 노인이 저만한 근육을 유지하는 것은 여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엄청난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을 터.
언자한이 흘렸을 땀과 시간을 생각하니 팽무성으로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허나 언자한의 그 바위 같은 팔근육도 팽무성에겐 절대적이진 못했다.
손등부터 시작하여 상완까지 기다란 붉은 선이 그어진 게 그 반증이었다.
방금의 충돌에서 팽무성이 우위를 점하고 팔을 길게 베어낸 것이었다.
그 여파로 언자한의 오른팔은 미동할 때마다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크흠.”
팔 전체를 가르는 긴 도상이었기에 언자한은 팔의 힘을 빼고 신속하게 점혈했다.
그 순간에 허벅지를 탄력적으로 튕겨낸 팽무성이 단번에 언자한의 가슴을 베어냈다.
꽝
도격을 막아낸 언자한의 수갑(手鉀)이 충격으로 잘게 떨렸다.
한쪽 팔로만 막기에는 팽무성의 도는 너무나 무거웠다.
언자한의 왼팔이 하릴없이 떨리며 조금씩 안쪽으로 밀려났다. 점점 언자한의 이마를 따라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노괴. 당신 같은 고수는 본 적이 없는데, 대체 누구지?”
팽무성의 질문에 언자한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본래라면 대답할 이유가 없었으나 지금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말할 기회도 없을 듯싶었다.
“언자한. 권왕의 동생이다.”
언가후의 동생.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소가주 경합에서 패배한 나에게 선택지는 둘 뿐이었다. 죽던가, 유령으로 살던가.”
당시 언가후가 보기에 언자한은 죽이기에는 아까운 패였다.
그래서 자신의 손아귀에서 완벽하게 부릴 수 있는 언가의 음지로 놓아둔 것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시작된 종속된 삶이었다.
처음에는 억압된 삶에 고통을 받았지만. 세월이 지나며 그마저도 무뎌졌다.
아니, 무뎌졌기보다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포기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권왕 그 작자야말로 진정한 노괴(老怪)인가.”
팽무성의 중얼거림에 언자한이 쓰게 웃었다.
“보아하니 권왕에게 미운털이 박혔던데 권왕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오늘 우리를 막아도 권왕은 다음 수를 노릴 것이다.”
그 사이에 언자한은 다시 힘이 샘솟는 듯 팽무성의 도를 조금씩 밀어냈다.
팽무성은 입꼬리를 비틀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벗어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내가 권왕의 목덜미를 물어버릴 것이니.”
“크흐흐.”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언자한마저 웃음을 터트렸다. 언자한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을 팽무성이 쉽게 말하니 왜인지 즐거웠다.
“이 실력으로 말이냐, 대단하긴 하나 아직 어림도 없다.”
“나도 알고 있다. 최소 초월경에는 올라야 승부를 걸어볼 수 있겠지.”
팽무성의 진지한 목소리에 언자한은 웃음을 삼켰다.
초월경은 강호에서 흔히 부르는 십대고수의 경지였다. 일개 후기지수가 그 경지에 도달하려 하는가.
찰나였지만 생각에 잠겼던 언자한은 팽무성의 도를 튕겨내고 뒤로 훌쩍 거리를 벌렸다.
언자한의 눈빛이 변한 것을 보았기에 팽무성도 굳이 뒤를 쫓지 않고 언자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기만 했다.
“어린놈아. 나의 무공은 권왕의 무공과 같다. 내 팔이 온전치는 않으나 마지막 절초를 펼쳐낼 테니 받아봐라.”
언자한은 남은 내공을 아낌없이 끌어올렸다. 전신에 내공이 화산처럼 폭발했고 뿌연 아지렁이가 노인의 등에 아른거려왔다.
이에 점혈로 간신히 지혈해놓은 상처가 다시 피를 토해냈으나 언자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우웅
언자한의 두 팔이 수없이 교차하기 시작하며 기이한 선을 허공에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 선을 따라 주먹에 튀어나온 권사(拳絲)가 휘감아지기 시작했고 점점 선명해지며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온전치는 않으나 언자한이 만들어낸 권사는 강기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이는 언자한이 벽을 보았으나 아직 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수많은 초절정 고수가 맞이하는 마지막 벽. 하지만 그 벽을 뛰어넘거나 깨부수는 무인은 일말의 소수에 불과했다.
후우웅
불안정한 강기를 두른 언자한의 주먹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야야야야
팽무성의 착각일까.
귀를 찌르는 귀곡성이 울렸다.
불안정한 강기와 권사가 섞인 회백색의 노도.
뿌연 안개가 입을 벌리는 것 같기도 하고 수백의 귀신이 덮쳐 오는 듯하기도 했다.
백귀파하(百鬼波河).
귀류백살권의 마지막 절초가 언자한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이것을 받아낸다면 나중에 권왕을 상대할 때 조금의 도움은 되겠지.’
팽무성이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았다.
하지만 언자한은 팽무성이 만약 살아난다면, 자신 대신 권왕을 죽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언자한에게 권왕은 그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가져가 마음대로 유린한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놈이 받아낼 수 있을까. 죽음을 감수하고 만들어낸 강기도 섞여 있거늘.’
깨달음이 없어 강기라 하기보다는 엄청난 양의 내공을 그냥 억지로 압축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 나름대로 경시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백귀파하가 팽무성을 삼켰고 언자한의 손끝에는 어떤 느낌도 올라오지 않았다.
‘역시 놈도 여기까지 인가.’
이에 언자한이 일말의 아쉬움을 내비치려 할 때였다.
불시에 백귀파하에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부아아앙
거대한 북이 터지는 소리가 일대를 울렸고 언자한은 백귀파하의 중앙에서 붉은빛이 번쩍이는 것을 느꼈다.
그때는 이미 백귀파하를 뚫고 거대한 섬광이 언자한을 훑고 지나간 뒤였다
비뢰적호(飛雷赤虎).
섬광은 백귀파하를 수백 갈래로 분쇄하고 그 영롱한 적광을 뽐내었다.
붉은 섬광의 끝.
팽무성의 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형태는 방금 언자한이 펼쳐낸 불안정한 강기와 비슷한 형태였다.
허나 척 보기에도 색과 형태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노괴, 마지막까지 귀찮게 하네.”
꽤 무리했는지 팽무성의 얼굴도 살짝 시퍼렜다.
“이제야 해방인가.”
언자한은 씁쓸한 웃음을 보이며 앞으로 기울어졌다.
* * *
그 시각 팽가의 내당.
“끅.”
팽대혁의 도에는 자비가 없었다.
이에 내당을 지키던 무인이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고꾸라졌다.
“쓸데없이 충성심 깊은 척하는군. 짜증 나게.”
다른 내당의 무인들도 팽대혁이 끌고 온 무인이나 빈객들에 의해 다 정리된 상황이었다.
핏빛 길 위로 가주전의 입구가 팽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어라.”
팽대혁의 명령에 무인들이 뛰쳐나가 도풍을 쏟아내 대문을 박살 냈다.
“이곳에 다 모여있었나.”
팽연후와 무후각주, 팽소혁, 가월.
가주전을 에워싸고 있는 팽영대와 삼주각의 무인들.
팽대혁이 처리하고자 하는 인원들이 한곳에 모여있었다.
핏물에 적셔진 팽대혁의 도를 보고 팽연후가 호통을 쏟아냈다.
“대공자!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냐. 작게는 패륜이오, 크게는 가문의 뿌리와 기둥을 흔드는 역란(逆亂)이다.”
하지만 팽대혁이 도중에 손을 휘저으며 말을 끊어냈다.
“숙부. 시끄럽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숙부의 꾸지람에 내가 꼬리를 말 것이라 여긴 것입니까.”
언제나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던 팽대혁이었다. 달라진 팽대혁의 태도에 팽연후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이놈! 언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다. 외가의 도움을 받아 가주가 된다 한들 가솔들이 진정 너를 가주로 따르겠느냐.”
팽연후가 계속 호통치자 팽대혁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거 다 필요 없습니다. 인의로 가문을 다스릴 생각도 없고요. 그냥 가주패 하나만 있으면 가솔들이 고개를 조아릴 텐데.”
팽대혁의 말에 팽연후는 기가 찬 얼굴이었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와. 이제 막 본색을 드러내네.”
팽소혁의 감탄을 들은 팽대혁은 특유의 웃음을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셋째야. 너는 살려둘 것이니 걱정 말거라. 쓸 데가 참 많으니 말이야. 네가 짊어질 것이 많다.”
팽소혁은 눈치가 빨라 팽대혁의 말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겠다는 뜻이리라.
“미친 새끼.”
팽대혁의 웃음에 팽소혁은 소름이 돋은 듯 장 호위의 뒤로 슬쩍 물러났다.
팽대혁은 가주전 앞에 모인 이들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있어서 얼마나 버티겠다고, 귀엽군.”
팽대혁의 웃음이 멈추고 그 자리에는 진득한 살기가 대신했다.
“시작해라!”
팽대혁의 명령에 빈객들을 중심으로 일주각의 무인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팽가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팽대혁에게 충성을 맹세한 무인들.
가주전을 향해 도를 빼들어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어보였다.
그 모습에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팽영대주의 눈이 싸늘해졌다.
팽가풍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