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막내아들-75화 (75/200)

75화

밤이 깊어질 즈음, 팽무성 일행과 당백은 함께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그랬었나. 사천도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어.”

얘기를 듣던 당백은 팽무성의 옆모습을 흘끗 쳐다보았다.

명목상으로는 섬서의 마인들에 대해 듣기 위해 불렀지만 오랜만에 만난 팽무성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 컸다.

‘백가회 때는 확실히 한 수 아래였거늘.’

그런데 지금은 팽무성의 무위를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당백은 놀라움보다는 뿌듯한 감정이 더 컸다.

당가의 가솔도 아닌데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은 아마도 당화련의 탓이 컸다.

‘이만한 신랑감도 없기는 하지.’

만약 팽무성을 놓친다면 당화련이 평생 홀로 살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딸이지만 정말 까다로운 녀석이야.’

초조한 듯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당백은 아비 속도 모르고 떠들고 있는 당화련을 보고 몰래 한숨을 내뱉었다.

당백은 요새 태상가주인 당명을 비롯한 장로들에게 시달리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죽기 전에 당화련이 혼인하는 것은 봐야 하지 않겠냐고 당백을 압박하고 있었다.

-가주, 화련이가 초절정에 올랐네.-

-아버님, 정말입니까? 경사로군요.-

-경사라니? 화련이의 말을 잊었는가. 이러다가 화련이가 평생 혼자 늙게 생겼단 말일세.-

당백은 일전에 당명과 하던 대화를 떠올리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당화련이 초절정에 이르자 장로들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당백은 눈앞의 후기지수들을 보았다.

전원이 초절정에 도달한 믿을 수 없는 광경. 다음 시대를 이끌 재목이라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었다.

강호의 명숙들이 이들을 보았다면 감탄을 터트리며 기뻐했겠지만 당백은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무각은 승려, 혁이는 이미 약혼했고, 역시 남은 것은 무성이 뿐이로구나.’

결심을 내린 당백은 입을 열었다.

“밤늦게 붙잡아서 미안하군. 사천까지 오느라 고생했으니 푹 쉬어라.”

“아닙니다,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남궁혁을 필두로 일행들이 일어날 때 팽무성은 자리를 지켰다.

“잠깐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세.”

이에 집무실에는 팽무성과 당백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이것 참 묘한 불편함이라 해야 하나, 위압감이라 해야 하나.’

팽무성은 백가회에서 당백을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만 애써 무시하고 소매로 손을 가져갔다.

“이것을 봐주시지요.”

팽무성은 천살택문에게 받은 서신을 당백에게 건네주었다.

서신을 읽던 당백은 눈을 떼지 못한 채 팽무성에게 물었다.

“어디서 구한 정보인가?”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믿을 만한 정보입니다.”

당백은 깊게 캐묻지 않고 서신의 내용에 집중했다. 정보만 정확하다면 출처는 상관없었다.

“오독문, 요즘 얌전하더니 역시 움직이고 있었나.”

팽무성은 정보만 건넬 뿐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전생과 일이 다르게 진행됨을 알게 되었으니 섣불리 전생의 정보를 꺼냈다가 혼선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커다란 신세를 졌군.”

“아닙니다. 저번에 언가의 일에 당가가 목소리를 내준 것을 팽가는 잊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겠습니다.”

이를 당백은 흐뭇하게 쳐다봤다. 팽무성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 * *

당명의 생일잔치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경계를 서는 당가 무인들의 눈빛이 미묘하게 날카로워진 것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생일잔치는 준비된 연회장에서 진행되었다.

팽무성 일행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사천요리를 즐기고 있었다. 제법 익숙해지니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 있었다.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상 위로 드리워졌다.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백가회 이후로 처음이군요. 황보 소협.”

“그동안 잘 지냈느냐, 세운아.”

자리에 찾아와 인사하는 황보세운을 보곤 일행들도 저마다 인사를 나누었다.

“팽 소협, 오랜만에 보는군요.”

“최근에도 활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황보세운을 시작으로 팽무성의 자리로 다가오는 후기지수들이 늘어났다.

백가회에서 한 번 안면을 튼 덕분인지 제법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팽무성 일행은 주변에 있던 후기지수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사천당가의 행사인 만큼 후기지수들도 쟁쟁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으나 팽무성에 비하면 빛이 바래는 것이 현실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팽 소협.”

후기지수들이 인사를 하고 돌아가자 이를 기다리던 도사와 비구니가 찾아왔다.

“청성의 정진이라 합니다.”

“아미의 원헌이예요.”

자신의 자리에서 저 장면을 지켜보던 황보세운은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팽 소협인가. 엉덩이가 무거운 청성과 아미가 먼저 움직이게 하는군.’

같은 구파라고 해도 성향이 제각각이었는데 청성과 아미는 폐쇄적인 성향이 강했고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했다.

‘저 덩치 큰 자가 근래에 마인을 베었다는 팽무성인가.’

‘저자가 소림의 승려구나.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

청성과 아미의 제자는 본래 자신들이 받아야 할 관심을 독식하는 팽무성 일행이 뭐가 그리 대단한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발걸음했다.

“다른 분들이 왜 이리 모여있나 싶어 와봤더니 검호와 패호도가 계셨군요.”

정진이 팽무성과 남궁혁을 살피는 사이에 원헌은 손에 고추기름을 묻힌 채 술을 마시고 있는 무각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어찌 불도를 걷는다는 자가...’

원헌이 혐오하는 눈으로 노려보자 무각은 되려 째려보며 툭 내뱉었다.

“뭐요? 땡중이 곡차 마시는 것 처음 보시오?”

“네?”

무각의 뻔뻔한 자태에 원헌은 양 볼이 붉어져 입술을 파르르 떨 뿐이었다.

이에 옆에 있던 남궁혁과 당화련은 기습적으로 튀어나오려 하는 웃음을 참는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정진은 원헌과 무각은 무시하곤 팽무성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청성의 정진이 팽 소협께 비무를 청합니다.”

정진은 애초에 명성이 높은 팽무성을 꺾으려고 이 자리에 왔다.

다른 곳도 아닌 사천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후기지수가 주목받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오늘은 축하를 위한 자리이니 쇳소리는 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팽무성은 찰나의 고민도 없이 바로 거절했다. 이에 정진의 눈썹이 휘었지만 맞는 말이라 뭐라 고집부릴 수가 없었다.

“그렇군요.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 한 잔 드리지요.”

정진이 술병을 잡자 팽무성도 어쩔 수 없이 술잔을 내밀었다.

‘느껴지는 기도를 보면 그리 강하지는 않은데, 비싼 척을 하는군.’

정진은 술에 내공을 실어 따라냈다.

정진은 청산파에서 받은 영약을 제하고도 두 번의 기연을 얻어 내공에 엄청난 자신감이 있었다.

술잔이 무거워짐을 느낀 팽무성은 입꼬리를 올렸다. 정진의 수를 눈치챈 것이었다.

‘귀엽네. 어디서 들은 것은 있어 가지고.’

팽무성은 가볍게 술잔을 입에 털어 넣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한 잔 받으시죠.”

팽무성이 아무렇지도 않자 정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술잔을 내밀었다.

술병이 기울어지고 딱 한 방울이 떨어졌을 때, 술잔을 받치던 두 손이 휘청였다.

“윽?”

술이 아니라 바위가 떨어진 듯한 무게감에 정진은 급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쪼르륵

술이 잔을 채울수록 무게는 급격하게 늘어났고 정진은 술잔의 절반을 채우기도 전에 술잔을 놓치고야 말았다.

파스슥

땅에 떨어진 술잔은 조각이 나서 깨지는 게 아니라 한 줌의 가루가 되어있었다.

이를 본 정진의 목젖이 크게 꿈틀거렸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것이었다.

정진은 팽무성의 입술은 웃고 있으나 저 매서운 눈에는 미약한 한기가 서렸음을 이제야 눈치챘다.

‘그야말로 정저지와로군.’

창피함에 얼굴을 붉힌 정진은 제대로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고개가 뻣뻣한 정진이 먼저 고개를 숙이자 후기지수들은 깜짝 놀랐다.

“생각이 어렸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첫 만남은 무례했으나 사과에 진심이 느껴졌기에 팽무성도 눈에 힘을 풀고 술잔을 채웠다.

“벌주입니다. 이것을 마시고 깨끗하게 잊읍시다.”

“감사합니다. 팽 소협.”

정진은 한입에 술을 털어 넣고 얌전히 물러났다.

“역시 어느 세대든지 낭중지추는 있는 법이지.”

“저만한 무위라면 마음껏 뽐내고 싶을 것인데, 후기지수치고 생각이 깊은 아이야.”

안쪽에서 당명과 함께 술자리를 벌이던 노고수와 명숙이 팽무성을 칭찬했다.

이들은 처음부터 일련의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후후, 정진이 요새 기고만장했었는데, 팽가의 아이가 잘 끊어 주었어.”

청성파의 대표로 온 선유 진인이 껄껄 웃자 옆에 있던 당명이 장난스레 물었다.

“자파의 제자가 저리 당했는데 웃음이 나오냐. 말코야.”

“젊을 때는 한 번씩 데어 봐야지. 그래야 크는 법일세. 자네가 후기지수 때 검존, 그 노인네한테 호되게 당한 것처럼.”

“시끄럽다.”

당명은 클클 웃으며 팽무성의 옆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듣던 것보다 뛰어난 아이로군.’

당명은 팽무성과 당화련이 나란히 앉아서 얘기하는 것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 망아지 같은 녀석이 저런 모습을 보일 줄이야.’

당명은 갓난아기부터 당화련을 봐왔지만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보지 못했다.

당화련의 눈은 팽무성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다채롭고 화사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연정에 빠진 여인의 얼굴이구나.’

당명이 흐뭇하게 당화련을 바라볼 때 당백이 다가왔다.

“아버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러냐.”

대답하는 당명의 목소리에는 왠지 힘이 없었다. 그 이유를 노고수들은 아는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와 미련이 남는 건가?”

“두 눈 딱 감고 손을 씻어야 남은 여생 편히 보내야지 않겠나.”

금분세수식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잔치 내내 울렸던 풍악이 멈추었고 객들도 잠시 술잔을 내려놓고 한자리에 모였다.

준비된 단상에 오른 당명은 자신 앞에 모여있는 객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오늘 이 자리를 위해 멀리서 찾아오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오.”

당명은 앞에 놓인 금빛 대야와 세 개의 향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본인의 아흔 번째 생일임과 동시에 은퇴하려는 날이오.

만풍독선(晩風毒扇)이라 불리며 무림에 명성을 날렸으니 더는 미련이 없소.”

당명은 그릇에 꽂힌 세 개의 향에 삼매진화를 펼쳐 연기를 피워냈다.

“일 년 전에 금분세수 배첩을 뿌려 네 명의 무인을 만나 은원을 풀었소이다.

이 향이 태워져 사그라질 동안 원한을 가진 이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대야에 담긴 물로 손을 씻고 은퇴하겠소.”

이 말을 끝으로 당명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향은 연한 연기를 피우며 느리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장내는 고요해졌고 어딘가 경건하고 무거운 공기가 맴돌았다.

도산검림의 무림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무인의 마지막 종착지였다.

이 자리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무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그렇기에 초연히 앉아서 기다리는 당명의 모습에 제각기 다른 감상을 하고 있었다.

후기지수들은 지금의 당명처럼 멋들어지게 은퇴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고.

중견 고수들은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잊지 않은 원한이 있는지 확인하고, 저 나이가 되도록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는지 고민했다.

반면 당명과 같은 시간을 보낸 노고수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긴 무림의 역사에서 금분세수를 통해 무사히 은퇴한 무림인은 극히 일부였다.

강호의 원한은 굽이치는 파랑과 같아서 처음에는 작았다 해도 어느새 불어난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 들어와 휩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세 개의 향이 거의 타들어 가서 한 줌의 재가 되기 직전이었다.

“기다리게 했구나. 당명.”

오독괴노가 장내로 발을 디딤과 동시에 꽂혀있던 향들은 재가 되어 접시에 떨어졌다.

극적인 등장에도 당명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많이 기다렸다, 괴노.”

일 갑자를 이어온 두 사람의 악연. 그 질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런데 너 혼자 오면 될 것을 많이도 끌고 왔구나.”

당명은 오독괴노 뒤로 시립한 열 명의 무인을 보며 말했다.

이에 오독괴노는 입을 벌리며 검은 이를 드러냈다.

“오늘은 우리의 악연을 끝냄과 동시에.”

오독괴노는 자신에게 다가온 당명에게 기습적으로 장력을 내질렀다.

한 가지 색으로 설명하기 힘든 혼탁한 빛의 독장이 당명에게 날아들었다.

“사천당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고수는 사선(死線)을 넘으며 탄생한다.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