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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막내아들-73화 (73/200)

73화

쑤아아앙

다섯 줄기의 섬광이 비스듬히 솟구쳐 날아오르니 매화만리향은 다섯 갈래로 갈라지고 말았다.

“허어.”

하늘에 굵은 선을 그려내는 광경을 보며 검성도 한순간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진심으로 펼쳐낸 매화만리향이 까마득한 후배에게 파훼 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검성이었다.

빛을 잃고 흩어지는 매화 사이로 비틀거리는 팽무성의 모습이 보였다.

상당히 무리했는지 두 다리가 떨리는 것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팽무성은 기어코 몸을 지탱하고 서서 검성을 마주 봤다.

그 당당한 자태에 검성은 흐트러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훌륭하다. 오호단문도는 잘 보았느니라. 능히 무림의 도법 중 열 손가락 안에 들겠구나.”

검성은 구태여 말하지 않았지만, 오호단문도가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엿보았다.

팽무성이 성장하며 오호단문도를 계속 다듬어낸다면 열 손가락이 아닌 세 손가락 안에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팽무성은 떨리는 손을 다잡아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것을 얻은 비무였습니다.”

비무는 끝났으나 참관자들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전혀 다른 차원의 비무를 보면서 머리와 마음이 복잡해진 탓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제자들을 보며 검성이 인자한 웃음을 내비쳤다.

“한 번에 모두 담아낼 필요가 없다. 그저 여러 번 복기하며 조금씩 깨우치면 그만이니라.”

검성의 나긋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제자들은 말없이 검성을 바라보았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라. 너희들이 지금껏 해온 것처럼.”

검성의 마지막 가르침에 매화검수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희의 미천한 실력으로 방금의 매화만리향을 똑같이 펼쳐낼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비무를 참관한 제자들의 심정을 대변한 말이었다.

특히 매화검수들은 더욱 심란했다.

이제 검성이 은퇴한다면 화산파의 무명(武名)은 이 자리에 있는 매화검수들이 짊어질 터.

검성이 쌓고 빛낸 위명을 자신들이 괜히 무너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매화검수들의 무게를 느낀 검성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능하다.”

검성은 시선을 틀어 주변에 피어 있는 매화를 보며 말했다.

“겨울이 지나면 매화는 언제나 피어났다.”

검성의 나직한 한 마디에 제자들의 눈빛이 일렁였다.

“너희도 겨울의 인고를 견뎌내면 능히 매화를 피워 내리라. 내가 그러했듯이.”

겨우 짤막한 말 몇 마디와 가르침이었다.

그럼에도 제자들의 눈빛에 차오른 자신감과 자부심을 확인한 검성은 만족스러웠다.

제자들을 하나씩 살피던 검성은 마지막으로 일향을 쳐다보았다.

달라진 일향의 눈빛을 보던 검성의 주름은 더욱 짙어졌다.

* * *

“이제 내려가는 것이냐.”

검성은 매화나무 군락지의 바위에 앉아서 물었다.

“예. 예정보다 화산파에 더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제 슬슬 사천으로 향해야 합니다.”

팽무성의 대답에 검성은 수염을 쓰다듬더니 그 옆에 있는 남궁혁과 무각을 봤다.

“너희도 그동안 고생했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 인사드립니다.”

“스승님께는 제가 안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남궁혁과 무각은 고개를 숙이며 검성에게 감사를 표했다.

검성과의 비무가 끝난 뒤에 팽무성 일행은 화산파에서 닷새를 더 머물렀다.

바로 떠나도 상관없었지만, 검성이 팽무성 말고도 그 두 사람을 눈여겨본 탓이었다.

닷새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검성은 남궁혁과 무각의 무공을 봐주며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같은 검수인 남궁혁은 초월경의 벽을 깨트리기 위한 작은 단초를 얻을 수 있었다.

검성은 앞에 있는 세 명의 후기지수를 한 번씩 눈에 담더니 입을 열었다.

“매화검수들이 아닌 너희들을 내가 직접 가르친 이유는 앞으로 벌어질 마교와의 전쟁에서 너희가 큰 역할을 짊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은 탓이다.”

검성은 이들을 직접 가르치며 확신했다.

지금은 덜 여물었으나 훗날 정마대전의 향방에 중요한 열쇠가 될 존재들이란 것을.

“나는 이제 일향과 함께 마지막 폐관에 들 것이다.”

만약 팽무성 일행이 화산파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검성은 평소처럼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며 일향의 곁을 최대한 오래 지켰을 것이다.

허나 검성도, 일향도 마음과 생각이 바뀌었으니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검성은 일향을 가르치고 일정 수준에 도달하여 자립할 수 있다 여길 때 남아 있는 내공을 모두 넘길 생각이었다.

이것이 검성이 화산파와 무림을 위해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안배였다.

“무성아, 덕분에 옳은 방향을 택할 수 있었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고개를 숙이는 팽무성을 보며 웃은 검성은 팽무성의 손을 한 번 잡더니 뒤이어 남궁혁과 무각의 손도 잡아주었다.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구나. 무림을 부탁하마.”

세 명의 후기지수들은 입을 열지 못했고 검성은 혼자 껄껄 웃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멀어져가는 세 사람의 등을 보던 검성은 홀로 읊조렸다.

“장강후랑추전랑, 일대신인환구인이로다.”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일대신인환구인(一代新人換舊人).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

새 사람이 옛사람을 대신한다.

온전치는 않으나 매화만리향을 파훼한 팽무성.

초월경의 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남궁혁.

이들에 비해 살짝 부족하나 무시무시한 속도로 따라잡는 무각까지.

검성은 오랜 세월, 무림에 독존하던 삼존과 십대고수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체감했다.

“스승님. 폐관수련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그래, 가자꾸나.”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향이 부르자 검성은 일어나서 자신이 앉고 있던 바위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제 더는 이 바위에 앉을 일이 없을 터.

그러나 검성은 기꺼이 웃으며 바위와 이별을 고했다.

“봄이 오니 좋구나.”

검성은 마지막 한 송이의 매화를 피워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사천성 성도(成都).

화산파에서 제법 시간을 소요했기에 날짜를 맞추기에 빠듯한 면이 있었다.

그나마 화산파에서 이곳 성도까지 계속 경공을 펼치며 달려온 덕에 시간을 맞출 수가 있었다.

“이곳이 당가타인가.”

건물마다 녹색 깃발이 걸려있는 마을을 보며 팽무성이 중얼거렸다.

당가타(唐家陀).

성도 북쪽에 있는 마을로 사천당가의 텃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당가타의 중앙에 터전을 잡은 사천당가는 오랜 시간 당가타의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 탓에 당가타에 사는 사람 대부분이 당(唐) 씨 성을 사용하고 있었다.

혈연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당가타 사람들은 당 씨 성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갔다.

그뿐만 아니라 실제 사천당가의 방계 중에 당가타에 터전을 이루고 사는 이들이 많아서 당가타도 사천당가의 일부나 다름이 없었다.

“요 며칠 고생한 덕분에 때는 맞췄구나. 객잔에 들러서 씻고 의복을 정돈하세.”

남궁혁이 저 앞에 있는 커다란 객잔을 보면서 말했다. 요 며칠 야영과 이동을 반복하면서 확실히 세 명의 행색은 엉망이었다.

초대받은 입장에서 이런 모습으로 사천당가에 방문하는 것은 커다란 실례였다.

“저는 잠시 들를 곳이 있습니다, 먼저 들어가 계시죠.”

“알았네.”

팽무성은 남궁혁과 무각을 먼저 객잔에 보낸 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미리 봐두었던 가게에 들어갔는데 여인들이 쓰는 분이나 장신구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곳이었다.

상류층을 판매대상으로 겨냥한 듯 파는 물품들이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팽무성이 물건들을 살피자 점원이 다가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물었다.

“따로 찾는 물품이 있으신지요?”

“붉은 달에 토끼가 조각된 장식이 달린 옥잠이 있나?”

점원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게에 몇 없는 귀한 것을 찾으시는군요. 금방 보여드릴 테니 그동안 다른 물건을 구경하시지요.”

“고맙군.”

점원이 사라지자 팽무성은 허리를 살짝 굽힌 채 진열된 장신구들을 하나씩 살폈다.

화려하고 눈에 띄는 장식보다는 수수한 것들을 위주로 둘러보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잠시 후, 화려하게 치장된 상자를 들고 온 점원은 팽무성의 앞에서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상자 안에는 옥잠이 아닌 몇 장의 서신이 들어있었지만 팽무성은 자연스레 그 서신의 밀봉을 뜯어서 읽어내렸다.

“으음.”

서신을 읽던 팽무성은 미간을 좁혔다.

“생각보다 많은데.”

팽무성의 물음에 방금까지 미소를 보였던 점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맞습니다, 오독문도 상당한 각오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독문은 사천성 흑수(黑水)에 자리 잡은 사파였다.

사도칠문에 속한 만큼 막강한 위세를 가지고 있었는데 사천당가, 청성파, 아미파가 있는 사천에서 몇백 년을 버틴 무시할 수 없는 저력을 가진 문파였다.

“몇 달 전부터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어 당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저희도 소왕이 내리신 명령으로 오독문을 계속 주시하지 않았다면 놓쳤을 겁니다.”

팽무성은 이번 생일잔치가 그저 잔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팽가에서 출발할 때 미리 명령해놓은 상황이었다.

‘전생의 기억과 조금 다른 것 같은데.’

팽무성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서신을 접어 품속에 넣었다.

전생에서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 풍문으로 들었던 일이었기에 섣불리 확신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수고했다. 그리고 이 옥잠을 사고 싶은데.”

점원은 팽무성이 든 옥잠을 보더니 차가운 표정을 지우고 다시 웃었다.

“옥잠은 그냥 드리겠습니다. 여인에게 선물하실 거라면 포장을 해드리겠습니다.”

팽무성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옥잠을 내밀었다.

“부탁하지.”

점원은 비단으로 보기 좋게 포장한 옥잠을 건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문주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살왕이 말을 남겼다기에 팽무성도 얼굴에 머금던 웃음을 지웠다.

“시간 날 때 한번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니면 직접 찾아가신다고 합니다.”

팽무성을 만나고자 하는 살왕의 의지가 제대로 느껴지는 말이었다.

‘언제 한번 뵙기는 해야겠지.’

팽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찾아뵙겠다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 * *

“약 냄새가 엄청나잖아.”

거리를 걷던 무각은 주변을 휙휙 쳐다보곤 코를 막았다. 당가타의 어느 골목을 가던 약초 특유의 쓴 냄새가 맴돌고 있었다.

팽무성도 무각처럼 불평을 하지는 않았지만, 코 대신 입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하하, 당가타가 좀 색다른 곳이긴 하지.”

남궁혁은 주변에 쉽게 볼 수 있는 의방을 보며 웃었다.

당가타는 사천 제일의 의방과 의원들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독을 사용하는 사천당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이었다.

사천에서 나는 모든 약초와 독초는 당가타에서 구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평소에는 약과 의원을 찾는 환자들로 붐비는 당가타였으나, 지금은 각양각색의 무림인들이 당가타 거리를 채워내고 있었다.

이틀 뒤로 다가온 당명의 생일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이들이었다.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평소에는 굳게 닫혀있던 사천당가의 대문도 활짝 열려있었다.

“모두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사천당가의 대문에는 기다란 줄이 이어져 있었는데 초대장을 받지는 못했으나 생일잔치에 찾아온 이들이었다.

대부분이 사천의 무림인들이었으며 개중에는 중소문파의 문주들도 많았다.

어떻게든 사천당가의 눈에 띄어 그 위세에 기대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사천당가의 무인들은 신분 확인을 철저히 하고 방명록을 적게 하고 있어 줄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줄을 서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으니 사천당가의 위세를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쪽으로.”

반면 팽무성 일행은 초대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굳이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팽무성 일행이 정문으로 오자 대기하고 있던 사천당가의 무인이 다가와 포권을 취했다.

“남궁혁 대협, 팽무성 소협, 무각 소협. 맞으신지요.”

“맞습니다.”

팽무성의 대답에 무인은 고개를 숙였고 무각은 자신들을 어찌 알았는지 궁금한 얼굴이었다.

그런 무각의 심중을 눈치챈 무인이 웃으며 말했다.

“섬서에서 세 분이 마인을 척살했다는 소문이 이미 사천에 퍼졌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엄청났다.

무각은 자신이 유명해졌다는 말에 입술을 꿈틀거렸다.

초대장을 확인한 무인은 옆으로 길을 비켜주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잔치가 열리기 전까지 편히 쉬십시오.”

팽무성 일행이 사천당가로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왜 이리 늦었어요?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네.”

목소리의 주인을 본 팽무성은 입에 호선을 그렸다.

독에 취하는 생일잔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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