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팽무성 일행과 당화련이 만날 때 두 남자가 사천당가의 정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나이와 얼굴을 보아하니 부자지간으로 보였다. 아들로 보이는 사내가 당화련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져 걸음을 멈췄다.
“아버님. 저 소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복색을 보니 당가의 여식인데.”
“응?”
“제가 지금껏 본 여인 중 제일 아름답습니다. 소전방의 여식보다 더 예쁘네요.”
사내의 소곤거림에 고개를 튼 중년인은 당화련의 얼굴을 보자 기겁하여 아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당가주의 금지옥엽이다. 방정맞은 입 다물어라.”
중년인은 아들의 귀를 잡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작은 소리였지만 당화련의 예민한 귀에는 명확하게 들렸다.
“그렇다는데요?”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반짝이는 당화련의 앵두 같은 입술이 귀밑까지 올라갔다.
그 상큼한 웃음에 팽무성의 눈매에 맺힌 호선도 짙어졌다.
“키가 좀 컸나?”
당화련과 눈을 마주하려면 고개를 푹 숙여야 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지난 삼 년의 시간.
앳된 기색이 남은 소녀가 여인이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도톰했던 볼살도 젖살이 빠져 갸름해졌고 전체적으로 성숙해진 여인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니 원래 여우상이었던 당화련의 매혹적인 이목구비가 더욱 살아나고 있었다.
그 자태는 반쯤 피어 있던 부용화의 꽃봉오리가 완전히 만개함을 보는 듯했다.
삼 년 전보다 배는 더 아름다워진 당화련이지만, 팽무성은 다른 것을 보고 더욱 뿌듯해했다.
“강해졌구나.”
당화련이 절정의 벽을 넘어 초절정 초입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팽무성의 칭찬에 당화련은 옆머리를 손으로 꼬면서 웃었다.
“이번에 조금 고집을 버렸거든요.”
본래 당화련은 무공을 익힐 때 입문 시기를 제외하면 홀로 사색하고 성취를 높이는 방식으로 수련했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그 즐거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신총에서 얻은 비본결(飛本訣)은 당화련의 경지로 혼자 습득하기에는 무리였다.
‘혼자 뒤처질 수는 없지.’
네 명 중 자신이 제일 떨어지는 것을 알고 있는 당화련은 그동안의 수련 방식을 버리고 당가의 어른들께 도움을 청했다.
삼 년간 장로들에게 집중된 가르침을 받은 당화련은 결국 비본결을 독파해내고 절정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제 방식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더라구요.”
“그래, 잘했다.”
그저 담백한 칭찬임에도 당화련은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이 짙어졌다.
“우리는 보이지도 않나 보다.”
“흥.”
팽무성에게만 눈길이 꽂혀있는 당화련을 보고 남궁혁이 섭섭한 듯 말을 내뱉었고 무각은 거친 콧숨을 뿜어냈다.
그제야 남궁혁과 무각을 본 당화련은 장난스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가요. 자리를 준비해 놨어요.”
사천당가는 많은 손님이 찾아왔기에 어디를 가도 시끌벅적했다.
당화련이 안내하는 곳은 그런 인파에서 멀어져 조용히 느긋함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본가에서 가꾸는 화원이에요.”
담장을 넘자 여러 냄새가 섞인 듯한 기이한 향이 맴돌고 있었다.
이곳은 당가의 가솔들만 출입할 수 있는 화원이었는데 기기형형의 다양한 화초들을 볼 수 있었다.
“죄다 처음 보는 것들이군.”
처음 보는 화초들에 신기해한 무각이 손을 가져가자 당화련이 주의를 시켰다.
“무각 오라버니, 거기 있는 대부분이 독초이니 조심하세요.”
“응? 화원에 독초를 키운다고? 정말 기이한 집안이야.”
화원에 독초를 함께 키우는 가문은 아마도 사천당가가 유일할 것이다.
당화련의 말에 질색한 무각은 아예 관심을 꺼버렸다.
화원의 중앙에는 편히 앉아 주변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작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자에 홀로 앉아 있던 사내는 걸어오는 팽무성 일행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천당가에 온 걸 환영하네.”
정자에서 팽무성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사내는 당화군. 사천당가의 소가주이자 당화련의 하나뿐인 오라비였다.
“화군, 오랜만일세.”
“서신을 보내도 그리 안 오더니 이제야 행차하셨군.”
“하하, 미안하네.”
남궁혁과 당화군은 나이가 같고 몇 년 동안 함께 오가행을 했기에 절친한 사이였다.
“이 친구들이 팽무성 소협과 무각 소협이로군. 화련이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네.”
“처음 뵙겠습니다. 팽무성입니다.”
“무각이오.”
“반갑군. 서 있지 말고 다들 들어오시게.”
당화군의 손짓에 정자 안으로 들어온 일행들은 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기다란 상에는 수많은 음식이 먹음직스레 차려져 있었는데 대체로 붉은빛을 띤 음식이 많았다.
악산봉봉계(樂山棒棒鷄), 원롱옥잠(原籠玉簪), 간편우육사(干編牛肉絲) 등 사천을 대표하는 요리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팽 소협이 미식을 즐긴다고 하여 숙수들에게 신경 좀 쓰게 했지.”
상 앞에 앉자마자 걸어오며 줄곧 맡았던 화원의 특이한 향은 단번에 사라졌다.
그 대신에 코를 점령한 향신료의 강한 향과 매운 향은 사천에 도착했다는 느낌을 확 살려주고 있었다.
“음.”
“흐음...”
이에 사천요리에는 익숙하지 않은 팽무성과 무각은 절로 긴장해야 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본 당화군은 웃으면서 비교적 색이 연한 음식을 권했다.
“개수백채(開水白菜)라는 것인데, 매운맛보다는 야채의 싱싱한 맛으로 먹는 것이네. 이것부터 먹어보시게.”
당화군의 제안에 팽무성은 조심스레 한 숟가락을 목으로 넘겼다.
육수를 낸 국물에 배추 등의 야채를 넣고 양념을 넣어 끓인 음식이었는데 확실히 매운맛이 덜했다.
그 신선한 맛에 팽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요.”
그에 용기를 얻은 무각도 조심스레 입을 벌렸고, 고개를 끄덕이며 맛있게 먹자 당화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후후, 다들 잘 먹는군. 사천요리라 하여 매운맛만 강한 것이 아니니 하나씩 천천히 음미해 보게.”
남궁혁은 여러 번 당가에 방문한 덕에 사천요리가 익숙한 듯 마파두부로 숟가락을 옮겼다.
“당가의 마파두부는 천하제일이라 할만하지.”
당화군은 남궁혁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 팽무성 일행과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왜 이리 쳐다보시는지 모르겠네.’
팽무성은 이야기하는 종종 자신을 살피는 당화군의 예리한 눈빛을 느꼈지만 이를 모른 척했다.
이 각 정도 자리를 지키던 당화군은 젓가락을 내려놨다.
“나는 먼저 일어나지. 천천히 즐기라고.”
“더 있지 않고.”
남궁혁이 잡자 당화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잔치 전에는 소가주인 내가 손님들을 챙겨야지. 오늘도 만날 사람이 많아.”
정자를 벗어나려던 무언가 생각난 듯 발길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밤에 아버님이 간단한 자리를 만드신다더군. 다들 알고 있으라고.”
‘자연스레 자리가 만들어졌구나.’
팽무성은 품속의 서신을 만지작거렸다.
본래 당백과 만날 자리를 당화련에게 부탁하려 했으나 일이 의외로 쉽게 풀렸다.
당화군이 떠나고 팽무성 일행은 저들끼리 얘기를 나누었다.
당화련이 삼 년간의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무각이 섬서에서 만난 마인에 대해 침 튀기며 말하기도 했다.
적당히 음식과 술이 들어갔을 때 남궁혁은 그동안 아껴놓았던 호리병을 꺼내놓았다.
“화련아, 우리 네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마시기 위해 준비한 술이다.”
“와아.”
당화련은 호리병을 보며 눈을 반짝였고 다른 세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당화련을 빼고 저들끼리 먼저 호리병 하나를 비웠다는 것은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할 비밀이었다.
“이 술은 화련이도 마실 것이라 조금 연하게 만들어봤네. 네 가지 꽃을 넣어 만들어서 사화주(四花酒)라 이름 붙였지.”
마개를 따자 향긋한 향이 올라왔다.
살짝 달달한 냄새도 섞여 있어 독한 술을 좋아하지 않는 당화련도 만족했다.
“잘 만드신 것 같아요.”
잔에 술이 채워지고 네 사람은 동시에 술의 달콤한 맛에 빠져들었다.
“이것도 맛있습니다.”
목을 자극하지 않는 부드러운 목 넘김을 보니 확실히 이전에 낙양에서 마셨던 술보다 연한 부분이 있었다.
“이것도라뇨?”
눈치가 빠른 당화련이 빠르게 낚아챘지만 팽무성은 아무렇지 않게 대응했다.
“섬서의 객잔에서 좋은 술을 마셨거든.”
이에 남궁혁과 무각은 순간 얼굴이 굳었으나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남궁 형은 그냥 검을 놓고 술을 만들어도 되겠는데.”
무각의 칭찬에 남궁혁이 껄껄 웃었다.
“나중에 은퇴하면 양조장이나 차려야겠구나.”
“그럼 나는 그 앞에 작은 절이나 하나 지어야겠다.”
두 사람 덕분에 한 차례의 위기가 자연스레 흘러갔다.
“아직 얼굴에 주름도 생기지 않은 사람들이 무슨 은퇴한 뒤를 말하고 있어요?”
팽무성은 잘 어울리는 이들을 보며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제일 약한 화련이도 초절정 초입.’
한 사람씩 둘러보던 팽무성은 생각에 잠겼다.
전생과 같은 속도라면 당화련과 무각은 아직 절정에 머물러 있을 터였다.
이대로 성장세를 이어간다면 전생의 사패를 뛰어넘는 것도 그리 먼일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마군을 두 명 죽였으니...’
모든 마군의 위치를 팽무성이라 해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전생의 기억으로 몇 군데 마군들이 노리고 활동하는 구역을 알고 있었다.
‘오독문을 시작으로 구마군을 하나씩 없애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현재의 전력이라면 사패끼리 돌아다니며 마군을 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팽 오라버니, 왜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어이, 팽 시주. 잔이 비었다고.”
남궁혁이 팽무성의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팽 아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닙니다. 혀가 꽤 얼얼해서요.”
팽무성은 피식 웃으며 단번에 술을 털어 넣었다.
‘이렇게 모여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 * *
사천성 흑수(黑水).
오독문주가 기거하는 장소에는 문주인 오독괴노(五毒怪老)말고도 시퍼렇게 젊은 사내 두 명이 더 있었다.
웃긴 것은 이 장소의 주인인 오독괴노 말고 다른 이가 상석에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상석에 앉은 사내가 다른 사내를 보고 물었다.
“풍마군. 이렇게 사천까지 몸소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럼 네놈은 좌사와 마인 백을 동시에 잃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풍마군이 으르렁거리자 독마군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을 저었다.
“나도 팽무성에게 피해당한 몸이다. 암마종 놈들이 저들이 실패한 것을 얼마나 우리 탓으로 돌리던지.”
무신총의 얘기를 꺼내는 독마종은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시퍼런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그 살기를 읽은 풍마군은 불평을 멈추고 주제를 돌렸다.
“오독문에 우리 둘이 나선다 해도 상대는 사천당가다. 거기에 이번에 식마군을 죽여 버린 그 세 놈도 있고. 쉽지 않을 거다.”
풍마군의 말도 일리가 있어 독마군은 바로 수긍했다. 허나 독마군은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검마군도 참가할 것이다.”
“검마군? 그놈은 소교주의 그림자나 다름없는 놈이 아니냐.”
“소교주가 팽무성에게 관심이 생긴 모양이다.”
검마군의 등장에 풍마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마군은 구마군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무위를 지닌 놈이었다.
거기에 검마종 자체도 강했으니 그들의 지원은 커다란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 사천당가를 지울 수도 있겠어.”
풍마군의 말에 독마군의 음산한 미소도 짙어졌다. 본래 자신의 세운 계획대로면 그것만 얻고 빠져야겠지만,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팽무성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풍마군이 스스로 복수의 기회를 찾아서 사천까지 왔고,
소교주가 팽무성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탓에 검마군이 활동을 시작했다.
팽무성 덕분에 자신이 깔아놓은 판이 훨씬 커지게 된 것이었다.
‘팽무성, 어지간히 설쳤어야지. 이번에 대가를 치르겠구나.’
이러니 독마군의 욕심이 커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후후, 마군이 둘이나 죽었으니 우리가 세운 공이 압도적인 우위를 지니게 되겠지.”
두 사내의 대화에 좀처럼 들리지 않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독마군은 옆에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하던 오독괴노에게 말했다.
“괴노, 이번 기회를 살려 개인적인 원한도 풀고 큰 공을 세워보시오.”
독마군의 말에 오독괴노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지요.”
군말 없이 따르는 오독괴노의 모습을 보며 풍마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존심 강한 노물을 어찌 저리 고분고분하게 복종시켰는지 모르겠군.’
독마군은 무림에 나오고부터 오독문을 노렸는데 지금의 오독문은 독마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상태였다.
지금의 오독문은 마교의 사천 지부나 다름없는 셈이 되었지만 사도천은 물론이고 사천의 그 어떤 문파도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다.
구마군이 동료가 아닌 경쟁자의 입장임을 고려하면 독마군도 상당히 위험한 상대였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이나 할까.”
“그러지.”
독마군의 제안에 풍마군은 눈의 힘을 풀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세 개의 마수가 사천당가에 천천히 뻗고 있었다.
독에 취하는 생일잔치.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