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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막내아들-80화 (80/200)

80화

마교의 습격 이후 팽무성 일행은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천당가가 팽무성 일행을 귀빈 대우를 해주며 별채 하나를 통째로 내준 덕분이었다.

덕분에 일행들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회복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요새는 며칠 걸러서 붕대를 감는단 말이지.”

방 안에서 뒹굴뒹굴하는 무각은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일전에 풍마군과의 전투에서 이마를 크게 베인 탓이었다.

“철두공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이마를 보며 말하는 팽무성에 무각의 눈이 휘어졌다.

“낄낄. 그놈도 머리에 칼이 안 박히니 크게 당황하더라고.”

불존의 강요에 억지로 배울 때는 괴로웠지만, 막상 철두공을 익혀놓으니 은근히 쓸모가 많았다.

“남궁 오라버니는요?”

당화련은 작은 쟁반에 방금 달여온 탕약을 가져왔다.

“수련하러 가셨어. 이번에 뭔가 단초를 얻은 모양이시던데.”

“흐응.”

당화련은 콧소리를 흘리며 두 사람에게 탕약을 나누어 주었다.

사천당가는 중원의 유명한 의원에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덕분인지 무각과 팽무성의 내상과 외상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크으, 쓰다.”

탕약을 한입에 털어 넣던 무각이 무언가를 보곤 도끼눈을 떴다.

“그건 뭔데?”

탕약을 마신 팽무성의 입에 당과를 넣어주던 당화련은 뜨끔해서 멈칫거렸다.

“당과가 하나밖에 없었나?”

모른 척하는 당화련의 모습에 무각은 고개를 저었다.

“내 입은 입도 아니야? 그런 거냐?”

당화련은 구석에 굴러다니던 사과를 집어서 무각에게 던져주었다.

“이거나 먹어요.”

“불법(佛法)을 배울 때도 차별이 없는 법이거늘, 당과를 먹는 데 차별이 있다니. 아미타불.”

혼자 한탄하는 무각을 내버려 두고 당화련은 팽무성의 상처를 봐주고 있었다.

“와, 피멍이 많이 사라졌네요.”

본래 상반신의 칠할 이상이 피멍으로 심각하게 물들었던 팽무성이었다. 지금은 명치와 양쪽 가슴 주변에만 피멍이 남아있었다.

당화련은 피멍 위로 당가 비전의 약을 바르곤 다시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때, 팽무성도 손가락에 약을 발라 당화련의 뺨에 남은 흉터에 발라주었다.

팽무성은 전생의 기억도 있었기에 자연스레 약을 발라주었지만, 당화련은 팽무성의 손길에 움찔거렸다.

“왜?”

무심한 물음에 당화련은 눈을 살짝 치켜들어 잠시 팽무성을 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팔을 괸 채 누워 있던 무각은 아무 말 없이 이를 쳐다보더니 사과를 신경질적으로 베어 물었다.

아그작

* * *

초월경에 이른 이후 전신으로 자연지기를 받아들이는 덕분일까, 팽무성의 회복속도는 보통 무림인을 현저히 넘어서고 있었다.

사흘 만에 부상을 거의 회복한 팽무성은 홀로 사천당가를 거닐고 있었다.

습격 이후에 난장판이 된 당가와 당가타를 수복하느라 사천당가는 위아래 할 것 없이 다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건너편에서 팽무성처럼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걸어오는 사내가 보였다.

팽무성은 자신을 보고 곧장 걸어오는 사내를 보며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님을 눈치챘다.

“안녕하시오, 팽 소협. 당영주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오.”

이름이 아닌 직책을 말하는 신기한 인사였다.

“하북팽가의 팽무성입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잠시 같이 걷겠소?”

“그럽시다.”

팽무성과 당영주는 나란히 걸었다.

길을 모르기에 별채 주변만 돌고 있었지만, 당영주의 안내로 좀 더 넓은 반경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홀로 마왕이라는 자를 막아내셨다 들었소.”

“간신히 버텼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이에 당영주는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본인도 도망치는 그 마왕이라는 자를 대적했지만 이십여 합을 버티질 못했소.”

당영주는 그때 얻은 내상이 제법 깊어 업무를 손에서 놓고 휴식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자와 같은 자들이 세 명이나 더 있다 들었소, 사세마왕이라 했던가.”

“맞습니다.”

팽무성은 사세마왕에 대한 정보를 당가에 흘렸다. 괴세마왕과 싸우다 얻은 정보로 포장했기에 별문제는 없었다.

지금쯤이면 무림맹에도 이 정보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흐음.”

당영주는 침음을 흘리며 어두운 빛을 띠었다. 몸소 겪은 마교의 전력은 강대했다.

그것도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 당영주는 앞으로 사천당가를 온전히 수호할 수 있을지 자신감이 없었다.

팽무성은 그런 당영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이는 이립 주변으로 보였는데 지닌 무공은 당백이나 당명보다 뛰어났다. 현 사천당가의 제일 고수는 당영주라는 뜻이었다.

‘이런 자가 정마대전에서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니.’

팽무성은 생각한 바를 정리하고 물었다.

“당영주라는 직책이 특수한 것인가 보군요.”

대답을 잠시 고민하던 당영주는 결국 입을 열었다. 팽무성이 쉽게 입을 떠벌리고 다닐 위인은 아니라 여겼다.

“맞소. 사천당가에 위기가 닥치지 않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소. 본인이 팽 소협을 만나고 있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오.”

이 대답에 팽무성은 확신했다.

‘전생에는 사천당가가 멸문할 때 함께 산화했군.’

당영주의 무공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전장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고수임은 확실했다.

이런 고수가 그저 당가의 음지에 틀어박혀 적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는 것은 정파에 있어 손해가 막심한 일이었다.

“솔직히 두렵소. 몰려오는 마교를 진정 내 손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

팽무성은 그제야 당영주가 처음 보는 자신에게 이리 술술 속내를 꺼냈는지 알았다.

음지에서 사천당가를 수호하는 무거운 사명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사내였다.

더구나 당가제일고수인 그가 적에 대한 두려움을 다른 가솔 앞에서 내보일 수는 없을 터.

해서 당영주는 팽무성을 찾아왔을 것이다.

이 사천당가에서 유일하게 자신보다 강한 무인, 자신이 두려워한 마왕을 막아낸 사내를 말이다.

“확실히 지금처럼 사천당가 안에만 계시면 당가를 지키기는 어려울 겁니다.”

당영주는 팽무성을 말없이 응시했다.

“무림을 지키는 것이 사천당가를 지키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당영주는 그 말을 곱씹으며 팽무성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허나 말했다시피 당영주는...”

팽무성은 당영주의 말을 끊고 물었다.

“사천당가를 위해 죽음도 각오하셨습니까.”

그에 당영주의 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물론이오, 사천당가를 수호한다는 사명 하나로 살아온 몸이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 규율을 두려워하십니까.”

순간 당영주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팽무성의 눈길이 아득히 높고 멀게 느껴졌다.

“마교는 이것저것 재면서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당영주께서는 품고 계신 사명을 어떻게 지킬지, 그것만 생각하십시오.”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에 당영주는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팽 오라버니? 여기서 뭐 하세요?”

뒤에서 뚝뚝 끊어지는 당화련의 목소리. 이에 팽무성은 등이 섬칫 거림을 느꼈다.

“아.”

팽무성은 오늘 당화련과 함께 화원을 구경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래서 시간에 맞춰서 밖에 나왔던 것인데 당영주를 만나서 깜빡 잊어버렸다.

조심스레 등을 돌리자 웃고 있는 당화련이 보였다.

정확히는 입은 웃는데 눈은 서늘했다. 보는 이를 따끔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조합이네요.”

당화련은 당영주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당영주도 고개를 끄덕이곤 팽무성에게 말했다.

“팽 소협. 어서 가보시오. 독화가 가시를 드러냈으니.”

많이 밝아진 당영주의 얼굴에 팽무성은 고개를 숙이곤 당화련에게 뛰어갔다.

“나 혼자 한참 기다린 거 알아요?”

“미안하다.”

성이 난 당화련은 팽무성의 옆구리를 꼬집으려 했으나 바위같이 단단해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에 당화련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팽무성은 어찌할 줄 몰라 급히 머리를 굴렸다.

“나갈까? 빙과 사줄게.”

“내가 어린애예요? 먹을 것으로 화를 풀게?”

이에 당황한 팽무성이 다시 머리를 굴릴 때 당화련이 소매를 끌며 말했다.

“당가타에 자주 가는 맛집이 있으니 거기로 가요.”

당화련과 투닥거리며 멀어지는 팽무성을 지켜보던 당영주는 홀로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림이라...”

무림에 나가 수십, 수백의 마인을 불태우면 사천당가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태우고 또 태워서 무림을 지켜낸다면 당연히 당가에는 발도 못 붙일 터.

화륵

당영주는 자신의 장심에서 타오르는 독염을 보더니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의 끝에는 가주전이 있었다.

* * *

사천성 흑수(黑水) 오독문.

흑수의 넓은 평원에 자리 잡은 오독문을 포위하듯 둘러싼 병력이 있었다.

무림맹 사천지부를 비롯하여 당가, 청성, 아미의 연합이었다.

이번 당가의 습격에서 오독문뿐만 아닌 마교가 관련된 것이 드러나며 일이 커진 탓이었다.

독마군, 오독괴노를 비롯한 상당한 전력이 사천당가에서 산화했으나, 남은 오독문의 전력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팽무성은 천살택문의 도움으로 오독문에 독마우사와 오독괴노의 제자가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이번에 마인들의 강함을 확실히 알았기에 정파 측도 만만의 준비를 하고 흑수에 도착했다.

다만, 포위망을 구축했을 뿐, 공격은 시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공격 대상인 오독문인 탓이었다.

“사도천의 병력은 언제 도착한답니까?”

유현 진인의 물음에 사천지부장 남석태가 천막에 걸린 사천전도를 보며 답했다.

“어젯밤에 송반(松潘)을 넘었으니 지금쯤이면 거의 왔을 겁니다.”

“끄응, 저것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마당에 이리 속 편히 기다려야 하다니.”

유현 진인의 말에 천막에 있던 다른 이들도 동감하는 눈치였다.

마교와 관련되었다지만, 오독문은 사도칠문에 속하는 사파였다.

섣불리 공격했다가 사도천이 어떤 트집을 잡아 분쟁을 일으킬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여 무림맹은 사도천에 이 일을 알렸지만, 병력을 파견한다는 짧은 대답뿐이었다.

마교를 주시하는 무림맹으로선 불필요한 분쟁은 최대한 피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사도천의 병력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것 같군요.”

눈을 감고 있던 현정 신니의 말에 다른 이들도 땅을 타고 밀려오는 작은 진동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막 밖으로 나가보니 저 멀리 북쪽에서 먼지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두두두두

먼지구름이 가까워질수록 땅의 울림은 커졌고 평원을 힘차게 내달리는 전마(戰馬)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펄럭이는 혈랑(血狼)의 깃발을 보고 중얼거렸다.

“적철혈랑대로군요.”

“지독한 놈들을 보냈군.”

개개인의 창술도 위협적이지만, 그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고 죄다 쓸어버리는 냉혹한 놈들이었다.

히히힝

이십 보 앞에 멈춰선 적철혈랑대 삼백 기는 위협적인 기세를 숨기지 않고 흘려냈다.

이에 정파 측 무인들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쉽게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정파의 대표는 누구인가?”

적철혈랑대의 틈 사이로 한 노인이 튀어나왔다. 이에 남석태가 앞으로 나서며 포권했다.

“무림맹 사천지부장, 남석태라 하오.”

“사도천 오장로 전구상이라 하네.”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대충 고개를 까닥거리는 전구상의 작태에 남석태는 눈을 꿈틀거렸지만, 인내심을 발휘했다.

‘장로가 튀어나오다니, 사도천에서도 이 일을 심각하게 여기는 중이군.’

전구상은 무표정한 남석태를 내려다보더니 씨익 웃었다.

“이제 우리가 왔으니 그대들은 돌아가도 좋네.”

“그게 무슨 소리요?”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건가. 오독문은 사파, 그러니 사도천이 처리하겠다는 걸세.”

이에 남석태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오독문은 마교와 결탁하여 사천당가를 공격했소. 그때부터 이미 사도천의 손을 벗어난 것이오.

애초에 사도천은 이 사실도 모르고 있지 않았소.”

“그것은 중요하지 않네, 사도천이 행하겠다고 결정이 나면 행할 뿐일세.”

전구상의 억지에 남석태는 결국 얼굴을 굳혔다.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얹겠다는 심보였다.

“우리가 물러날 일은 없소.”

“그렇다면 싸워야지. 우리가 이렇게 마주 보고 혀를 놀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군.”

전구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적철혈랑대는 들고 있던 장창을 겨누며 정파 무인들을 위협했다.

거기에 기세가 더욱 난폭해짐은 물론이고 살기마저 섞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결국에 정파 측에서도 대항하듯 기세를 끌어올렸다.

양측의 충돌에 분위기는 단번에 험악해져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 직전이었다.

전구상은 허리춤의 검을 잡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 검에 위선자들의 피를 먹이는 것은 십 년만인가.”

“이 작자들이 정말!”

참을 데까지 참은 남석태도 검에 손을 가져갈 때.

후웅

대기가 푹 꺼지며 단숨에 주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양측의 무인들이 기세를 거둔 게 아니었다. 압도적인 하나의 기세가 모두의 기세를 억눌러 밀어낸 것이었다.

전구상과 남석태는 깜짝 놀라서 이 상황을 장악한 한 사람을 쳐다봤다.

“오장로, 더는 삶에 미련이 없는 듯 설치는군.”

두 사람에게 천천히 걸어오는 팽무성.

‘이놈은 대체...’

전구상은 가까워지는 팽무성의 덩치가 두 세배는 더욱 크게 보였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팽무성의 등장에 전구상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누구시오?”

오만방자했던 전구상의 말투가 조금 공손해졌다. 팽무성은 당당히 가슴을 펴 무복의 호랑이 무늬를 보여주며 말했다.

“하북팽가의 소가주, 팽무성이다.”

사파의 하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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