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경합의 끝이라...”
팽진연은 음미하듯 중얼거리다가 팽중혁과 팽소혁을 보며 물었다.
“너희도 같은 생각이더냐. 막내가 너희를 제치고 소가주가 되는 것이다.”
팽중혁은 망설임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막내가 제일 소가주 자리에 적합하다 생각합니다.”
“뭐, 그동안 장자만 소가주가 된 것도 아니고, 상관없겠지요.”
팽소혁도 뒤이어 답하자 굳게 다물어진 팽진연의 입이 미세하게 비틀어졌다.
팽진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너희가 다 같이 와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보기 좋구나.’
팽진연은 차마 뒷말은 잇지 못하고 마음속에 남겨 두었다.
팽대혁이 무공을 폐하는 형벌을 받고부터 며칠간 잠 못 이룬 팽진연이었다.
아비로서 아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컸다.
그런데 남은 형제들이 이런 우애를 보여주니 팽진연이 품고 있던 마음의 응어리가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흐음.”
팽진연은 후련함이 담긴 한숨을 내뱉더니 팽무성을 직시했다.
“사공자, 소가주는 가솔과 가문의 무게를 짊어지고 내일 당장이라도 가주가 되어 가문을 이끌 준비가 된 자를 말하는 것이다.”
팽진연의 두 눈에 칼날 같은 정광이 번득였다. 그에 팽무성은 그 눈빛을 담담히 마주했다.
“해보겠습니다.”
흔들림 없는 대답에 팽진연은 고개를 끄덕이곤 팽중혁과 팽소혁을 보며 말했다.
“막내가 모든 일을 홀로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너희가 양쪽에서 함께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다오.”
팽진연은 두 사람이 팽연후와 같은 역할을 해내기를 바랐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도 그 의미를 아는 듯 진지하게 답했다.
팽진연은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들들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다음 대의 팽가를 맡기마.”
“맡겨주십시오.”
결의에 가득 찬 팽무성의 대답에 팽진연은 믿는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굳어있던 팽진연의 얼굴이 펴지며 웃음을 보이자 이를 본 세 아들도 저마다 웃음기를 머금었다.
* * *
이날 오후에 소가주 경합의 종결이 선언되며 사공자가 소가주에 오른다는 소식이 팽가에 퍼졌다.
“사공자라, 나는 사공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하긴, 그동안 직접 능력을 증명했으니. 나도 찬성일세.”
“이제 팽가가 빠르게 안정되어야 할 것인데.”
팽무성의 취임 소식에 반대하거나 불평하는 가솔은 없었다.
가솔들은 그저 새롭게 오르는 소가주가 팽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소가주 취임식이 열리는 날.
본래라면 커다란 경사였기에 각 문파로 서신을 보내고 손님들을 모아서 성대하게 진행했을 터였다.
하지만 근래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만큼 이번만큼은 팽가의 가솔끼리 간략하게 취임식을 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가주전 대연무장.
대연무장은 지난 반란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졌고, 평소의 정갈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가주전으로 한 줄기의 기세 좋은 바람이 거닐자 세워진 깃발들이 펄럭였다.
가주전의 계단 끝 양쪽에 자리한 두 개의 커다란 깃발에는 붉은 바탕에 이빨을 드러내는 대호(大虎)가 수놓아져 있었다.
하북팽가를 상징하는 대호기(大虎旗)였다.
그 아래의 대연무장에도 대호기보다 크기는 작으나 각각 상징이 수놓아진 깃발들이 열을 맞춰 박혀있었다.
하북팽가의 타격대를 상징하는 깃발들이었다.
그 깃발 뒤에는 해당하는 타격대가 대주를 필두로 오와 열을 맞추어 대기하고 있었다.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각 잡힌 자세를 잡는 그들은 마치 장군상을 보는 듯했다.
가주전으로 향하는 대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도열한 타격대의 뒤로도 수많은 가솔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틈에는 팽중혁과 팽소혁도 섞여 있었다.
두웅
가주전의 계단 위에 있던 커다란 북을 두들기자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북팽가의 붉은 무복과 그 위에 걸친 검은 장포.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등장한 팽무성은 당당한 걸음으로 가주전의 대로를 밟아 나갔다.
쿵
맨 앞에 위치한 풍도대와 연풍대의 깃발을 지나치자 두 타격대 전원이 진각을 밟고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두웅 두웅
팽무성의 발걸음에 맞춰서 북소리가 계속 울렸고 타격대는 계속해서 몸을 낮추었다.
쿵쿵
가주전으로 오르는 계단에 도달하자 모든 타격대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팽무성은 계단을 잠시 보더니 발을 옮겼다.
지금만큼은 팽무성도 감정에 젖었던 것일까.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옛 기억이 조각조각씩 떠올랐다.
무력하게 팽가의 몰락을 지켜봤던 전생의 기억.
사공자의 몸으로 처음 깨어났을 때의 기억.
소가주 경합에 참여하겠다는 선언을 했을 때의 기억.
그동안 팽무성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는 듯했다.
마지막 계단을 밟을 때가 돼서야 팽무성은 이런 기억들이 왜 떠오르는지 알 것 같았다.
‘소가주는 종착지가 아닌 출발선에 불과하다.’
팽무성은 소가주가 되기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온 게 아니었다. 소가주는 그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에 불과했다.
원래 팽무성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어느 하나 이루지 못한 상황이었다.
도중에 안주하고 쉴 때가 아니라 힘을 얻어 더욱 힘차게 나아가야 할 때였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팽무성은 다시 다짐을 되새기고는 마지막 계단을 넘어섰다.
모든 계단을 오르자 팽진연이 중앙에 서있고 앞쪽으로 팽영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팽무성이 팽영대를 지나쳤으나 팽영대는 앞의 타격대와 달리 무릎을 꿇지 않고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팽무성은 팽진연의 세 걸음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주를 뵙습니다.”
“하북팽가는 협의를 중시하고 불의 앞에서 물러섬이 없는 호걸들의 가문이었다.”
팽진연의 잔잔한 목소리가 가주전을 울렸다. 내공이 섞이지는 않았으나 소가주 취임식에 참여한 가솔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근래에는 하북팽가가 본연의 모습을 잃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가주가 부족한 탓이 크겠지.”
팽진연의 목소리에 한층 더 힘이 실리고 또렷해졌다.
“사공자 팽무성은 흐려지는 팽가의 정신을 바로잡고 올바른 길로 이끌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그에 팽무성의 고개를 살짝 들어 팽진연을 마주했다. 흔들림 없는 굳건한 눈빛에 팽진연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팽진연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팽연후가 두 가지 물건을 가져왔다.
하나는 작은 반합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자루의 도였다.
반합의 정체는 알고 있었으나 도를 본 팽무성의 눈매가 잘게 떨렸다.
“반합에 든 것은 태양단이고 이 도는 적아도이다.”
소가주가 취임할 때 하북팽가 비전의 영약인 태양단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허나 적아도(赤牙刀)는 달랐다.
하북팽가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병이었으며 역대 가주들이 사용했던 도였다.
바로 앞에 태양단과 적아도가 놓였지만 팽무성은 쉬이 손을 옮길 수 없었다.
“달리 생각할 필요가 없다. 원래 소가주가 정해지면 가주 대리의 권한과 함께 적아도를 넘기려 했음이니.”
팽진연은 팽무성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를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팽무성은 원래 차고 있던 유엽도를 풀어 옆에 내려놓고 대신 적아도를 허리에 찼다.
“사공자 팽무성을 금일 부로 소가주로 임명한다.”
팽진연은 외침과 함께 품속에서 소가주를 상징하는 철패를 꺼내어 팽무성에게 건네주었다.
팽무성은 철패를 왼손에 쥔 채로 등을 돌려서 가주전의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계단 끝에 멈추자 가솔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가주를 뵙습니다!”
한목소리가 된 가솔들의 우렁찬 외침을 들으며 팽무성은 허리춤의 적아도를 뽑아 들었다.
붉은 도갑에서 매끈한 도신이 뽑혀 나오자 순간 빛을 뿜어냈다. 새하얀 도신이지만 언뜻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보통 신병이 아님을 알 수 있었고 이를 본 가솔들의 입에서도 감탄이 흘렀다.
“소가주로서 강한 팽가를 만들 것이다.”
짧디짧은 취임사였지만 팽무성의 진중한 목소리에서 가솔들은 그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와아아아!”
팽호대 측에서 나온 함성을 시작으로 가솔들이 저마다 팽무성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팽무성은 가솔들의 환호를 들으며 생각했다.
‘드디어 팽가를 바꿀 수 있는 때가 왔구나.’
* * *
“흐흠. 드디어 하북이군.”
“멀었습니다. 형님.”
세 명의 사내들이 길을 걷고 있었다.
선두에서 노인이 뒷짐을 지고 걷고 있었고 뒤쪽에 두 중년인은 저들끼리 얘기를 하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잿빛의 낡은 도포를 입고 있는 노인은 고개를 들어 주위의 지형을 살폈다.
“고단하다, 고단해.”
호북성에서 하북까지 넘어온 노인은 허리를 두들기며 주위의 풍경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노인의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들이 노인의 기감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기가 막히게 등장하는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련주.”
뒤쪽의 중년인 중 나이 많은 축이 묻자 노인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뛴다, 따라와라.”
노인은 허리춤의 도를 만지작거리더니 앞으로 솟구쳤다.
“련주!”
“갑자기 무슨...”
쑤와앙
경공을 펼치는 노인의 신형은 바람을 거침없이 밀어내며 앞으로 뻗어갔다.
그 앞은 산세가 험한 산이 그득했지만, 노인은 평지를 뛰듯이 손쉽게 지나치고 있었다.
노인의 뒤를 따르는 두 사내도 거리가 많이 벌어졌지만, 보통 고수가 아닌 듯 용케 빠른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세 개의 산을 넘고 드넓은 화북평야가 모습을 보였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를 보면 마음이 시원해질 법하건만 오히려 노인의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평야에 도달한 노인은 경공을 멈추고 뒤에 따라올 사내들을 기다렸다.
“쯧쯔, 빨리도 오는구나.”
“갑자기 경공을 펼치시다니요.”
“저희 정도 되니 쫓아온 것입니다.”
두 중년인의 불평에 노인은 고개를 젓고는 평야를 노려보았다. 조금씩 달라지는 분위기에 이들도 무언가 깨달은 듯 빠르게 호흡을 골랐다.
“숨이 턱 막힌다, 이놈들아.”
어느새 노인의 손에 들려있던 도가 궤적을 그려내자 도풍이 일어나 평야를 휩쓸었다.
길게 자란 풀들이 맥없이 잘려나가며 하늘 높이 떠오르는 그 모습은 한 줄기의 폭풍을 보는 듯했다.
콰앙
검은 검기가 노인의 도풍을 밀어냄과 동시에 사방에서 사슬이 튀어나와 노인을 휘감으려 했다.
카카캉
노인의 양옆을 지킨 두 사내는 각자 도를 휘둘러 사슬을 모조리 튕겨냈다.
“이놈들 때문에 그리 뛰셨던 것입니까.”
“감히...”
세 사내를 중심으로 평야에서 검은 무인들이 일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림잡아 수를 세어도 대충 일백은 넘어 보이는 수였다.
하지만 사내들은 저 많은 수의 적을 보고도 조금의 위압감도 느끼지 못하는 듯싶었다.
“도혼련의 일도(一刀)와 삼도(三刀). 그리고 원로인 태청도. 맞나?”
검은 무인들 속에서 홀로 황색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있었다. 방금 노인이 뿌린 도풍도 이 사내가 막은 것이었다.
“이 기운은 마기인가, 마인 놈들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는구나. 하북 놈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는게야.”
“너희들은 잡아서 도천을 끌어내는 미끼로 쓸 것이다. 영광으로 여겨라. 너희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련주가 직접 구하러 올 것이 아닌가.”
말을 들은 도혼련의 사내들의 표정은 이상해졌다. 당황보다는 웃음을 참는 얼굴들이었다.
“도천은 불러서 무엇을 하려고?”
노인의 물음에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겠지.”
그에 노인이 껄껄 웃으며 얼굴의 볼살을 잡아당겼다.
볼살이 주욱 늘어지더니 피부가 찢겨나갔다. 이를 본 황색 사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인피면구?’
노인의 인피면구가 벗겨지고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은 다른 노인의 얼굴이었다.
다만 한 점 주름도 없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탱탱한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자, 대답해 보거라, 아해야. 네가 찾던 도천(刀天)이 여기에 있다.”
노인, 도천은 악동의 미소를 지으며 마인들을 흘겨보았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줄 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