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쑤앙
섬뜩한 파공음을 일으키는 무각의 주먹. 경시할 수 없는 위력에 식마군은 첫 공방과 달리 회피를 선택했다.
상체를 비틀어 피해내며 손을 갈고리처럼 오므렸다.
식마군은 허공에 뻗은 무각의 왼팔을 노렸으나 무각은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회전이 실린 항마연환신퇴가 시원하게 쏟아지자 식마군은 두 손을 포개어 장력으로 응수했다.
파앙
충돌에 대한 반동으로 두 사람은 양쪽으로 밀려났다.
“거슬리는군.”
무각과 몇십 합을 주고받던 식마군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무각의 몸놀림은 소림의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었다.
정(靜)적인 소림의 무공과 동(動)적인 무각의 움직임. 어울리지 않는 듯한데 이상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천살불의 심득과 불존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인 무각만이 보일 수 있는 움직임.
그 기묘한 움직임은 무각을 상대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식마군이 보기에 무각은 분명히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다. 그런데 이리 고전할 줄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실로 야차와 같은 놈이군.’
이미 네 번의 부상을 입은 무각이었다.
위축될 법도 한데 오히려 전신의 피를 흩뿌리며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크하합!”
거친 기합과 함께 솟구친 무각은 양손으로 무수한 수영(手影)을 만들어냈다.
그 모습은 마치 천수관음을 보는 듯했다.
무각이 새롭게 익힌 소립칠십이절예, 여래천수장(如來千手掌)이었다.
여래천수장의 금빛 수영은 일제히 뻗어지며 식마군을 감싸 안았다.
인중, 명치, 흉천, 송풍.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천수관음의 손과 달리 무각의 여래천수장은 철저히 급소를 노리는 지독한 살의를 띠고 있었다.
무각이 펼치는 소림의 무공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비 대신에 살기가 채워진 상태였다.
이에 식마군의 열 손가락도 제각기 꿈틀거리며 여래천수장을 쳐냈다.
터더더덩
여래천수장과 탐정식마조가 격돌하자 작은 종이 울리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카카칵
백여 합의 공방 끝에 결국 우세를 점한 것은 식마군이었다. 무각의 좌우로 쏟아지는 열 줄기의 검은 조기.
“설치지 마라!”
탐정식마조가 그려낸 열 줄기의 검은 선은 눈을 어지럽히는 사이한 변화를 보이며 그 많던 수영을 모조리 끊어버렸다.
이에 무각이 뻗어오는 조기를 쳐내며 앞으로 솟구쳤다.
무각의 직선적인 움직임을 읽어낸 식마군은 생사결을 끝낼 요량으로 탐정식마조의 절초를 펼쳐냈다.
뿜어진 열 줄기의 조기가 섬뜩한 예기를 흘리며 솟구쳤다.
자신 있게 절초를 뿌렸던 식마군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육절십조(肉切十爪)를 펼쳐낸 순간 무각의 신형이 흐릿해진 탓이었다.
이때까지 야수처럼 날뛰던 무각의 움직임이 갑자기 돌변했다.
마치 연못의 연꽃을 밟는 듯 그 걸음은 고요하고 진중했다.
불영선하보(佛影仙霞步)로 현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무각은 이내 잔상을 그려냈다.
‘무슨 속셈이냐!’
식마군은 멍하니 구경하지 않고 손을 바삐 놀렸다. 허공에 검은 선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촤자자작
육절십조는 무각의 잔상을 찢고 그 뒤의 애꿎은 석벽만 갈라내고 있었다.
그 사이 잔상 뒤에 숨어서 식마군의 측면으로 이동한 무각.
순간, 무각의 신형을 놓치며 싸움의 호흡이 꼬였다. 그 탓에 식마군의 반응은 한발 늦었다.
뻐억
무각의 손날이 식마군의 어깨를 내려찍자 흡사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가 울렸다.
어깨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식마군은 한쪽 눈을 구기며 좌수를 회전시켰다.
푸학
식마군의 손톱에 무각의 살점이 한 움큼이나 뜯겼다. 그에 무각의 옆구리에서 핏줄기가 터져 나왔으나 식마군은 연달아 공세를 잇지 못하고 숨을 골라야 했다.
허나 무각은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는 듯 두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 미친 땡중이 감히!”
무각의 전의(戰意)에 질린 식마군은 일갈을 내지르며 사정없이 손톱을 그어냈다.
카카칵
그렇지 않아도 거칠었던 탐정식마조가 더욱 사나워져서 무각을 집어삼켰다.
그 한가운데에서 무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쌍장을 내질렀다.
이에 눈을 반짝인 식마군은 장력을 갈라냄과 동시에 금나수의 수법인 탐탐사아(探貪蛇牙)를 펼쳐 무각의 양 손목을 잡아냈다.
‘끝이다!’
곧바로 탐정마공을 펼쳐 정혈을 흡수할 생각이었다. 이미 손을 섞으며 자신의 내공이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거침이 없었다.
무각의 목과 어깨가 뒤로 젖혀지는 것을 보고 식마군이 사악한 웃음을 보였다.
몸을 뒤로 빼려는 의도로 보였으나 탐탐사아의 악력에 잡힌 이상 어림도 없었다.
“이미 늦...”
빡
식마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작스레 골이 울리며 고통이 엄습하자 시야마저 흔들렸다.
‘아... 어떻게?’
탐탐사아는 단순히 양팔을 묶는 것이 아닌 무게중심을 하체로 내리며 전신을 짓누르는 수법이었다.
그 탓에 사지를 움직이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반격을 날린 것일까.
“철두공이라고 들어봤냐. 마두놈아.”
철두공(鐵頭功).
이름 그대로 머리를 주먹처럼 단단하게 단련시키는 무공이었다.
성취가 오르면 박치기로 바위도 부술 수 있는 무공이었지만 아무래도 실전에서 사용하기가 힘들기에 거의 사장된 무공이었다.
“크크큭.”
광기가 흐르는 무각의 웃음에 식마군은 처음으로 몸이 섬칫거림을 느꼈다.
무각은 정신이 혼미해진 식마군에게 다시 한번 박치기로 박아 버렸다.
뻐억
철두공으로 단단해진 무각의 머리는 주먹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다.
“끅.”
코가 부러져 코피를 흘리고 있었고 앞니도 몇 개가 뽑혀 땅을 굴렀다.
전신의 힘이 풀린 식마군은 단발의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양 손목을 잡던 식마군의 손아귀가 풀리자 무각은 곧바로 자세를 잡고 사정없이 주먹을 찔러넣었다.
빠각
연달아 주먹을 휘둘러 사지를 부러뜨리곤 와류가 실린 아라한신권의 일권을 식마군의 단전에 꽂아 넣었다.
“끄아악!”
단전이 깨지는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든 식마군은 괴성을 지르며 무각에게 달려들려 했다.
허나 다리에 힘이 빠지며 땅을 뒹굴고야 말았다. 식마군의 단전이 깨지며 탐정마공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키이이잇
마기와 함께 빠져나오는 회백색의 기운. 그동안 식마군이 타인에게서 갈취한 정혈이었다.
정혈은 밖으로 뿜어나오며 기이한 소리를 흘렸는데 마치 누군가의 한 맺힌 울음소리와 같았다.
이에 눈을 찌푸린 무각은 반장을 하며 불호를 외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진심이 담긴 한 차례의 기도뿐이었다.
“극락왕생하시길, 아미타불.”
정혈이 빠져나가는 식마군의 외형은 점점 변해갔는데, 살이 급속도로 빠져 뼈가 보이고 머리가 백발이 되어가고 있었다.
“끄아아.”
마치 목내이와 다름없는 외형으로, 식마군이 본래 지녔던 정혈마저 다른 정혈에 휩쓸려 같이 빠져나가고 있는 탓이었다.
마치 희생되었던 이들의 원혼이 식마군을 함께 끌고 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 보던 무각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이 저지른 업보를 이렇게 감당하는구나.”
식마군은 탐정마공에 희생되었던 이들이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으며 괴로워했다.
“으으헉, 내... 내가 이런 놈...”
“왜? 너보다 약한 놈에게 져서 꼽냐?”
“이...”
“지옥에나 떨어져라, 아미타불.”
노인처럼 갈라진 목소리를 간신히 흘리던 식마군은 말을 끝내 잇지 못하고 뜬 눈으로 죽었다.
“크흡.”
식마군의 눈에 생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무각은 옆구리의 상처를 부여잡은 채 뒤로 주저앉았다.
후두둑
상처를 막고 있는 손 사이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에 좌우사자를 정리하고 걸어온 팽무성이 한숨을 내쉬며 무각을 살폈다.
“이 미친놈아, 그런 식으로 싸우면 금방 죽는다.”
광승이라 불리던 무각에게 수십 번을 내뱉었던 말이었다.
전생에서도 이렇게 미친 듯이 싸워온 무각이었다. 당연히 전신에는 여러 상처가 가득했고 죽을 뻔한 위기도 많았다.
팽무성도 몸을 사리는 편은 아니었으나 무각은 정도가 더욱 심했다.
“으흐흐.”
팽무성이 핀잔과 함께 건넨 보혈단 두 알을 우물거리던 무각은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나보다 강한 놈이었어. 팽 시주.”
“그래, 너보다 강했지.”
“벽을 하나 넘은 기분이야.”
이에 팽무성도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고생했다.”
홀로 사색하며 무공을 갈고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선을 넘으며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 또한 무인을 크게 성장시키는 요소였다.
무각의 말대로 자신보다 강한 상대였던 식마군을 꺾음으로써 얻은 경험과 깨달음은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천살불의 심득을 얻게 된 무각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천살불의 심득은 비동 안에서 참오한다 하여 체화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으니.
‘다시 우리가 사패라 불릴 날도 머지않았구나.’
벌써 구마군의 일 인을 홀로 쓰러트릴 수 있게 된 무각의 성장에 팽무성도 제 일처럼 기뻐했다.
* * *
“그럼 부탁하겠소.”
“일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궁 대협.”
일전에게 계속 내공을 불어넣어 주던 남궁혁은 동굴 밖으로 빠져나온 화산 제자들과 만날 수 있었다.
화산 제자들에게 마인의 소식을 들은 남궁혁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은 심법을 익힌 화산 제자들도 있으니 일전도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마교라니.’
무신궁에서 만난 마인들은 지극히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아우들의 무공은 출중했으나 무림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었다.
걱정이 앞선 남궁혁이 다급히 경공을 펼치려 할 때 수풀 사이로 팽무성과 무각이 튀어나왔다.
“이미 끝났습니다. 형님.”
“무각 아우!”
피투성이가 된 모습에 남궁혁이 대경하여 소리쳤지만 무각은 손을 휘젓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아픈데 죽을 정도는 아니야, 남궁 형.”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제대로 된 의원에게 상처를 보여주면 괜찮을 겁니다.”
남궁혁은 무각의 상처를 보곤 자신이 전투에 참전하지 못한 것에 혀를 찼다.
“둘 다 고생했네. 이거 내 마음이 편치 않군.”
두 사람의 등장에 기다리고 있던 화산 제자들은 크게 반색했다.
“설마 그 마인들을 모두 처치하신 것입니까.”
팽무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산 제자들은 깜짝 놀라 탄성을 흘렸다.
“괜히 패호도의 명성이 무림을 울린 게 아니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동굴 안에 있던 마인들은 하나같이 강했다. 그런 자들을 고작 둘이서 몰살시켰다니, 화산 제자들로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저들은 자신들과 나이가 비슷한 또래였으니 더욱 그랬다.
화산 제자들의 가슴 속에 패호도와 무각이라는 이름이 확실하게 각인된 순간이었다.
“일단 부상자가 있으니 근처의 의원에서 치료를 받게 하지요.”
팽무성은 동굴 안쪽을 흘끗 보며 말을 이었다.
“동굴 안에 있는 시신들은 우리가 옮기기에는 너무 많으니 화산파에 연락을 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제안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스르던 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근처의 의방에서 치료를 받고 나흘을 휴식에 집중한 덕분인지 중상을 입었던 무각과 일현, 일전의 상태도 많이 호전되었다.
소식을 받은 화산파는 시신의 처리는 신경 쓰지 말고 회복에 전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곤 팽무성 일행이 있는 의방으로 약매각의 의원들을 보내서 부상자들을 직접 보살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었다.
집중된 치료와 관리 덕분에 화산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회복되자 팽무성 일행은 화산을 올랐다.
* * *
비가 오지도 않는데 연무장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졌다.
“스승님, 벌써 한 시진이 지난 것 같은데요.”
뚝
떨어지는 것은 물이 아니라 사내의 턱선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었다.
사내는 다리 대신 두 팔로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는데 잘 보면 손바닥이 아닌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만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손가락 네 개로 전신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근육의 힘으로 감당해야 하니 어지간한 무인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스승님?”
멀찍이 떨어진 매화나무 그늘에서 이를 지켜보던 백발의 노인은 사내의 애원에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눈이 내린 듯한 흰 눈썹이 꿈틀거렸다. 노인의 눈동자가 향한 방향은 화산파의 산문이 있는 쪽이었다.
검성, 기천 진인은 저 멀리 화산을 오르고 있는 이의 강렬한 존재감을 느꼈다.
한참이나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기천 진인은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슬슬 뒷물결이 몰려오는 건가.”
겨울이 지나면 매화는 언제나 피어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