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어느새 일도와 삼도는 도천의 곁으로 다가와 팽무성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팽가에 대무각이라는 새로운 조직이 생겼습니다.”
“대무각이라?”
도천이 흥미를 보이자 팽무성은 간단히 설명했다.
대무각은 어린 가솔부터 시작하여 장성한 무인들의 무공 수련체계를 다듬고 팽가의 무공 개선에 역량이 집중된 조직이었다.
오랜 가법이라는 이름 아래 남아 있던 주먹구구식이고 여러 갈래로 나뉘었던 수련 방식을 체계화하고, 말년의 원로들이나 진행하던 무공 연구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었다.
본래는 무후각에서 함께 처리하던 일이었으나 회의에서 인력과 전문성의 문제로 비효율적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에 팽무성은 과감하게 아예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좋은 생각이다. 당분간은 그럴듯한 성과가 없을지라도 훗날에는 그 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터.”
도천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체계가 정해지고 이를 기준으로 수많은 사례가 쌓인다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명문이라 불리는 곳들이 하나같이 역사가 깊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팽무성은 도천의 뒤쪽에 서 있는 일도와 삼도를 보며 말했다.
“조직은 만들어졌으나 그 안을 채울 인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무공 수련체계를 세울 교관과 같은 인재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에 도천은 팽무성이 무슨 부탁을 하고자 하는지 눈치챘다. 도천은 고개를 돌려 일도와 삼도를 바라보았다.
“일도와 삼도가 필요한 거로구나.”
“물론 다른 도객을 교관으로 초청할 수는 있지만, 도혼련의 저 두 분을 보니 다른 사람을 뽑아도 눈에 차지 않을 듯합니다.”
팽무성은 단순히 두 사람을 띄워주려고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도혼련은 조건 없이 가르침을 베푸는 도천의 영향인지 서로가 가르침을 주고받는 것에 익숙한 기이한 형태를 보였다.
특히 도혼련의 최정상에 있는 일도와 삼도는 도천을 제외하면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그런 만큼 두 사람은 다른 도객을 가르치는 데 시간을 보냈으니 남을 가르치는 데 도가 튼 이들이었다.
‘일도나 삼도. 둘 중 한 명만 영입할 수 있어도 대무각은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다.’
무림을 뒤져도 저 두 사람만 한 교관을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강요할 수 있는 일은 아니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도천의 말대로 명령을 내려 강요할 일은 아니었다. 허나 직접 의중을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힘이 실렸다.
“확실히 새로운 무인들을 가르치면 환기도 되고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도의 말에 삼도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저도 상관없습니다만, 아예 팽가에 묶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어찌 되었든 저희의 보금자리는 도혼장이니까요.”
일단 일도와 삼도가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팽무성도 얼굴이 밝아졌다.
“이 년 정도는 어떻겠습니까.”
저 두 사람에게 단순히 가솔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양질의 교관을 늘릴 수 있도록 교관의 육성도 부탁할 생각이었다.
이 년이라면 대무각도 어느 정도 기틀을 잡을 수 있는 기한이었다.
“이 년, 길지는 않군.”
“네, 형님. 적당하네요.”
무인들을 수련시키는 것은 고작 몇 달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일도와 삼도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도혼장에 돌아갈 때는 혼자겠구나.”
“괜찮으시겠습니까. 또 마교가 노릴 수 있습니다.”
일도가 걱정스레 묻자 도천은 코웃음을 쳤다.
“정말 온다면 심심하지는 않겠지. 내 걱정은 말고 팽가에서 적응이나 잘하거라.”
일도와 삼도가 수긍하자 팽무성은 포권을 취하며 감사했다.
“다소 무리한 부탁이었는데 이리 쉽게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가에서 최대한 예우를 해드리겠습니다.”
“후후, 그건 좋군. 도혼장에서는 무보수로 가르쳤었는데.”
일도의 말에 도천의 눈이 샐쭉해졌다.
“많이 힘들었나 보다. 일도야. 말을 하지 그랬느냐.”
“아, 아닙니다. 련주.”
당황한 일도는 급히 팽무성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소가주. 그 대무각이라는 곳으로 안내해주시오. 우리가 앞으로 일할 곳은 봐야 하지 않겠소.”
팽무성은 웃음을 참으며 손짓했다.
“이쪽입니다. 가시지요.”
팽무성은 대무각주를 맡게 된 팽중혁에게 두 사람을 소개해주었고 팽중혁은 크게 기뻐하며 두 사람을 환영했다.
그 이후에 도천은 팽가에 아흐레나 머물렀다. 대부분 팽무성과 비무를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간혹 대무각에 방문하여 기틀을 잡고 있는 가솔들에게 도움을 주곤 했다.
도천의 시야에서 보이는 허점을 짚어주자 대무각은 시행착오를 겪을 시간을 더 줄일 수 있었다.
“다음에 보자꾸나, 다시 만날 때에는 이마에 혹이 적어지길 바라마.”
도천은 아직도 살짝 부어있는 팽무성의 이마를 보며 클클 웃었다.
“깜짝 놀라게 해드리겠습니다.”
자신만만한 팽무성의 대답에 도천의 수염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팽무성은 뒷짐을 지고 걸어가는 도천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며 자리를 지켰다.
* * *
팽무성은 원로원의 입구 앞에 멈춰 섰다.
“원로원주를 만나러 왔다.”
“예, 드시지요.”
미리 연락해놓았기에 원로원을 지키고 있던 무인은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원로원은 처음 들어와 보는 것이기에 팽무성은 안쪽으로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중앙의 커다란 장원, 원로원을 중심으로 작은 숲이 우거지고 커다란 연못 위에 지어진 정자도 보였다.
구석에는 형형색색의 꽃들로 이루어진 화원도 있어 무림 세가라기보다는 휴양지의 느낌이 강했다.
나무 그늘에서 바둑을 두는 원로도 있었고 화원에 물을 뿌리며 꽃을 살피는 원로도 있었다.
늘그막의 평화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여유가 느껴지네.’
원로들은 팽무성을 봤지만 반응하지 않고 자신들의 말년을 보내는 데 몰두했다.
간혹 눈이 마주쳐 팽무성이 인사하려 했으나 원로는 그저 웃으며 가보라는 듯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팽무성은 붕어들이 헤엄치고 있는 연못을 지나쳐 그 위에 있는 정자를 올랐다.
띵 띠리리 띵
현이 울리는 맑은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역시나 정자 위에서 한 원로가 고쟁(古箏)을 연주하고 있었다.
주위에 모인 원로들은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소가주.”
그 틈에 섞여 있던 팽가호가 입을 열자 그제야 원로들은 고개를 돌려 팽무성을 바라보았다.
“원로들을 뵙습니다.”
팽무성의 인사에 원로들은 조금씩 움직여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반갑네.”
“소가주, 이쪽에 앉으시게.”
원로들의 담백한 반응에 팽무성은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띵 띠잉
“소가주, 원로원까지 무슨 볼일로 오셨는가.”
팽가호는 고쟁의 맑은 음율을 감미하며 물었다.
“지금 본가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도 소식은 듣고 있네. 팽가가 이렇게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도 오랜만이야.”
실제로 팽가는 대내외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재정각에 속하게 된 팽소혁은 금용만과 함께 언가의 봉문으로 빈집이 된 영역을 공략 중이었다.
비호각은 정보망을 전체적으로 손보고 있었고 무후각은 팽가의 영역에 있는 분타의 방비 수준을 확인하며 타격대의 전력을 재평가해 도약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 이공자가 대무각을 맡았다지. 원로들도 대무각에 대한 기대가 크네.”
“나흘 전부터 대무각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평가하기에는 이르나 가솔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습니다.”
팽가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우리는 늙어서 그런지 겁이 좀 생겼네. 그런데 소가주는 아직 젊어서 그런가, 결단력과 행동력이 좋아.”
팽가호는 과감하게 오랜 전통의 가법을 바꿔버린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원로들께서는 젊은이들이 가지지 못한 연륜과 경험이 있습니다. 이대로 묻히기에는 아깝군요.”
“음.”
팽가호는 뭐라 답하지 않고 찻물로 목을 적셨다. 단순한 칭찬으로 들리지 않은 탓이었다.
“원로원도 도와주십시오.”
이 한마디에 정자에 모여있던 원로들이 죄다 팽무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쟁에 심취해 있던 원로도 어느새 연주를 멈추고 시선을 팽무성에게 향한 상태였다.
“원로분들은 본가에서 가장 오랫동안 무공을 익히셨습니다. 그 외에도 경험과 연륜이 풍부하십니다. 대무각뿐만 아니라 여러 조직에서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팽가호는 곤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원로원은 본가에 커다란 위험이 없는 이상 움직이지 않네. 소가주도 알고 있지 않나.”
원로원이 가문의 운영과 정치에 관여하지 않도록 위함이었다.
“저번 반란을 끝으로 언가의 위협이 끝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저 잠시 뒤로 밀렸을 뿐입니다.”
지난 반란 때 원로원은 팽대혁의 수작에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이를 떠올린 팽가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언가라는 위협을 두고 지금 팽가는 변화와 발전을 위해 모든 역량을 쏟고 있습니다. 그 역량에 원로원도 당연히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까?”
팽무성의 마지막 물음은 팽가호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듣고 있는 원로들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다.
팽무성은 팽가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이 바로 원로원이 나설 때입니다. 원로원주.”
진한 안광을 흘리는 호안을 보며 팽가호는 왜인지 청춘의 부러움과 자신의 노화를 체감했다.
팽가호는 말없이 원로들의 의중을 살폈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이들이었기에 그저 눈빛만 보고도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다.
‘소가주의 말도 일리가 있네.’
‘다소 맹랑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팽가호는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원로원도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네.”
이에 팽무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원로원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우리도 팽가의 가솔. 이렇게 말년에 팽가를 위해 다시 나설 기회를 줘서 고맙네.”
* * *
“이제야 이곳에 오는구나.”
팽무성의 앞에는 여러 줄기의 금줄이 쳐져 있어 사람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팽가에 몇 없는 금지(禁地) 중 하나인 호림(虎林)이었다.
팽무성은 소가주가 되고 나서 한동안 바쁘게 움직였다. 며칠 동안 한 시진밖에 잠을 못 잘 정도였다.
일이 진행되며 하나씩 궤도를 타니 이제야 시간이 난 것이었다.
팽무성은 가볍게 금줄을 뛰어넘어 호림으로 들어갔다.
호림 안으로 향하자 점점 안개가 짙어지더니 주변의 대나무조차 보기 힘들 정도였다.
숲 전체에 거대한 절진이 펼쳐진 탓이었다.
허나 이미 팽진연에게 절진의 생문을 들어서 알고 있기에 팽무성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조금씩 안개가 짙어지더니 빼곡하게 솟아오른 대나무 사이로 동굴이 보였다.
팽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석문이 팽무성을 가로막았다.
석문에는 서로 뒤엉킨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새겨져 있었다.
호랑이는 제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철문에서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듯 생생했다.
팽무성은 석문 위에 새겨진 세 글자를 읽었다.
“오호동.”
오호동(五虎洞).
가주와 소가주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팽가의 비동 앞에 드디어 팽무성이 설 수 있었다.
팽무성은 입을 벌리고 있는 두 호랑이의 머리에 손을 올려 내공을 끌어올렸다.
혼원벽력신공의 내공에 오호동의 철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구르릉
기관이 발동되며 철문이 열리며 오호동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오호동(五虎洞).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