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막내아들-53화 (53/200)

53화

가주전 앞의 소동이 일단락되자 팽무성은 원로원으로 향했다.

원로원은 이미 한차례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팽가호를 비롯한 원로들을 묶어놓기 위해 빈객을 비롯한 일주각 무인들이 원로원을 침범한 탓이었다.

팽무성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원로원이 승세를 잡고 정리하는 분위기라 팽무성이 가담하자 바로 전투는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팽대혁이 피어 올린 반란의 불씨는 사그라들고 있었다.

* * *

하북팽가 창호전.

팽가의 모든 중진이 창호전에 모이자 회의장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건조하고 무거웠다.

물론 팽대혁 세력에 가담했던 인물들은 끝내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설령 반란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자라도 혐의가 해소되기 전까진 뇌옥에 가둬 놓으라는 조치 때문이었다.

팽진연은 가주전에서 쉬지 않고 회의까지 참석했다. 회의에 가주가 참여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팽연후는 근심 어린 눈으로 팽진연을 살폈다. 냉정을 유지하는 듯 보였으나 팽진연의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을 것이다.

“가주. 괜찮겠습니까.”

팽연후는 팽진연이 가주전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장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또 다른 심마가 팽진연을 덮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괜찮다. 본가의 꼴이 이러한데 어찌 안일하게 눕겠느냐?”

팽진연은 손으로 이마를 쓸며 대답하곤 가솔들을 바라보았다.

“시작하지.”

그렇게 반란의 수습을 위한 긴급회의가 시작되었다.

“저희 측에서 그동안 조사했던 증거들입니다.”

팽무성은 가월이 꾸준히 모아놓았던 정보들을 회의장에 제출했다.

혈루문의 장부 해독 내용.

언지환과 혈루문 부문주의 유착 증거.

그 외에도 팽대혁이 언가의 무인들을 팽가에 심어놓은 정황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제법 많은 양의 자료였지만 회의에 참석한 가솔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서책이 여러 부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를 읽는 가솔들의 얼굴은 펴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흐음.”

“허어...”

여기저기서 침음과 탄식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특히 삼공자와 사공자의 암살 시도에 관한 일은 명문정파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 가솔들은 서책을 읽으면서도 종종 팽진연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자료를 읽던 감찰각 일조장, 팽사진은 팽진연을 보며 말했다.

“저도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왔습니다. 따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감찰각주를 비롯한 다른 조장들은 뇌옥에 있었다. 감찰각의 요직 중 창호전의 회의에 참석한 이는 팽사진 뿐이었다.

“보아하니 감찰각이 그동안 제 기능을 못 했군. 일조장, 지금 상태로 감찰각을 움직일 수 있겠나.”

“예. 온전하게는 무리지만 이번 사안에 대한 처리는 문제없이 가능할 듯합니다.”

“자네에게 임시로 감찰각주의 권한을 주겠네. 감찰각은 이번 반란에 대한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가르게.”

“예.”

이를 보던 팽무성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신경 써놓기를 잘했네.’

감찰각의 간부 대부분이 뇌옥에 갇힌 상황에서 팽사진은 홀로 감찰각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대쪽같은 신의를 가지고 있는 팽사진이 감찰각주에 오른다면 감찰각은 더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팽진연은 오랫동안 집무에서 손을 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신속하게 명령을 내리며 상황을 정리해갔다.

오랜만에 보는 가주였으나, 목소리와 손짓 하나에 흘러나오는 기백에 가솔들은 긴장을 멈출 수가 없었다.

회의 중간에 팽연후가 조심스레 물었다.

“대공자를 비롯한 주모자들의 처벌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에 회의장의 말소리가 말끔히 사라졌다.

“자료를 보면 대공자가 단독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언가가 관련되었다는 게 확실하다. 맞나?”

실제로 이번 반란뿐만 아니라 팽대혁 세력 자체에 언가의 색채가 짙었다.

서책에 나열된 언가와 팽대혁의 연관점만 해도 열 개가 넘었다.

서책을 뒤적거리던 팽진연이 묻자 팽연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다면 처벌에 대한 논의는 그리 급한 일이 아니다.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음이니.”

팽진연은 서책을 덮으며 가솔들을 봤다.

“중요한 것은 언가다. 앞으로의 대응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이를 들은 가솔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팽진연의 말이 옳았다.

“그대들은 좋은 생각이 있나.”

진주언가의 행위는 한참이나 선을 넘은 행위였다. 더구나 명문정파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언가를 떠올리면 가솔들도 치가 떨렸다.

허나 언가이기에 쉽게 행동을 벌일 수 없었다. 지금의 팽가로는 언가와 전쟁을 벌일 수 없는 노릇이다.

몇몇 가솔이 의견을 내놓았지만 죄다 시원찮아 팽진연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상세한 부분은 달랐으나 결국 대부분이 훗날을 도모하자는 쪽이었다.

그러던 차에 팽무성이 의견을 내놓았다.

“저희 팽가의 힘만으로는 어떤 방안을 내놓아도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습니다.”

팽진연의 시선을 맞추며 발언한 이는 다름 아닌 팽무성이었다.

“그렇다면?”

“무림맹과 백가회에 알려야 합니다.”

팽무성의 말에 가솔들이 눈을 부릅떴다.

“흠!”

“사공자 그것은...”

가솔들이라고 그 생각을 못 한 것은 아니었다.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두 곳에 알린다면 중재는 받을 수 있으나 본가의 치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무림이 팽가를 비웃을 것입니다.”

누군가 팽무성에게 말하자 다른 가솔들이 어두운 얼굴로 주억거렸다.

“대공자의 반란 사실 때문에 말입니까.”

“맞습니다. 무림에 팽가의 위상이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팽무성은 입을 연 가솔을 쳐다봤다. 팽무성의 호안에 형형한 안광이 스쳤다.

“무림에 영원한 비밀은 없습니다. 더구나 팽가 전체가 관여된 일, 숨길 방도가 없으니 언젠가 드러날 일입니다.”

“하오나...”

팽무성의 말이 옳으나 그래도 팽가의 치부를 스스로 드러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눈을 감고 고민하던 팽진연이 입을 열었다.

“가문의 일에 이렇게 남의 힘을 빌리는 것 자체가 치욕이지.”

반대하던 가솔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말은 가솔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허나 떨어진 명성은 다시 쌓으면 그만. 이번 치부를 드러내며 팽가가 겪을 모욕과 창피는 당연히 감당해야 할 대가일세.”

팽진연은 가솔들을 보며 말했다.

“지금 대응을 미흡하게 하여 훗날에도 언가에게 흔들릴 빌미를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팽가의 진정한 치욕이 아니겠나. 이번 기회에 본가에 드리운 언가의 손길을 모조리 뽑아버리겠네.”

팽진연이 결정을 내리자 가솔들은 더는 반대를 하지 않았다.

“의견을 사공자가 제시했으니 사공자가 무림맹과 백가회에 보낼 중재 서신을 써서 가주전으로 올려라. 직접 확인하겠다.”

팽진연의 허락에 팽무성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가주.”

자연스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지만 팽진연의 머릿속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진 탓이었다.

가솔들이 죄다 자신을 쳐다보자 팽진연은 관자혈을 누르며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이에 팽중혁이 답했다.

“모아온 증거도 그렇고, 마랑문에 이어서 오늘의 반란까지. 사공자의 역할이 컸습니다. 처벌도 중요하나 공을 세운 자들의 보상도 중요하다 사료됩니다.”

팽중혁의 말에 팽소혁이 덧붙였다.

“뭐 사공자가 거의 다 하기는 했지요.”

이공자와 삼공자가 사공자를 지지하는 분위기에 가솔들은 놀라워하며 공자들을 쳐다보았다.

“공자들의 말이 옳습니다. 사공자가 이번에 큰 역할을 했으니 마땅한 상이 내려져야 할 것입니다.”

중립을 표방하는 무후각주마저 힘을 실어주자 팽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가솔들의 인정을 받았는가. 커다란 존재감이군.’

팽진연은 팽무성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사공자가 팽가의 기둥을 지켜냈으니 당연한 일이다.”

팽진연의 허락에 재경각주의 주도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먼저 대공자와 일주각에서 압류한 재물 목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팽진연은 말없이 의자에 몸을 묻으며 가솔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죄다 언가에 짓눌려 있었구나.’

가솔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가솔들을 지키고 힘이 되어야 할 팽가라는 울타리가 약해지고 작아진 탓이었다.

‘이번 기회에 썩은 부분은 도려내고 팽가도 바뀌어야 한다.’

팽진연은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으나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팽진연은 이공자부터 차례대로 공자들을 눈에 담았다.

이윽고 팽진연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팽무성. 팽진연은 팽무성에게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 * *

팽가 지하 뇌옥.

철컹

사공자라는 신분에도 몇 번의 검문을 거쳐서야 지하 뇌옥에 들어설 수 있었다.

본래는 하북에서 날뛰는 몇몇 악인만 갇혀 있어 대부분의 뇌옥이 비어있어야 했다.

하지만 팽대혁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그 관계자들이 모조리 뇌옥에 갇힌 상황이었다.

뇌옥에 갇힌 이들은 계단에서 내려오는 팽무성을 알아봤지만, 함부로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저 팽무성이 가까워지는 것만으로 그 위압감에 숨이 턱 막힌 탓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환기가 되지 않아 탁한 공기가 더욱 숨쉬기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

팽무성은 제일 안쪽의 뇌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넓은 뇌옥의 크기와 달리 단 한 명만이 갇혀있었다.

한쪽 팔이 없는 죄인. 팽대혁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벽을 보고 앉아있던 팽대혁이 등을 돌렸다.

“네놈...”

평소의 여유가 담긴 목소리는 어디 가고 쩍쩍 갈라지는 거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재물을 어지간히 숨겨놓았더군. 네가 열심히 모은 노력을 봐서라도 내가 좋은 곳에 쓰겠다.”

팽무성이 앞뒤의 말을 자르고 얘기했지만 팽대혁은 단번에 말뜻을 이해했다.

“내가 어떻게 모은 것인데 네놈 따위가 홀랑 먹게 되는군.”

까득

열이 오른 팽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닥에 팽대혁의 손톱이 긁어지며 불쾌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네놈의 형벌이 결정됐다.”

회의의 막바지에서야 팽대혁의 처분이 결정되었다.

바로 목을 베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단전을 폐하고 사지의 힘줄을 잘라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의견도 팽무성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내 의견이 채택되어 정말 다행이다.”

팽무성의 말에 팽대혁의 콧잔등이 잘게 떨렸다.

“네까짓 놈이 제안한 형벌이라, 기대가 되는구나.”

여유를 가장한 웃음을 보였으나 팽대혁은 초조한 듯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너의 단전을 폐하고, 사지의 근맥을 자를 것이다.”

“그게 전부인가?”

팽무성이 말한 것들은 팽대혁도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무공을 잃는다 생각하니 손이 떨렸지만 팽대혁은 무릎을 세게 잡으며 이를 숨기려 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이곳에 갇혀서 내가 종종 들려주는 얘기를 들어야 할 거다.”

뜬금없는 얘기에 팽대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소가주가 되었을 때, 팽가가 강해졌을 때, 언가를 꺾었을 때, 팽가가 다시 오대세가에 들었을 때, 내가 가주가 되었을 때, 내가 무언가 성취를 낼 때마다 너를 찾아와 이에 관한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팽대혁의 눈이 잘게 떨렸고 그와 별개로 팽무성의 비릿한 웃음은 더욱 진해졌다.

“언가가 너를 더 강하고 높게 만들어주기에 선택했다고 말했었지. 나는 팽가를 선택해서 네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이룰 것이다.”

“이익.”

팽대혁의 얼굴이 험악해지며 입술을 악물었다.

“나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반면에 너는 세월이 지나도 이 뇌옥에 멈춰있는 것을 체감하며 괴로워하겠지.”

잇몸에 힘이 들어가자 말랐던 입술이 터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피의 비린 맛이 느껴졌지만 팽대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팽무성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걸까.

마치 팽무성은 자신의 머리와 마음속을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았다.

"네가 이루고자 했던 것을 내가 대신 이루는 모습을 보며 죽을 듯이 괴로워 하겠지."

팽무성의 말에 팽대혁은 일순 소름이 돋았다. 팽무성의 말이 맞았다.

팽무성의 말대로 행해진다면 팽대혁은 자신에 대한 자괴, 뇌옥을 나갈 수 없는 현실이 버무려진 지옥에서 살아갈 것이 분명했다.

“죽여라.”

팽대혁은 머리를 뇌옥의 쇠창살에 부딪치며 팽대혁을 노려보았다.

팽대혁의 이마에는 한 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냥 깨끗하게 죽이란 말이다. 나를 그렇게 오랜 시간 능욕하며 괴롭힐 생각이냐? 나는 하북팽가의 대공자 팽대혁이란 말이다!”

팽대혁은 미친 듯 발악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콰앙

팽무성의 손목이 가볍게 흔들리자 쇠창살이 거세게 흔들리며 팽대혁을 벽 쪽으로 튕겨냈다.

“컥!”

팽무성은 싸늘한 눈으로 팽대혁을 내려봤다.

팽대혁은 악에 받친 얼굴로 소리쳤다.

“네놈 따위가 언가를 넘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팽대혁의 날 선 음성에 일순 팽무성이 짙은 살기를 띠었다.

“기다려라. 네가 그리 따르고자 했던 언가를 이 손으로 무너트려 줄 테니.”

서서히 빛을 잃어가며 흔들리는 팽대혁의 눈을 보며 팽무성은 등을 돌렸다.

“팽대혁, 마음과 정신을 잘 추슬러라. 너의 형벌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팽무성은 뇌옥을 빠져나가는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저 물러터진 형벌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단순한 죽음은 팽대혁이 일으킨 죄에 비해 너무나 가볍고 순식간에 끝나는 형벌이라 여겼다.

팽무성은 팽대혁이 좀 더 오랜 시간 동안 죄의 무게를 체감하기를 바랐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팽대혁이라는 인간을 경험한 팽무성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형벌이었다.

지하 뇌옥을 빠져나오자 전각 사이로 저물어가는 석양이 보였다.

“드디어 정리했으니 이제 바꿀 때가 왔구나.”

팽무성은 붉게 물드는 팽가의 전경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수습과 준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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