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막내아들-56화 (56/200)

56화

팽진연과 팽연후는 가주전 밖에 나와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지금 둘째와 막내가 비무를 하고 있다고?”

“그렇소. 형님.”

팽연후는 팽진연의 팔을 부축하며 말했다.

“아쉽군.”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팽연후의 의견을 따라서 가주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갑자기 비무라니, 평범한 비무는 아닌가 보군.”

“가솔들도 엄청 많이 몰려갔소. 슬슬 소가주 경합이 끝나려나 보오.”

비무가 벌어지는 이주각은 가주전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평소와 다른 공기가 이곳까지 느껴졌다.

팽진연은 말없이 이주각 방향을 쳐다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연후야, 그동안 나 대신 고생이 많았다.”

“됐소.”

쓴웃음을 짓던 팽연후는 팽진연과 함께 이주각 방향을 바라보았다.

꽈르릉

순간 땅을 울린 뇌성과 함께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와 동시에 붉은 뇌벽이 솟구쳤다.

전각 사이로 가려져 명확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틀림없는 번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팽진연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부축하고 있던 팔에서 떨림을 느낀 팽연후는 급히 팽진연을 살폈다.

“형님! 괜찮으시오?”

“그래... 괜찮다.”

팽진연은 몸을 떨면서도 이주각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연후야, 방금 그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팽진연을 보며 팽연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에 조부께서 보여주셨던 혼원벽력도와 비슷한 면이 있소.”

“설마.”

낮게 읊조리는 팽진연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 * *

꽈르르릉

우렁찬 뇌성이 귀를 울렸지만 팽중혁은 뇌성에 감쳐진 작은 쇳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팽중혁이기에 들을 수 있었다.

쩌엉

그것은 자신의 직도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팽중혁은 절반으로 짧아진 직도를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연무장의 바닥으로 눈길을 돌렸다.

바닥은 깊게 갈라져 있었다. 바닥의 거대한 흉터는 마치 번개를 본뜬 것과 비슷했다.

그 흉터는 팽중혁이 서 있는 자리를 교묘히 비껴가고 있었다. 찰나에 팽무성이 도의 방향을 비틀어낸 덕분이었다.

“살아있군.”

팽중혁은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더니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관천적뢰가 펼쳐지고 솟구치는 뇌전을 마주했을 때 순간이지만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둘째 형님, 괜찮으십니까.”

팽무성은 한걸음에 팽중혁에게 다가와서 부축을 해주었다.

“괜찮다.”

팽중혁은 자신의 팔을 부축하는 팽무성의 팔을 부드럽게 밀어내곤 웃었다.

“막내야, 정말 강하구나. 걱정 없이 맡길 수 있겠어.”

팽무성은 그저 희미한 미소로 화답할 때, 관람석에서 누군가 일어났다.

팽중혁을 지지하는 가솔들이 모여있던 자리였다.

“정말 수준 높은 비무였소. 특히 사공자의 무공에 감탄을 멈출 수 없었소이다. 많이 배웠소.”

비무가 시작하기 전, 팽무성을 불편한 시선으로 봤던 가솔 중 한 명이었다.

그랬던 자가 포권을 하며 감사를 표하자 옆에 있던 가솔들도 일어나며 포권을 취했다.

“잘 봤습니다.”

“오늘 이 비무 덕분에 개안했습니다.”

이를 보며 팽중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따르던 가솔들이 팽무성을 인정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공자 세력을 시작으로 연무장을 둘러싼 가솔 일동이 일제히 팽무성과 팽중혁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들에게도 감명 깊은 비무였던 탓이었다. 그런 만큼 가솔들의 머릿속에 팽무성이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이에 팽무성과 팽중혁도 포권으로 답했다.

포권을 취하는 팽무성의 뒷모습을 보며 덕삼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 사주각에 들어가기를 잘한 것 같네.”

“그러게, 원래 대단하신 줄은 알았지만, 오늘 또 새롭게 보이는군.”

팽무성을 바라보는 팽호대의 눈에는 이전보다 더 높은 존경이 서려 있었다.

철호는 이를 보고 만족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포권을 하는 두 사람에게 팽소혁이 건들거리며 걸어왔다.

“드디어 경합의 끝이 보이는 건가.”

팽소혁도 두 사람의 비무를 보고 무언가 개운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후.”

팽중혁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아우들을 보며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을 흘렸다.

일 년 전만 해도 소가주 경합이 이리 평화롭게 끝난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누가 승자가 되든지 형제가 함께할 일은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형제들이 나란히 서 있으니 팽중혁은 기뻐서 계속 웃음이 흘러나왔다.

팽중혁은 두 팔을 뻗어 양쪽에 있는 아우들의 어깨를 잡았다.

“아, 뭐야. 징그럽게 왜 이래.”

“둘째 형님.”

어깨동무를 하듯 두 사람을 잡아낸 팽중혁은 아우들의 불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내일 다 같이 아버님을 뵈러 가지요.”

팽무성의 말에 팽중혁과 팽소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끝이 보이는구나.”

“그러네, 이제 다 끝난 건가.”

형제들은 감회가 새로운 듯 저마다 한 마디씩 말하며 생각에 잠겼다.

* * *

비무를 마치고 사주각에 도착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연무장에는 여러 대의 마차가 도열해 있었다. 그 가운데 일꾼들이 마차의 짐을 사주각의 창고에 옮기고 있었다.

“공자님!”

때마침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가월이 팽무성을 발견하곤 소리쳐서 불렀다.

팽무성은 가월의 옆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음을 확인했다.

“소단주.”

“하하, 팽 공자. 오랜만이오.”

금적상단의 소단주 금용만, 그가 포권을 하며 팽무성을 맞이했다.

팽가를 방문한다는 연락이 전혀 없었기에 팽무성은 의아하여 물었다.

“혹 금적상단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니오, 원래 팽가를 방문하려 했는데 안 좋은 소식도 들려서 좀 서둘렀소.”

팽무성은 금용만을 오랜시간 밖에 세워놨음을 깨닫곤 사주각 안으로 안내했다.

사주각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가월이 내온 차로 일단 목을 축였다.

“요즘 상단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슬슬 궤도를 타고 있소. 꾸준히 성장 중이오.”

금용만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팽가의 비호를 받아 오로지 상행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금적상단은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이제 태원에서 남 부럽지 않은 금력을 지닌 금적상단은 본격적으로 적화상단과 충돌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수세를 취하며 보존에 급급했다면 지금은 오히려 적화상단의 약한 부분을 물어뜯어 조금씩 삼켜내고 있었다.

금용만은 앞으로 일 년 내에 적화상단을 집어삼키고 태원제일상단으로 도약할 자신이 있었다.

이것은 모두 금용만의 날카로운 상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본 상단도 안정되었고 팽 공자도 협호행을 끝냈다고 하니 슬슬 지원을 준비 중이었소.”

본래는 섬서로 향하는 커다란 상행이 있었지만 팽가의 반란 소식에 금용만은 상단주인 금원일에게 맡기고 팽가로 향했다.

“팽 공자가 걱정되어 이리 달려왔는데 생각보다 팽가의 분위기가 괜찮은 듯 보이더이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팽 공자가 금적상단에 보인 은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오.”

그러며 금용만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커다란 반합을 팽무성에게 건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금용만이 계속 들고 있었던 터라 팽무성은 호기심에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에 금용만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손짓했다.

“풀어보시오.”

보자기를 풀자 직사각형의 커다란 반합 위에 작은 반합이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팽무성은 먼저 작은 반합을 들어서 뚜껑을 열어보았다.

“흠.”

뚜껑을 열자 코를 톡 쏘는 향과 함께 불그스름한 단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보며 금용만은 뿌듯한 듯 말했다.

“팽 공자가 지금 들고 있는 것은 적영단이고 나머지 반합에는 염초단이 들어있소.”

적영단(赤英丹)과 염초단(炎草丹).

극양의 기운을 가진 두 개의 영약.

그 귀물을 금용만은 오로지 팽무성만을 위해 흑상으로부터 사들인 것이었다.

“설마.”

팽무성은 반합을 내려놓고 커다란 반합의 뚜껑을 열었다. 그 직후 팽무성의 눈이 커졌다.

총합 이십 개의 단환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많은 수의 영약을 한꺼번에 보는 것은 팽무성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치 보석을 보는 듯 팽무성의 눈이 반짝였다.

“소단주, 이것이 다 영약입니까.”

“훗, 팽 공자가 놀라는 모습을 보니 챙겨오기를 잘한 것 같소.”

금용만은 백색의 단환 하나를 조심스레 집으며 말했다.

“백진단이라는 것인데 한 알에 십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오. 팽 공자가 따로 타격대를 키운다 들었는데 도움이 될 것이오.”

백진단은 운남의 유명한 약가(藥家)와 거래를 하다가 거래 대금 대신에 받을 수 있었다.

금용만은 상단을 키우면서도 팽무성의 은을 잊지 않고 꾸준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사주각의 운영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품들을 챙겨왔으니 나중에 확인해 보시오.”

“아아.”

팽무성은 그제야 사주각의 창고에 끊임없이 들어가던 상자들이 어떤 것인지 짐작했다.

금용만의 말대로 팽무성은 물론이고 팽호대도 빠르게 무공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특히 영약이라고는 먹어본 적이 없는 팽호대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금용만의 통 큰 지원에 팽무성은 헛웃음을 지으며 포권을 했다.

“지원이 헛되지 않게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에 금용만이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말했듯 팽 공자의 은에 보답하는 것이오. 그리고 금적상단과 팽가는 같은 길을 걷기로 하지 않았소. 앞으로도 금적상단은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다가 금용만은 팽무성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경합에 대한 중요한 비무가 벌어졌다고 하던데 맞소?”

금용만은 가월에게 비무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자신이 팽가로 들어올 때 들은 뇌성이 그와 관련 있다고 여겼다.

“이제 소가주 경합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금용만의 눈이 가느스름해지자 팽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헛, 거참.”

이제 소가주 경합에 적극적으로 지원하려 했는데 소가주 경합이 끝났다고 하니 살짝 허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이었다.

팽무성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더욱 짙어지며 금용만은 팽가와 더욱 끈끈한 관계를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소가주가 경합이 끝났다 하여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할 일이 많아질 겁니다.”

“으음, 맞소.”

금용만도 팽무성이 소가주가 되려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바로 수긍했다.

“상단의 일은 많이 바쁘십니까.”

“아니오, 섬서의 상행이 끝나면 당분간은 여유로울 것으로 보이오.”

“그렇다면 당분간 하북에 신경 써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하북?”

팽무성의 제안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금용만은 금세 그 의미를 낚아챘다.

“언가가 봉문 했으니, 팽가의 영향력을 넓히기가 쉽겠군.”

“맞습니다, 다만 언가도 대비를 했을 테니 소단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금용만은 계산을 마치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음, 하북은 산서에서 가까워 금적상단의 분타를 내기에도 제격이니. 좋소, 한 번 진행해 보겠소.”

“좋습니다.”

팽무성은 언가의 세력권을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다. 언가가 봉문하여 힘을 못 쓰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언가도 봉문을 대비해서 철저하게 준비했겠지만 금용만이라면 그 틈을 충분히 뚫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사람 한 명을 붙여드려도 되겠습니까. 데리고 다니면서 편히 부려주시면 됩니다.”

“그게 누구요.”

팽무성은 씨익 웃었다.

“제 셋째 형님인데 상도(商道)를 걷고 있으니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아. 들어서 알고 있소. 일손이 늘어나면 나야 좋소.”

팽무성은 금용만의 곁에 팽소혁을 계속 붙여놓을 요량이었다. 금왕이라 불리는 금용만의 옆에 있으면 팽소혁도 무엇인가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나이 차이는 별로 나지 않으나 금용만은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형님, 좀 더 실력을 키워보라고.’

* * *

다음 날 아침.

팽가의 세 형제는 아침 일찍 가주전을 찾았다.

“가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팽영대주는 공자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켜주었다.

팽영대가 문을 열어주자 공자들은 가주전 안으로 들어갔다.

“와서 앉아라.”

팽진연은 의자에 앉아서 아들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자들이 착석하자 팽진연은 아들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팽무성이 팽중혁과 팽소혁을 보자 두 사람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에 팽무성은 팽진연을 마주 보며 말했다.

“소가주의 경합의 끝을 알리려고 왔습니다.”

경합의 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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